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여호수아서1

여호수아서 16장 요셉지파의 땅 분배

호리홀리 2014. 12. 19. 12:54

16장 요셉지파의 땅 분배

 


 

여호수아 14장에서부터 땅 분배 이야기가 19장까지 이어진다. 14장에서 17장까지 유다와 요셉의 땅 분배에 맞추어져 있고 18장과 19장은 나머지 지파이야기 이다. 그러면 왜 유다와 요셉의 땅 분배에 관하여 강조하고 있는 걸까? 여기에는 참으로 중요함이 담겨져 있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너무 잘 안다. 그가 17세경에 이상한 꿈을 꾼다. 신기해서 형들과 아버지에게 이야기 한다. 그 꿈 이야기로 인하여 형들 뿐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질책을 당한다. 야곱의 집안 사정은 너무 복잡하다. 실질적으로 네 여인의 몸에서 생산한 열두 아들들로 야곱의 자식들이 구성되어 있다. 최악의 가정이 나온다. 이토록 집안사정이 복잡한 가운데 요셉과 유다가 있다.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소산이다. 반면에 유다는 ‘레아’가 낳았다. 가장 사랑하는 자로부터 요셉이 태어났고, 사랑받지 못한 여인의 소산으로 유다가 태어났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아주 기가 막힌 하나님의 역사의 섭리가 담겨 있다.

 

요셉은 늘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형들의 마음이 늘 이로 인하여 불편했다. 이런 상황인데 꿈까지 미운 내용을 두 번씩이나 꾸고 이를 이야기 하자 아버지도 나무랐다. 그런 꿈 꿔도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그러면서도 야곱은 그 꿈을 마음에 담아 둔다. 그러나 형들은 “저 놈 언제 날 한번 잡아 손 좀 보자”하며 미워한다. 그런 와중에 어느 날 양치는 형들에게 아버지의 심부름을 가게 된다. 멀리서 오는 요셉을 발견한 형들은 보이지 않는 눈짓으로 “저놈 ! 오늘이다”, 결국 요셉의 옷을 벗기고 묶어 죽이려고 웅덩이에 넣었다가 나중에는 애굽의 상인들에게 은 이십을 받고 팔아버린다.

 


 

이로부터 요셉의 고난과 고통의 인생이 시작이 된다. 보디발의 집에서의 종살이와 초년에 쓴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까지 떨어지는 인생이 되고 만다. 이것이 요셉의 격랑의 인생사 이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인생사가 내 뜻대로, 내 의도대로 되는가? HOW의 법칙이다.

 


 

요셉의 인생에 있어서 클라이막스가 어느 시점인가 하고 질문을 던지면 열이면 열 모두 요셉이 총리에 오른 시점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성경을  절반정도 이해한 것이다. 요셉 인생에 있어 최고의 정점은 이 자리가 결코 아니다. 요셉이 총리의 자리를 지내는 동안 그의 해석대로 칠년의 풍년이 지나고 이어서 맹렬한 흉년이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나이가 많은 야곱이 아들들에게 “야! 이렇게 굶고 있을 수 없지 않나? 애굽에 훌륭한 재상이 정치를 잘하여 양식이 넉넉하다 하니 가서 양식을 구해 오너라.

 


 

양식을 구하려 애굽땅에 드나드는 요셉의 형들의 변화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형들이 오랜세월 동안 엄청나게 변해 있다는 것이다.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식을 구해오는 그 우여곡절의 과정에서 서로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한다.

 


 

창세기 42:36절에 “베냐민이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내 아들을 죽이소서.”라고 르우벤이 말한다. 유다는 뭐라고 했는가? 자기가 볼모로 잡혀 남겠다고 나선다. 무엇이 형들을 이렇게 바꾸어 놓은 것일까! 그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아넘기고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야곱을 속였다. 이를 확인한 야곱은 요셉의 죽음을 인정하고 정말 죽음 같은 삶을 살았다.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은 세월을 보냈다.

 

이런 아버지를 지켜보는 형들은, 매일 초죽음이 되어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가 정말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리가 미친 짓을 했구나!” 하는 자책의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그렇게 양식을 구하러 온 형들이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셉이 알아듣는 것도 모른 체 히브리어로 자기들 끼리 말한다. 형들이 너무 딴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뭐가 저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 집안에 배어들은 고통이었다. 고통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유다는 뭐라고 했는가? “내가 볼모로 남겠습니다.” 마치 예수님 같은 말을 한다. 정말 이변이다. 형들이 변화되었다.  이 현상을 요셉의 눈앞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계신다. “보라 요셉아! 너는 혼자 그 세월을 겪느라고 힘들었지만, 너만 달라진게 아니야 형들이 저렇게 달라졌단다.” 하신다. 그 가정에 불어 닥친 혹독한 고난과 고통이 그들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런데 정작 더 무너진 사람은 야곱이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여먹고 어머니의 종용으로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20년을 눈 붙일 겨를도 없이 밤낮을 추위와 더위를 무릎 쓰고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하는 인생을 살았다. 이제 요셉을 잃고, 양식을 구해오는 과정에서 베냐민까지 데려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아이는 내 생명과 결탁 된 자”라고 고백한다. 그야말로 베냐민이 어떤 아들인가! 요셉과 함께 사랑하는 ‘라헬’이 낳은 아들이다. 요셉을 잃고 라헬이 베냐민을 난산으로 길에서 목숨 잃어 가면서 얻은 아들이다.

