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여호수아서1

여호수아서 7장 언약파기

호리홀리 2014. 12. 18. 15:10

7장:실패

 


 

여리고성은 가나안의 관문이자 가장 강력한 요새였다. 가나안 7족속은 이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전투의 승패는 가나안 전체 전쟁을 좌우하는 것이다. 여리고의 함락으로 저들은 물같이 녹았다. 여호수아의 전략은 여리고 정복으로 가나안의 허리를 잘라, 북부와 남부동맹을 차단하고 연합전선을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두 번째 전투인 아이성의 싸움에서 실패한 것이다. “아이” 우리말의 뉘앙스같이 작은 성이었다.  다 올라가지 마소서  실패의 원인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이 싸움의 실패는 자만심,교만,아간의 탐욕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을 깨트린 사건이다. 모든 노획물은 여호와의 것이다. 레25:18말씀대로 땅도,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임에도 아간은 언약을 깨트린 것이다. 라합으로 인해 가족 전부가 구원을 얻었다면 아간으로 인해 가족 전부가“ 헤렘”(진멸)된다.(25)  여호수아는 기도한다. 왜 실패했는가?

 


 

7:11 언약을 어겼다. (15절)  그렇다 언약이다. 벌써 승리에 도취되어 언약을 어겼다. 여호수아는 지금이야 말로 언약을 세울 때라고 여겨 북쪽으로 올라간다. 48km 위에 위치한 세겜으로 백성들을 끌고 올라가 세겜언약을 체결한다. 그들에겐 이것이 일종의 하프타임이다.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가 누구인가? 정체성이 필요했다. 우리는 언약백성이란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7:1~7 아이성의 실패

 


 

6:25절을 보면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하여 오늘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7:26절을 보면 “.... 오늘까지 있더라...”라는 동일한 표현이 나온다. 두 사건 모두 연속성을 암시하고 있지만, 상황은 전혀 상반된 모습이다. 라합은 신실한 믿음의 여인으로 오늘까지 기록과 기억이 되지만 아간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표상으로 범죄의 표상으로 오늘까지 기억과 기록이 남았다.

 


 

성경은 이토록 극명한 메시지를 대비시킴이 있다. 요한복음 3장에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리고 이어 4장에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의 사건이 대비되어 나온다. 두 사건을 비교해 보자

 

니고데모는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 왔다.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어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다. 유대인의 지도자라는 자가 내가 다시 모태에 들어가서 태어나야 한단 말입니까? 하는 아둔한 질문으로 중생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게 물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에게 한심한 듯이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의 사건은 정 반대이다. 예수님이 찾아가셨다.

 

사마리아 땅은 원래 유대 남자가 밟지도 않는 땅이다.

 

원문에 보면“내가 사마리아로 가야만 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목적을 가지고 찾아가신 것이다. 거기서 남편을 다섯이나 갈은 슬픈 운명을 지고 살아가는 여인을 만난다. 요한복음 3장과 4장의 배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구원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찾아 왔다. 그러나 슬픈 운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여인은 찾아 나설 여건도, 찾아올 형편도 안 되는 이 여인을 예수님께서 그 멀고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 나선 것이다. 이를 통하여 정확히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속성을 들어내고 싶어 한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서 6:25절과 7:26절에 “오늘까지 있더라”라고 표현된 주인공이지만 하나는 ‘라합’, 하나는 ‘아간’, 둘 다 역사 속에 기록된 인물로 등장 하지만 그야말로 서로 상반된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다.

 


 

1절 “לארשׂי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לארשׂי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구구하게 족보로 연결하여 아간을 소개한다. 명문,정통 가문이다.

 

유다지파라고 했는데 이는 ‘찬양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좋은 의미의 복을 받은 이름이다. ‘세라’는 ‘씨’라는 뜻이고, 여명이라는 뜻이다. 뭔가 시작의 신선함을 담고 있다. 그리고 ‘삽디’는 ‘선물’이라는 뜻이고, ‘갈마’는 포도열매라는 의미이다.

 

모두가 축복이고 신선하고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런데 ‘아간’의 뜻은 무엇인가? ‘아간’은 사고뭉치라는 뜻이다. 돌연변이가 등장한 것이다. 15절을 보자.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לארשׂי 가운데에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여기서 보면 아간을 향하여 물건을 훔친 윤리적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어겼다”라고 표현한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간의 범죄가 윤리적, 도덕적 사건인 것 같은데 윤리적 개념이나 도덕적 행위의 개념으로 재판하지 않는다. 여기에 담긴 내용을 영적인 문제로 보아야 한다.

 

본문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말이 “바쳐진”이라는 표현이다.

 


 

7:11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여기서도 언약을 깼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단순한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약의 관계, 약속을 깬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어떤 언약의 관계의 약속을 깬 것이라는 것이다. 바쳐진다는 것은 죽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연결되는 단어가 헌신이다. 헌신은 행위로 뭔가를 하고 갚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바쳐졌다는 것은 수동적인 표현이다. 내가 나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쳐졌다는 말이다.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구별된 것을 말한다. 여기서 진정한 의미의 헌신은 내가 무엇을 하나님 앞에 해드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 하는 싸움이다. 진정한 헌신은 doing이 아니고, being이다.

