구약/여호수아서1

여호수아서13장 나의 기업이신 하나님

호리홀리 2014. 12. 18. 15:34

13:1-7 기업이신 하나님

 


 

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하셨다. 시작은 여호수아이며 얼핏 보면 여호수아가 초점이다. 이런 관점으로 읽으면 13장 전체가 딴판이다. 온통 모세이야기 이다. 13장 전체가 모세가 행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13장을 구조적 개념으로 읽는 혜안이 필요하다. 시작은 여호수아에서 출발하고 왜 모두 모세 이야기인가?

 


 

1절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가?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은데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이 많다고 말씀하고 있다. 느낌이 어떤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정작 지도자는 늙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기분이 든다. 걱정이 앞서는 말씀이다.

 


 

13장이 온통 그 이야기이다. 모세를 하나님이 강하게 들어 썼지만 지나갔다. 그래도 일은 여전히 진행되어 왔지 않느냐!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어느 목사님 때문에.....”, “어느 목사님이 계셔야 하는데...” 이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항상 하나님이 일하신다.

 

이것을 역사적인 맥락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늙었고.... 차지해야 할 땅은 아직 많고....?!”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의문이다. 걱정이다. 그래서 상식적인 질문을 갖는다. “이거 어떻하냐?”한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누구 때처럼? 모세의 때처럼.

 

교회는 주님만을 높여야 한다. 목사가 높아지고 장로가 높아지고 사람의 냄새가 짙게 나고, 시끄럽고, 욕을 먹게 된 것이다.

 


 

11:15절을 돌아가서 다시 보자.

 

הוהי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הוהי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이게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은 하나님 앞에 붙잡혀 쓰임 받다가 간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순례자이다. 사실 땅도, 집도 내 것이 있겠는가? 놓아두고 가게 된다. 잠깐 쓰다가 간다.

 


 

이것이 청지기 정신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無所有)사고와 기독교 정신은 완전히 다르다. 그리스도인이 무소유라고 하는 개념 잘 정리해야 한다. 우리는 소유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다만 내가 가진 것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이 의식이 참으로 중요하다. 내 것이 아니다. 내게 있는 것, 내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절대 내 것은 없는 것이다. 현재 내가 가진 것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그리고 불필요한 것 같지 않겠다는 개념이 그리스도인의 무소유 개념이다. 불필요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욕심이다. 탐심이고 탐욕이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했다. 왜 우상숭배인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다른 것을 찾게 된다. 무엇인가 주신 것 외에 더 챙기려는 욕망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고 나아가 어딘가에서 다른 것을 추구하게 된다. 우상숭배인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조가 롯과 함께 살았다. 하나님이 복을 주어 서로 부유하게 되어 터가 좁아 같이 살지 못할 상황이 도래하였다. 그래서 같이 살 수가 없어서 서로 헤어지기로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롯은 거덜이 나는 길을 가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영, 육간에 복된 존재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상반되게 만들었는가?

 


 

창세기 13: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눈을 들어”라고 했다. 여기 눈을 든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눈에 손을 대고 발뒤꿈치를 들고 내가 본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10절 시작부분에서 “롯이 눈을 들어”라고 하여 자신이 눈을 들었다. 그가 자신의 주관으로 자신의 눈을 들어 본 땅, 여호와의 물댄 동산 같고 당대의 애굽땅과 흡사하였다. 성공이 이미 보장된 땅으로 보인 것이다.

 

그러나 13:14절“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같은 위치에서 아브라함도 눈을 들었다. 그런데 차이점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눈을 누가 들게 하였는가! 하나님이 하셨다. 눈을 들게 하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다. 이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결과이다.(ex,세명의 운전자)

 

창세기 28:20-22절을 보자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이 자기를 찾아온 하나님으로부터 벧엘에서 엄청난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한다. 서원이랄 것도 없이 조건부 약속을 한다.

 


 

유명한 야곱의 3가지 약속이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하였고, 둘째가 하나님의 집, 즉 성전을 세우겠다는 약속이고, 셋째가 십일조를 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이 약속의 서두에 야곱이 조건을 달았다. 하나님이 이런 이런 조건을 해 주시면 하면서 조건부 약속을 드린 것이다. 이게 맞는 태도인가? 십일조를 조건으로 드리는 것은 그야말로 질 낮은 샤머니즘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감사의 최고적 행동이라 하였다. 주신 땅, 주신 재물, 주신 건강 이 모든 것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대표적인 하나로 드림을 말씀드렸다. 야곱의 이 조건적 약속은 정말 잘못된 사건의 표본이다.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야곱이 성경 어디에도 자기가 드린 약속을 능동적으로 지켜간 적이 전혀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누가 했는가?

 


 

야곱의 인생을 질질 끌고 따라 다니시면서 이끌어 이스라엘을 만들고, 벧엘에 다시 세우신다. 그렇게 하시려고 야곱을 외삼촌 집에 보내어 20년 동안  뺑뺑이를 돌린다.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여 성화로 이끌기 위함이다. 왜 돌리시는가? 인간은 다른 생각, 여유를 갖게 되면 선한생각, 착한 일을 하는게 아니라 죄질 생각 밖에 않는다. 다른 사람의 예를 묵상하며 “그래 맞아!” 할 필요가 없다. 돌아볼 것 없이 자신을 보면 안다. 그래서 고달프게 뺑뺑이를 돌린다.

 

처음에는 반응도 빠르고 응답도 빠르고 신앙생활이 신이난다. 그러나 갈수록 고달프게 만든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곱처럼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종결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고난을 통해 성도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

 

내 안에 아브라함의 특성도 있고, 이삭의 특성도 있고, 야곱의 특성도 있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인도하심에 맡겨드리는 믿음의 길을 달려가야 한다.

 


 

아직도 남은 땅이 많았지만(수 13:1),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했고 그 일은 상당히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호수아에게 그 땅을 모든 지파에게 분배하라고 명령하셨다. 열두 지파 중,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이미 모세를 통해 요단강 동쪽의 땅을 얻었으므로, 요단강 서쪽의 땅은 나머지 아홉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나머지 절반의 기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 레위 지파는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는 일에서 제외되었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원문에는 ‘그가’; 모세를 가리킴]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 그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음이었더라”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라고  기록한다.

 


 

민수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 광야에서 각 지파의 사람들의 수를 셀 때, 레위 지파는 모세의 명령대로 빠졌었고, 그 대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야곱의 유언대로 두 지파로 간주되었었다. 레위 지파는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들과 그들을 도와 성막 봉사의 일을 하는 레위인들이었는데 그들만 성막에 대한 책임을 가졌다.

 

숫자적으로도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들에 비해 적었다. 다른 지파들은 20세 이상의 남자들의 수가 평균 약 5만 명 가량이었지만 레위 지파는 1개월 이상의 남자들의 수도 약 2만 2천 명에 불과했다. 레위 지파는 숫적으로 많이 번창하지 못했었다.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를 땅의 분배에서 제외시키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 되셨기 때문이다. 본문 33절은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라고 기록한다. 민수기 18:2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고 하셨었다. 그 말씀대로, 레위 지파의 기업은 하나님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