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여호수아서1

여호수아서 8장 언약적축복

호리홀리 2014. 12. 18. 15:16

8장: 승리/아이성 정복

 


 

8:1,“הוהי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

 


 

1.하나님이 붙혀 주셨다.

 

첫째로, 아이성 전투의 승리는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세상 만사를 작정하시고 주장하신다.

 


 

본문 1절에 말하기를, “הוהי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라

 

여호수아 8:7에 보면, 여호수아는 매복할 군사들에게 복병 작전을 설명하면서 “너희 하나님 הוהי께서 너희 손에 붙이시리라”고 말했다. 여호수아 8:18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여호수아에게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

 


 

하나님의 허락하심은, 하나님 편에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이었지만, 이스라엘 편에서는 악을 제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다. 죄악은 사람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가로막는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הוהי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했고(사 59:1-2),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증거했다(렘 5:25). 죄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막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간의 죄를 징벌했을 때 승리의 허락을 받게 된 것이다. 죄가 제거되었을 때 승리가 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허락하셨다.

 


 

역사서의 마스터 키는 역대하7:14절이다. 공동체가 범죄했을 때 고통 중에 있을 때 기억해야 할 말씀이다.“내 이름으로 일컽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2.적극적 순종

 

둘째로, 아이성 정복은 복병술을 사용함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아이성을 לארשׂי의 손에 주셨고 승리를 허락하셨지만,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이 할 몫이 있었다. 이것이 적극적 순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성도는 소극적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고 지시하셨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그대로 실행했다.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복병 전술을 설명했고 군사들 중 처음에는 3만 명을, 그리고 후에 추가로 5천 명을, 아이성의 서쪽 곧 뒷편에 매복시켰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아이성을 공격했다. 아이성 왕과 군사들은 급히 대처했다. 그 때 לארשׂי 군대는 거짓 패하여 아이성 군사들을 유인해내는 데 성공했다. 아이성 왕과 모든 군사들은, 패하여 도망가는 듯한 לארשׂי 군대를 추격하는데 여념이 없어서 성문을 열어 놓은 채 그들을 따라갔다.

 


 

여호수아는 자신이 들고 있던 창을 높이 들었다. 우리 말 성경에 ‘단창(短槍)’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키돈 ןוֹדי)는 ‘짧은 창’이 아니고, ‘던질 수 있는 가느다란 긴 창(dart, javelin)’을 가리킨다. 여호수아가 창을 높이 든 것은 하나의 신호였다. לארשׂי의 복병들은 여호수아의 신호에 따라 숨었던 곳에서 나와 성을 점령했고 그 성에 불을 놓았다. 아이성 왕과 군사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경솔함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이제 양쪽으로 공격을 받는 ‘독 안에 든 쥐’처럼 되었고 그 날 그 전투에서 12,000명이 다 죽었다.

 


 

여리고 성 정복 때는 가축들을 다 죽이고 노략물중에 금은동철(金銀銅鐵)은 하나님께 바치고 그 나머지는 다 불살랐으나, 아이성 전투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성의 가축과 노략물을 취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2절,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 사실상 사람들이 죄악된 것이지 동물이나 물건들이 죄악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적 혜택들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죄인들에게서 빼앗아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허락대로 그들은 그 성읍의 가축들과 노략한 것을 취하였다(27절).

 


 

그 후 לארשׂי 백성은 아이성을 불사르고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다. 또 그들은 아이성의 왕을 저녁 때까지 나무에 매달았다가 해질 때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성문 어귀에 던지고 돌로 큰 무더기를 만들었다. 그 전쟁은 처참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우상숭배와 음란으로 심히 더러워졌던 가나안 땅의 한 성 아이는 이렇게 멸망을 당했다.

 


 

3.제1차 세겜언약체결식

 

셋째로, 30절 이하에 보면, 아이성을 정복한 후 여호수아는 הוהי 하나님을 위하여 에발산에 한 단을 쌓았다. 그것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לארשׂי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었다. ‘새 돌’(아바님 쉘레모스)이라는 원어는 ‘온전한 돌들’ 즉 ‘깍지 않은 돌들’이라는 뜻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즉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그렇게 하였다.

 


 

לארשׂי백성은 그 단 위에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언약체결식의 제의적절차)를 드렸고 여호수아는 그 돌들 위에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기록하였다. 그런 후 온לארשׂי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הוהי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섰다. 그것은 הוהי의 종 모세가 명령한 대로였다.

 


 

신명기 27장에 보면, 모세는 לארשׂי 백성에게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라”고 명령하였었다(신 27:12-13).경고

 

에발산은 분명 축복의 산이 아닌 저주의 산인데 두 가지를 요구한다.

 

쇠로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으라는 것과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요구한다. 화목제물은 반드시 어린양을 죽여 드리는 희생제사이다. 왜 다듬지 않은 돌인가?

 


 

요구된 두 가지는 하나의 이미지 이다. 에발산, 저주의 산에 세워야할 대상이 우리라는 것이다.이 산에서 화목제물인 어린양의 대속의 죽음이 담겨와 화목제사가 드려진다. 어느 제단인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은 제단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제사는 우리에게 임하는 구원의 역사에 인간적인 노력이나 수고나 조건이나 여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저주의 산 에발산에 설 수 밖에 없다. 에발산에서 죽어 마땅한 우리를 위해 번제물, 화목제물이 드려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제물로 드려진다. “우리의 아무런 노력이 없이....” 이것이 다듬지 않은 돌의 제단이다. 그야말로 에발산의 저주가 아니라 “에발산의 축복”, “에발산의 복음”이다.

 


 

여호수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와 보혈의 공로가 뚝뚝 떨어지는 현장이다.그 분 안에서만 순종해야 우리의 행복의 의미가 드러나는, 그것을 연습하는 공간이 여호수아서이다. 본문을 다시 정리하면 ‘에발산’은 저주의 땅이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제단을 세우고 생명을 주신다. 신명기에서는 에발산이 저주의 땅이었다. 그러나 세겜언약에서 하나님은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다. 언약적저주가 언약적축복으로 바꿔지는 복음인 것이다. 첫째는 경고,둘째는 복음이다.

 


 

8:32~33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이전에 모세는 에발산에서 저주하라고 했지만 여호수아서에서는 진정 저주가 목적이 아님을 밝힌다.

 


 

  8:34~35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결국 성경의 곳곳에 하나님께서 거칠게 저주를 말씀하시지만 결코 저주가 목적이 아니다. 늘 하나님은 우리를 궁극적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 저주의 방법과 언어를 동원하시면서 까지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이 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중요하게 받아 들여야 할 부분이 있다. 35절에 이 모든 것을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이며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일러주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성경에서 보면 이 가르침이 끊어진다. 그래서 초래한 시대가 사사시대이다. 이 역할을 여호수아 이후 놓친 것이다.

 


 

사사기 2:20을 보자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다음세대가 아닌 다른 세대가 일어났다고 한다. 다른 세대를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는 세대가 다른 세대이다.신앙의 유산, 믿음의 유산, 신앙의 교육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승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곳이 가나안 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