 

그런데 야곱이 베냐민을 보낸다. 창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시작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적 성격으로 말을 연다. 섭리신앙이다. 그리고 “내가 내 생명과 결탁된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라”고 결단한다.  다 맡기고 내려놓는 믿음이다. 성화된 믿음인 것이다.

 

 

여호수아서에서 유다지파와 요셉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이유가 있다. 창세기 49:22-26절“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야곱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을 노년에 찾고, 그리고 그가 임종 직전에 요셉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한다. 26절을 다시 보자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라고 했다. 이게 누구의 축복인가 야곱 자신이 내리는 축복이라는 것이다.

 


 

야곱 자신의 축복이 선조의 축복보다 났다고 했다. 선조가 누구인가? 윗대가 이삭이고, 그 윗대가 아브라함이 아닌가! 그러면 우리가 가진 복의 개념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복의 개념으로 이해가 안 된다. 이삭이 얼마나 큰 부자인가! 많은 재산과 영육간의 복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많이 받았는가? 지금 축복하는 야곱의 표현을 빌자면 이러한 아브라함과 이삭이 주는 복보다 자신이 주는 복이 크다는 이야기 이다. 지금 야곱은 정말 빈손이다. 그리고 이방나라의 식객에 불과하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야곱이 말하는 축복이 물질적 축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여호수아가 이 두 인물에 집중해서 추적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일관된 고집스러움과 붙잡으심과 간섭하심, 그것이 유다지파의 내용 속에서 오실 그리스도의 구속과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설명하는 동시에 어떻게 궁극적으로 요셉을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셨는가를 보여준다.

 


 

창세기 45:1-5절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여기가 요셉의 인생에 있어서 절정의 순간이다.

 

드디어 하나님의 커다란 인생의 계획이 한눈에 펼쳐지면서 깨달아지면서,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어진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늘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 때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눈뜨지 못 한 때는 역사의 뿌리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충돌이다.“나, 정말 억울해!”, “저 나쁜 놈” 이게 삶이었고, 이게 인류역사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눈이 열리면 그 순간 피해자도 없어지고, 가해자도 없어진다. 이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야 하게 된다.

 

창세기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처음으로 요셉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어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게 정말 하나님이 하신일이구나!”, “하나님의 섭리구나!” 하는 고백이다.

 

“나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형들이 나를 팔아먹은 줄로 알았어!”, “그 세월 내가 칼을 갈았지!” 하며 살았을 것이다. 얼마든지 마음에 가지고 있을 인간적인 시나리오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생에 주어가 되는 순간, “아 하나님이 하셨구나!”하는 순간 피해자도 가해자도 비기는 순간이다. 그리스도의 긍휼과 용서 앞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눈을 뜨면 생명이 보인다. 그래서 그의 고백이 이렇다.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이 말에 주목하자.

 


 

우리를 왜 부르셨는가? 우리를 왜 삶의 현장, 일터로, 교회로 보내시고 모으셨는가? 왜 이 원수 같은 인간을 내가 만나야 하는가! 왜 내게 보내셨는가! 여기에 우리의 시각을 빨리 내려놓고 하나님의 섭리사관에 눈 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피해자와 가해자의 선상에 서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고백이 나온다.

 


 

16:1~4 요셉자손의 유업

 


 

이 지역은 가나안의 중앙지역으로 여리고에서 남쪽으로 아다롯, 서쪽으로는 게셀에 이르나 유다같이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예언대로 큰 복을 받았고 에브라임이 더 좋은 땅을 분배 받았다.므낫세는 요단 서쪽과 동쪽을 모두 분배받았다.

 


 


 

16:5~10 에브라임의 분깃

 


 

유다의 북쪽부터 북으로 믹므다,서편으로는 가나시내까지 가나안의 중심이며 가장 비옥한 땅이다. 그러나10절,그들은 불순종하여 가나안 사람들을 쫒아내지 않고 종으로 삼았다. 불순종과 편리주의 때문이었다.죽이는 것 보다 종으로 삼아 노동력을 얻는 것이 더 좋겠다는 내생각 ,내 중심의 신앙이었다. 결국 그들은 오히려 가나안종교와 우상에 빠져 바알을 섬기며 바알의 종노릇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우상과 인본주의에 빠진 에브라임은 결국 모든 지파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나라를 분열시키는데 앞장선다. 여호수아를 배출한 이득권을 주장하며 사사기에서 몽니를 부리고 공동체전체를 위기에 빠트린다.

 


 

또한 여로보암을 이용하여 북 왕국 이스라엘을 분리하여 하나님을 대신할 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기게하는 치욕을 범하게 된다. 그들의 불순종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자손 대대로 이어지며 사탄의 도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