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여호수아서1

여호수아서 14장: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호리홀리 2014. 12. 18. 15:41

14장: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갈렙”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사자새끼”이다. 여기에는 히브리어 속성상 상당한 의미와 이유가 있다. 본문에 보면 갈렙의 나이 85세이다. 이러한 도전을 보면서 세상에 표현을 빌자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한다. 이 갈렙의 스토리를 보면서 나이가 많음에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한 입지전적인 사건으로 그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많다. 이런 관점은 일반적으로 전형적인 인본주의적 관점이다. 성경말씀을 보면서 항상 가져야 할 개념은 절대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고, 그분이 우리에게 누구이신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성경은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래서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인간과 역사, 그리고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땅을 분배하는 여호수아가 어떤 방법을 택하였나? 제비를 뽑았다.  왜 제비뽑기 방법을 택했는가? 제비뽑기에는 자신의 의지를 반영할 수가 없다. 이 논리는 땅 분배가 하나님의 의지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은 공정성이다. 불평과 불만이 존재하지 않는 방법이다. 세상에서, 사회에서 공정성이라고 하면 가치가 같고 동등해야 성립이 된다. 이것은 공산주의 사고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공정성이라는 개념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분복과 분량, 이것이 공정한 것이다.

 

다섯 달란트인가! 두 달란트인가! 한 달란트인가! 감사만 있을 뿐 불평과 불만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제비를 뽑지 아니하고 땅을 의견을 받아 나누고, 검토해서 나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공로주의가 나설 것이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할 것이다. 우리 지파 공적이 많다고 아우성 일 것이다. 그리고 청탁, 뒷거래, 탐욕, 거짓이 난무할 것이다. 이러한 인간성에 따른 부작용을 방지함에도 목적이 있지만 구약에서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는 데 그 중심이 있다.

 


 

14:1절 “이것은 לארשׂי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לארשׂי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

 


 

가나안 정복에 있어 가장 큰 공로자는 두말 할 것 없이 여호수아 인데 1절에 그 이름이 두 번째로 나온다. 첫 번째로 누가 나오는가? “제사장 엘르아살”이다. 그리고 여호수아이고 족장들로 이어진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이름의 순서는 직위의 순서가 아니다. 중요도의 순서대로 표기한다. 여호수아서에 지금까지 줄곧 여호수아 이름이 앞서 나왔었는데 14장에 들어오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을 살펴보면 13장까지는 전쟁의 시기이다.

 

이때는 당연히 전쟁의 선두에 선 여호수아 이름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제 전쟁이 종료되고 평화의 시기로 접어들고, 땅 분배만 남은 상태이다. 이때는 하나님의 공정을 위한 제사장 엘르아살의 역할이 중요하다. 엘르아살이 중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슴에 담아야 할 것은 이 책을 누가 썼는가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성령의 감동으로 썼다. 그러면서 자신의 중요도가 끝났음을 자신이 인식하고 썼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나 교회 공동체에는 사람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다 라는 관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필요시 쓰임 받는 것뿐이다.

 


 

교회의 직분은 Position이 아니고 Function, 즉 기능적 분류이다.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목사는 이사장이고 장로들은 이사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교회가 이렇게 가면 망한다.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폐 중에 하나가 직분의 계급화이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나면 교만해 지고 거만해 지고 사람이 바뀌는 현상이 병처럼 나타난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직분을 줄 때는 성도의 눈물을 닦고 섬김의 발을 씻어 주라는 섬김의 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것이 무슨 폼 잡고 다니라고 준 계급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의 계시로 여호수아는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시대가 바뀐 만큼 자기가 뒤로 빠진다. 자기 이름을 두 번째로 거론한다. 이런 사소한 순서하나 바뀜을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어떤 입장과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14:6절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유명한 갈렙의 요구가 등장을 한다. 무엇을 요구하는지 보자

 


 

14:7-12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하니..”

 


 

갈렙이 요구하는 땅의 형편을 먼저 살펴보자. 우선 ‘산지’이다. 3000미터가 넘는 고산지이다. 그리고 그곳의 성은 크고 견고하다고 했다. 그리고  거주민이 가나안에서 가장 강한 아낙자손, 소위 거인족이다. 반면 갈렙은 나이 85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렙은 왜 그 땅을 요구하였을까?

 

여기에는 갈렙의 신앙고백이 있다.

