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여호수아서1

여호수아서 11장: 가장 큰 승리

호리홀리 2014. 12. 18. 15:29

11장: 가장 큰 승리

 


 

11장은 가장 큰 적과 싸워야 했다. 남부전쟁에서 승리한 לארשׂי을 대적하기위해 북부의 연합군들은 하솔왕 야빈을 중심으로 굳게 뭉쳤다. 하솔은 여리고의 30배이며 제국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철기 문명을 이루었으며 강력한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전쟁의 메뉴얼을 가지고 있다. 무엇인가. 6절, 두려워말라, 붙였다.(완료시제)

 


 

11장에는 진멸(헤렘)이라는 말이 반복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헤렘이었다. 그러나 לארשׂי은 또다시 자만에 빠져 가드,가사,아스돗을 남겨둔다. 그들은 불레셋의 5대 수도에 속한 성들이었다.(애글론,아스글론) 이일로 후에 겪게될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1:3절과 1:6에 거친 표현이 나온다. “쳐 죽여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3) 하였고,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6)라고 말씀하신다. 3절에는 “주었노니”라고 하여 이미 완료된 완료형 표현을 쓰는가 하면 6절에서는 “차지하게 하리라”하여 미래형 말씀이다. already~not  yet

 

(롬5:1,2과 9,10 비교)

 


 

3절은 실질적은 것이 아니라 언약이다. 왜 미래의 약속을 완료형으로 표현하였는가?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한 말씀이다. 그런데 왜 3절과 6절의 표현이 대비되는가?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이 과정을 여호수아서 전체에서 전쟁의 형태로 나타낸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의인이 되었다. 칭의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우리를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행위가 기준이 된 표현인가? 아니면 신분적 의미인가?  우리는 신분적으로 의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는 예수님의 공로로 내 조건과 행위와는 관계없이 의인이 되었다.

 

  리브가 태중에 쌍태가 들어 두 민족이 태중에서 싸운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에 나와 어떤 기준이 되는 행위가 존재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고 하신다. 사랑의 기준이 그들의 선악적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선, 악을 행할 만큼 태어나기 이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음을 말한다.

 

에서를 미워했다는 것은 에서를 버렸다는 개념이 아님을 기억해야 하고 이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에서 쪽에서 “왜 우리는 택하지 않는가?”라고 항변할 자격이 전혀 없는 것이다. 항의 할 근거가 전혀 없다. 모든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모든 인간에 있어 정상적인 자격이고 댓가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우리는 “웬 은혜로 웬 사랑으로 하나님이 부르시고 택하신 신비한 은총을 입는 존재가 되었는가!

 


 

이것을 의인이라고 한다. 이 의인은 수준적, 행위적 차원이 아니라 신분적 차원의 의인이다. 이 부분에 있어 어떤 어두움의 권세가 칼을 들이대어도 그 공격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게 흔들리면 십자가 사건이 흔들리는 결과가 된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였다. 지불이 완료된 것을 다시 지불할 수 없다. 단번에 완성된 구원사건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분은 천하가 등 떠밀어도 바뀌지 않는 의인의 신분이다.

 


 

히브리서에 보면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징계’는 체벌을 말함이 아니다. 자녀를 만들어 가는 개념으로 양육과 훈육의 개념이다. 내가 양자로 입양하여 기업을 물려줄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서에 전쟁이야기가 왜 나오는가? 그리고 살벌하게 철저히 쳐 죽이라는 표현이 왜 필요한가?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치셨지만,........ “주었노니”하여 약속은 하였지만 우리 내면에 옛 습관, 육의 정욕이 세포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기에 이것을 조금씩 진멸해야 하는 것을 영적으로 치루고 차지하여야 할 영적 전쟁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서두에 3절에 “주었노니”라는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완료된 약속 다음에 “차지하리라”라는 해야 함을 담아내고 있다. “주었노니”라는 말씀은 열어 놓았음을 말씀하신다. 철저히 자기를 다스려 “차지하는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가만히 두면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잡초가 되어 버린다. 이것은 우리의 죄성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힘써야 한다.

 

약속으로 열어 놓은 문 “주었노라”하신 약속을 이제 우리의 발바닥으로 밟아 “차지하는” 내면의 싸움을 처절하게 하며 기초를 다져가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하리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일치하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한다.

 


 


 

11:6~9 마지막전쟁

 


 

11:6, “הוהי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이 명령에 여호수아는 그대로 순종한다.(9절) 그들의 승리가 말과 병거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승리는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겨야하는 것이다. 다윗이 이렇게 했을 때 100전 100승이었다.

 

11절에는 그들을 진멸했고 하솔을 불살랐다. 하솔을 사용하면 좋겠으나 그것은 인본주의 사상이었다. 하나님은 본보기로 여리고와 같이 진멸시켰다. 여리고는 다시 건축하는 자에게 경고하였다. 하솔전투는 마지막 전쟁이면서 가장 큰 완벽한 승리였다. 순종의 승리였던 것이다.

 


 

11:21-23 전쟁이 그치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לארשׂי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들의 성읍들을 진멸하여 바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לארשׂי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수11:21~23)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하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기뻐하고 박수 칠 상황이 아니다. 여기 표현의 실질적 의미는 1차 정복전쟁이 끝난 시점을 말한다.

 

“바친다”라는 개념은 완전히 죽어서 드린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는 제물이 된다는 의미이다. 제물의 기본개념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속이 다 죽어야 한다. 이것이 제물의 기본자세이다. 오늘날은 제물들이 너무 시끄럽지 않은가? 제물들이 제 각각 살아서 시끄럽다. 덜 죽어서 그렇다. 완전히 죽어야 제물이다.

