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여호수아서1

여호수아서 17장 므낫세의 분깃

호리홀리 2014. 12. 19. 12:59

17:1~13 므낫세의 분깃

 


 

므낫세가 장자였으나 예언대로 에브라임이 먼저 분깃을 얻게되고 므낫세는 이후에 분깃을 얻는다.

 

1절 “그는 무사이어서...” 므낫세의 반 지파가 요단동편에서 기업을 얻게된 설명이다. 르우벤이나 갓지파는 모세에게 청원해서 얻었으나 므낫세 반지파의 경우는 길르앗의 아모리인들을 격파한 공으로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므낫세의 아들들 후손이 얻었다. 이제 정복된 동편 땅들을 므낫세 딸들의 후손인 슬로브핫의 딸들이 요구하였다. 약속대로 그들은 동편의 넓은 땅을 얻어냈다. 우리에게는 늘 적극성이 필요하다.기도에 있어서의 청원은 적극적이어야한다. 하나님 주시면 좋고 안주시면 할 수 없이 주의 뜻입니다. 주의 뜻대로 하소서가 아닌 역동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역동성이 지파들 중 유일하게 므낫세만 요단 양쪽을 얻게된다. 

 


 

그러나 얻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키는 것이다.

 

12절“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쫒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13절“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쫒아내지 아니하였더라”그들의 불순종과 이익을 위해서 게을렀던 그들은 에브라임과 같이 바알우상에 빠지게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한다.

 


 


 

17:14-18 개척하라

 


 

17:14절.“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땅 분배에 제비뽑기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는 공정하게 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역시 불만과 불평이 발생했다. 요셉의 가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불평했다. “우리는 더 큰 족속인데... 한 제비로 인한 한 분깃은 부당하다”라고 불평한다. 여호수아가 그 요구 앞에 “스스로 개척하라”고 하고 있다.

 


 

17:15절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17:16절“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17절,18절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참으로 성경의 구조가 놀라운데...얼핏 보면 요셉족속의 무리한 요구에 여호수아가  “올라가 개척 해!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은 이런 요소들의 불완전하고 치욕스러운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를 이루어 가신다. 인간은 자기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경륜 속에 있다는 것을 꼭 나중에 깨닫는다. 이 말씀이 어떤 예언의 성취인지 살펴보자.

 


 

창세기 49:22절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야곱이 그 열 두 아들을 불러놓고 유언 같은 축복기도를 하는 장면이다. 요셉의 이야기를 하며 무성한 가지라고 한다.

 

어느 정도인가? 샘 곁에 있는 담장을 넘는 무성한 가지라고 했다.

 

그 가지가 담을 넘었다고 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지역으로는 족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뻗어나가게 했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는가? “개척하라”.. “뻗어 나가라... 올라가서 개척하라” 너희 족속은 큰 족속이니 한 분깃으로 적으니 올라가서 개척하라고 한다.

 


 

이 표현이 땅을 뺏으라는 표현인가? 아니면 오늘날처럼 개척교회를 하라는 의미인가?  22절이 갖는 의미가 성경전체에서 가져다주는 의미를 짚어 보자. 22절에 보면 번성의 범위가 어딘가? 얼마나 번성한지 담을 넘어야 한다. 그 집 울타리 범주는 부족하다,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창세기 49:23절을 보자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 과정이 쉽다는 이야기인가? 어렵다는 이야기인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요셉이 늘 활 쏘고 학대하며 쏘았으나 하는 표현처럼 고난과 고통이 따라 다닌다.

 


 

창세기 49:24절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놀랍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누구의 손의 힘을 입는다고 하는가?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는다고 한다. 구약성경에서 계속 이스라엘의 목자는 누구를 지칭하는가?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요셉의 이야기이다. 창세기 49:25절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얼마나 놀라운 복을 약속하셨는가! 윗 샘의 복과 아랫 샘의 복을 주신다고 하신다. 윗 샘의 복은 복의 원천을 말한다. 요셉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뭔가? 꿈인가? 채색 옷인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미움의 대상이었다. 요셉은 끌려가고 고난당하고, 억울함과 옥살이까지 이 미움의 결과로 갔다. 그러나 우리가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 아버지 야곱의 입장에서 보자. 적어도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은 죽은 아들이다. 그런데 요셉은 이 죽은 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이 미움의 수렁에서 살아난다. 회복이 된다. 이 아들의 회복이 만 백성을 살린다. 민족과 형제를 살린다. 특히 자기를 미움으로 몰아가고 죽음으로 몰았던 그 형제들을 용서하고 살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요셉의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원하심의 예표로 보여 진다. 사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려졌다. 성경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된다고 했다. 모퉁이 돌이 누구인가? 예수님이 아닌가!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려진 자이다. 그러나 아버지께 가장 사랑 받았던 아들이다. 버려진 그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하고 살린다. 신앙생활은 살아간다는 것보다 버티는 형편이 훨씬 많다. 오늘도 무너지지 않고 버터내야 하는 상황이 훨씬 많다. 버티고 견디어 내다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그림을, 섭리의 그림을 나중에 알게 된다. 형통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쓰임 받는 것을 의미한다.