 


 

창세기 15:18-21절을 보자.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다시 여호수아서 14:6절 갈렙이 어느 족속인가 보자. ‘그니스’ 족속이라고 했다. 창세기 15장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구두의 계약을 맺는 사건이다. 여기에 내 쫓아야 하는 대상의 족속에 ‘그니스’족속이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 내 쫒으라 멸절하라 함은 그 내용대로 물리적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되고 이것은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라 하는 것이다. 여기 그 족속 중에 ‘그니스’가 있고 갈렙이 ‘그니스’ 족속으로 남아 있다.

 


 

14:12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여기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는 이 표현은 어느 시대의 약속을 말하는가? 아브라함 언약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14:13-14절 “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헤브론”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유일하게 대금을 지불하고 산 땅으로 그의 아내 사라의 매장지이고 역대 족장들이 매장되고, 중요한 이스라엘의 성지가 된다. 갈렙이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했다. 여러 가지 땅이 가지고 있는 악조건에서도, 자기가 늙었음에도 그 땅을 달라고 했다. 도전정신이 강해서, 삶이 긍정적이라서 그랬는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우리의 가슴으로 표현하면 “나는 그리스도 예수가 필요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안 됩니다.”하는 고백이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언약이 그  안에 흘러가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신비한 역설이 있다. 갈렙은 본래 유다지파가 아니다. 그런데 유다지파의 대표의 자리에 서서 그 땅을 요구하고 섰다. 그리고 유다지파는 이스라엘의 장자 지파가 아니다.

 

장자는 ‘르우벤’이다 유다는 레아가 낳은 네 번째 아들이다. 그런데 유다지파를 통해서 누가 오는가? 그리스도가 약속되었다. 하나님이 갈렙의 요구를 통해서 이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얼마나 역설이 담겨져 있는가를 보자. 마태복음서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히브리족속의 족보에 도저히 들 수 없는 여자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말’ ‘라합’ ‘룻’ ‘밧세바’ ‘마리아’ 이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이해가 안된다.

 


 

‘다말’이 누구인가!(창38장) 남편이 죽었는데 시동생을 통해 대 이음을 허락하지 않자 창녀로 분장을 하여 시아버지를 통해 자식을 낳는다. 이런 모순된 사건들, 윤리나 도덕적 해석으로는 도저히 답을 얻을 수 없지 않은가! 구속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시아버지를 통해 세라와 베레스 쌍둥이를 낳게 된다. 그 혈통이 이어져 다윗의 조상이 된다.

 


 

‘라합’은 누구인가!  직업형 창녀이다. 기생 ‘라합’이 뭐라고 했는가? 너희가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건너온 기적같은 사건,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내가 들었다고 했다. ‘라합’만 들었는가? 아니다 여리고성의 사람들과 가나안 족속들이 다 들었다. 그리고 한결같이 마음이 녹았다고 했다. 그런데 선택은 누구만 했나? 기생이던 ‘라합’은 하나님을 선택했다. 창녀인 ‘라합’은 그 사망의 길에서 돌아섰다. 이것이 어떻게 설명이 되는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듣기는 다 들었는데 누구만 믿었는가! 이것이 설명이 되는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섭리이고 역사하심으로 설명할 수밖에 방법이 없다.

 


 

‘룻’은 나오미의 며느리, 이방여인, 모압여자이다. 원래 ‘나오미’라는 뜻은 기쁨, 즐거움이라는 의미이다. 남편과 함께 두 아들을 데리고 기근을 피하여 모압으로 이민을 갔다. 거기서 남편과 두 아들이 다 죽었다. 즉 집안의 남자들이 다 죽었다. 끝장난 집안이다. 더 이상 생산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 이방여인 ‘룻’을 데리고 나오미가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땅 베들레헴에 돌아온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돌아온 때가 추수의 때이다. 여기서 우리의 구원을 설명한다. “네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두겠고, 뿌리지 않은 것을 먹을 것이라”하였다. 그렇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에게 근거함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이 초라한 여인, 슬픈 여인의 모습을 통해 설명해 준다. 나중에 나오미의 가슴에 생명이 안겨진다. ‘룻’이 보아스를 통해서 안겨준 생명, 누구의 조상인가? 다윗의 조상이다.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누가 오시는가! 실로가 오신다.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그리고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 ‘마리아’라는 이름의 근원이 ‘마라’와 같다. 쓴물, 괴로움을 담고 있는 이름이다. 마리아는 잉태로 인해 처녀시절부터 남편의 의심을 안고 가야 했다. 요셉이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했다. 신혼시절 얼마나 남편의 심기가 불편했겠는가? 마리아의 고통도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소명을 감당하느라 가진 고통이다. 그래서 “칼 끝이 네 가슴을, 심장을 찌르듯 하리라”했다. 그 아들 때문이다. 이게 마리아가 타고난 인생이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토록 불쌍한 여인들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헤세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