 

소리가 나는 것은 가짜이고 제물이 아니다. 제물인척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에서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라고 권면한다. 여기 “힘쓰라”고 권면한 것은 “애써라”, “노력해라” 그런 의미가 아니다.

 


 

원문의 의미를 보면 이것은 제의적 용어, 즉 제사적 용어로, 직역하면 “처분에 맡기라”라는 의미이다. 제물됨의 기본자세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것이다. 죽어서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들에게만,특정 직분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영역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개념이다.

 

11:22절을 보면 역설적인 표현이 대비된다. “남지 아니하였고”, 와 “남았더라”이다. 이런 기법에서 보면 강조점이 어디 있는 걸까? 말할 것도 없이 “남았더라”에 있다. 여기 “남았더라”와 연결되는 지역을 보면 ‘가사,가드,아스돗’이다

 


 

이 세 곳은 가나안 정복의 1%에 불과하다. 99%가 정복되었다. 그러므로 힘의 논리로 보면 대세에 전혀 영향이 없는 다 이긴 전쟁이다. 영향력이 전혀 없어 보이는 남김이다. 그런데 다 전쟁이 완료되었는데 여기는 왜 남았는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가나안 땅을 다 멸절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왜 남겼는가?

 


 

세 곳은 힘의 논리로 볼 때 이미 정복한 것으로 여겼다. 이것이야 말로 힘의 논리이다. 99%점령이고 남은 3지역, 1%에 불과한 지역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는 힘의 논리이다. 하나님이 인생을 다루는 방법, 그 수단에 있어 제일 싫어하는 논리가 힘의 논리이다. 힘의 논리의 반대는 은혜의 논리이다. לארשׂי 백성이 가나안 정복에서 뼈저린 패배의 경험이 있다. 여리고성의 십분의 일에 불과한 아이성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것은 통해 주님께 순종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힘의 논리가 아님을 깨닫게 하셨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에 있어 이것을 다 잊어버리고 또 실수를 범하고 있다.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인간은 잠간이라도 놓아두고 여유를 주면 마치 시멘트 바닥을 비집고 올라오는 잡초처럼 늘 자신의 능력, 즉 힘의 논리로 접근하고 나아가는 어리석음이 반복된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논리이다.

 


 

이제 남겨진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서 어떤 결과가 이어지는지를 알아보자

 

사사기 16:1~2절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여기 남겨진 지역 “가사”가 등장한다. 이 가사 땅에서 삼손과 이스라엘공동체 전체를 패망으로 몰아간“들릴라”가 태어난다. 그 옛날 남겨두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가사는 오늘날의 가자지역이다.

 


 

그다음 사무엘상 17:4절과 26절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라고 기록한다. 남겨진 땅 ‘가드’에서 골리앗이 일어났다.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여기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하였다. 힘의 논리로 계산하고 선 이스라엘 군대, 자신들의 힘의 논리로 다스리라고 생각했던 불레셋 군대였다.

 


 

그 군대 앞에 이제는 힘의 논리에 밀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실정이다. 이 전쟁을 힘의 전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물맺돌 하나 든 어린 소년 다윗이 이 전쟁을 하나님의 전쟁, 은혜의 전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얼마나 중요한 논리인가! 우리 또한 어떤 인생의 극심한 문제에 직면하면 힘의 논리로 밀리고 눌리고, 두려워하고 속는다.

 

그러나 다윗은 그 싸움의 본질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이 “할례 받지 못한 백성”이라고 했다. 할례가 무엇인가? 할례는 내 힘으로 사는게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죽었다는 메시지이다. 그러니까 이 싸움은 힘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상대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누구의 싸움으로 이해하였는가? 하나님의 싸움으로 보았다. 정확한 믿음의 시각이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어려움과 난관을 힘의 논리로 이해하려 해서는 절대 승리할 수 없다. 찬송가 가사에도 “내 힘만 의지 하면은 패할 수밖에 없도다”하였다. 그렇다 내 힘 의지하면 패할 수밖에 없다. 힘의 논리로 사는 것, 우리의 죄성이고 본질이다 이것을 끝임 없이 뽑아내고 제거해야 한다. 그게 가나안을 점령해 들어가는 싸움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를 할례 받은 백성의 군대, 즉 하나님의 군대로 보았다.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군대, 사울왕의 군대로 보지 않았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하였다. 우리는 누구의 소유인가?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의 군대가 아닌가! 그런데 세상 앞에 왜 그리 비실비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힘의 논리에 눌려서 그렇다. 비록 이 세상에서, 이 땅에서 세력을 갖지는 못했어도 우리는 더 영원한 가치와 세력을,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사무엘상 5:1절을 보자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쟁을 하다가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

 

이들은 언약궤를 마치 요술상자나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했다. 언약궤의 본질인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 상징물을 주술적 차원으로 다루었다.

 

빼앗긴 언약궤는 ‘아스돗’으로 갔다. 치욕의 역사이다.

 

지금까지 거론한 3곳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힘의 논리로 계산하여 우습게보아 남겨둔 지역이다. 그토록 계산하고 믿었던 힘의 논리의 결과이다. 우리 삶속에 남겨둔 1%가, 그 힘의 논리가 매 순간 앞서간다.

 


 

또한 3곳은 블레셋의 수도이기도 하다. 이후 별거 아니라고 여겼던 곳이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하게 되고 결국 사울 때에 이스라엘은 무너지고 직전에 언약궤는 뺐기는 처참한 모습을 보인다. 쓴뿌리는 뽑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쓴뿌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