 


 

  17:14절을 다시 보자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요셉의 두 아들 이름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다. 므낫세가 장남이고 에브라임이 차남이다. 그런데 이들의 역할 역시 바뀐다. 하나님은 항상 세상의 주류를 통하여 역사하지 않으심을 보여 준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예루살렘 왕궁에서 태어남을 세상 사람들이 기대했다. 그러나 잘 보자.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준비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동방박사들은 메시아를 만나러 어디로 갔는가? 예루살렘 왕궁으로 갔다. 세상 사람들의 인식과 생각은 항상 이러하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절대로 세상의 기준과 같지 않다. 야곱 역시 장자가 아니다. 에서가 장자이다. 차자를 들어서 장자를 만든다. 바꾸신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할아버지는 야곱이다. 야곱의 임종 직전에 요셉이 그 아들들을 데리고 축복 받으러 간다. 그런데 야곱이 팔을 어긋나게 하여 오른손을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왼손을 장남인 므낫세에게 올렸다. 요셉이 “아버지 이쪽이 장남입니다. 팔이 바뀌었어요!”하자 야곱이 알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이러한 방법으로 장남과 차자의 위치가 바뀐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이후 에브라임의 지파가 이스라엘의 대표지파가 된다.

 


 

신명기 33:13-17절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

 


 

여기에 놀라운 복이 기록되어 있다. 이 복이 누구에게 돌아간다고 했는가?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했다. 요셉의 정수리에 돌아간다고 했다. 야곱의 아들은 모두 열둘이다. 그런데 그중에 요셉의 지파는 없다.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가 생겼다. 실상은 이들이 손자들이라 아들의 반열인 지파의 대표가 될 자격은 없다. 열두지파에서 제외된 지파가 요셉지파이고 레위지파이다. 이 결손 된 두 지파를 요셉의 아들, 즉 야곱의 손자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채웠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요셉의 두 아들이 야곱의 아들 위치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면 요셉은 누구와 동격이 되는 것인가! 야곱과의 동격의 자리에 서게 된다.

 

모든 복이 요셉의 정수리로 돌아간다는 말이 이 말인 것이다. 요셉의 아들들이 받은 복, 모든 형제들의 갑절로 받았다. 샘 곁에 심기어진 나무가 담장을 넘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하여 활을 쏘며 미워하고, 제지하고, 걸고, 고난을 주고 힘써 방해하였지만 그런데 결국은 요셉이 회복하여 그들을 용서하고 살린다. 이 전체가 뭔가? 요셉이 어떤 은총을 누리게 되는가를 성경이 전체의 그림으로 보여 준다.

 


 

“개척하라”하는 뜻은 이런 뜻이다. 가나안 땅의 백성들을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기를 “전부 점령하고, 다 내 쫓으라”고 했다. 이것을 살인과 살육을 명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은총의 영역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개척의 명령은 똑같이 하달되는 명령이다.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받은 달란트 통하여 개척해 나가야 함을 말한다. 이게 뭔가? 교회당 짓고 개척하라는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죄 많은 땅에서 확장해 나가라 하는 말이다. 사탄의 문화를 몰아내고, 사탄의 원칙을 몰아내고, 하늘의 문화, 하나님의 문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이 말을 “올라가서 개척하라”한 것이다. 물론 개척을 방해하고 그것을 웅크리고 도전하는 철병거들이 많다. 저절로 되는 것 결코 아니다.

 


 

시편 30:5-6절을 보자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기 시인이 지난날 자기 삶을 회고하면서 고백하고 있다.

 


 

옛날, 형통할 때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거야 한다.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는 빌딩이 있으니.... 수입이 크니까... 애들 정말 다들 잘 되었으니...내 위치 올라갈 만큼 올라 간 것 같고... 여기에 누가 무너뜨림을 가하겠는가?” 흔들려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여기서 표현된 “형통”은 히브리어로 “셀라흐”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인간적인, 세상적인 형통, 즉 성공과 번영을 의미한다.

 

그러나 창세기 39장에서 요셉에게 사용한 “형통”은 “찰라흐”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형통, 즉 하나님의 복으로 평탄과 번성, 성취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늘 “셀라흐”에 관심을 두고 초점을 맞추고, 이를 추구하고 살아간다. 이는 망하는 징조이다. 결국  “셀라흐”와 “찰라흐”의 경계선에서 우리는 늘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요셉족속이 지금 요구하는 “셀라흐”의 요구를, “셀라흐”의 형통과 번영의 요구를 결국 무엇으로 바꾸어 명령하는가! “찰라흐”로 바꾸는 명령을 하신다. “올라가 개척하라”이 말은 이 가나안 땅에 아직도 남은 우상의 문화, 저주의 문화를 잘라내고, 끌어내고 하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사실 그리스도인들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 있어서 문화적 명령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내려야 하는 결론이 있다. 아하! 성경에서 진짜 형통을 고백하고 생각할 때는 무엇을 우리에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하심이 진짜 형통인 것을 요셉이 감옥에서 경험하게 된다.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고 형통하다고 하신다. 우리는 요셉에게 요구하고 요셉에게 약속되었던 그 원천의 복, 윗 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잘 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어디에 들어왔는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는 존재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누가 책임을 지겠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책임지고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의 형통 “찰라흐”의 복을 받은 우리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말로만, 설교에만, 기도에만 이 고백을 사용하고 그친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계속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입을 것, 먹을 것, 쓸 것 걱정하며 더 많이 누리고 가지려는 “셀라흐”의 형통에 목숨을 걸고 허덕이고 있다.

 

우리가 원천의 복은 받은 우리가 아닌가! 우리가 지금 누구 안에 있는가! 그리스도가 신랑 됨을 넘어 아예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면서 우리의 속을 바꾸어 가신다. 이것이 임마누엘이시다.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의 형통이 무엇인지.... 진짜 영광이 무엇인지 알지도 보지도 못하고 세상에 세끼 밥 먹는 것에 묶여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늘 하찮은 것 때문에 목숨을 걸고 늘 넘어진다.

 

진짜 영광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세상을 이기는 힘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