 

어떤 일을 하느냐(doing)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느냐(being)이다.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이 금하는 3가지가 있다.

 

나실인은 구별된 자, 바쳐진 자이다. 머리에 삭두를 대면 안 되었고, 포도주와 독주를 마셔서는 안 되었으며, 죽은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된다. 머리에 삭두를 대지 않는 것,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나를 지배하는 분이 따로 있음을 의미한다. 내 머리를 내가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술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의 사람으로 산다는 의미이다. 이는 뭘 하느냐에 관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분, 즉 구별적 의미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죽음은 죄에서 온다. 죽음은 하나님과 끊어짐을 말한다. 이 나실인에 가해지는 제제를 보면 뭘 하라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세우는 것이다. 네가 누구냐 하는 구별을 이야기 한다.

 


 

헌신이라는 것은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다.

 

땀 흘려 하면 된다. 그러나 헌신은 그것이 아니다. 헌신은 내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어렵다. 뭘 하는 것으로 대행이 되면 쉽다. 하면 된다. 그러나 바쳐진다는 것, 헌신의 진정한 의미는 죽는 것이다. 그 영역에 대해 죽는다는 의미이다. 가나안 땅, 누구의 지배와 통치 아래 살 수 있게 된 땅인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호수아가 예수님의 모형이다. 요단을 건너서 들어가는 가나안 땅은 애굽의 습성을 버려야 하고 광야의 불순종을 다 죽여야 하는 곳이다.

 


 

2절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지금 이스라엘 공동체가 어디에 있는 상태인가? 여리고에 있다. 아이성은 여리고 보다 고지대에 있다. 아이성 점령을 위해 삼천명이 갔다가 처참하게 대패하였다.

 

이유가 뭔가? 단순히 아간의 문제인가?

 


 

여호와께 묻지 않았다. 묻는데 실패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나갈 때 항상 우림과 둠밈이라는 제사장 의복 앞에서 하나님께 물었다. 그런데 그게 없이 그냥 올라갔다. 왜 묻지 않았을까? 중요한 질문이다. 이 전쟁을 힘의 논리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통로로 3가지를 주셨다.

 

첫째는 말씀이고, 둘째는 기도이다. 그리고 성찬이다.

 

오늘날 교회마다 성찬을 그냥 일년에 두 세번 형식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이 세 통로를 통하여 은혜와 사랑과 복을 주신다.

 

말씀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 우리를 사랑하심과 그 정서가 가득하다. 그뿐만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받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남긴 말이 “다 이루었다”이다.

 

이것은 “테텔라스타이”, 다 이루었다, 다 지불하였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상거래 상의 완전히 지불됨을 의미한다.

 

우리의 구원이 공짜인가? 절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값 주고 산 귀중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지닌 그의 백성인 것이다. 값을 얼마나 귀하게 지불하였는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중하고 존귀한 존재인지 모른다.

 

그리고 기도라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묻지 않고 살고 있다. 그래서 삶에 시간 낭비가 많다.

 

이것을 성경에서 방황성 낭비라고 한다.

 

그로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열하루 광야길을 40년 동안 유리했다. 성경은 이것을 낭비라고 하고 방황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표현하는 방황은 윤리, 도덕적 개념보다 시간의 낭비를 말한다. 시간의 되돌려지지 않기 때문이고, 한번뿐인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 한번뿐인 인생을 은혜 가운데 순종하여 낭비하지 않도록 은혜 주시기 위해 말씀과 기도, 성찬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7:8~15 아골 골짜기

 


 

아이성 전투 패배이후 ‘아간’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아간은 그야 말로 사고뭉치이다. 아간은 왜 범죄하였는가? 7:21절을 보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중요한 동기가 범죄의 흐름대로 열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탐심이다. “탐내어 가졌나이다”라고 했다. 탐심은 성경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룬다. 에덴동산에 불순종의 죄가 어떻게 들어왔는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보면서 생겼다. 탐심의 뿌리가 어디인가? 만족하지 못할 때 생긴다. 하나님이 일곱을 주셨으면 이 일곱이 가장 좋은 상태이다. 하나님이 주신 상태가 가장 좋고 복된 상태이다. 그런데 거기에 만족하지 못해서 생긴다. 이 불만족의 근원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함에서 생긴다. 그 끝이 탐심이고, 이 탐심이 죄악으로 연결된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순종하며 주시는 대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땅이다. 그 만족을 연습하고 배우는 땅이다. 이것이 가나안의 삶의 원천이다.

 


 

여호수아 7장에 들어오면 계속하여 반복되는 명령이 “바쳐라”, “온전히 바쳐라”하는 명령이다. 바치는 것은 무엇을 내가 성취하고 지성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이 아니다.

 

계속하여 나를 죽이고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치하고 다스리도록 나를 드리는 것이다.

 

לארשׂי백성이 ‘아이성’에서 대패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통곡하고 있다. 잘못은 자기가 해 놓고 하나님 앞에 투정하고 있는 모습이다.

 

7절과 8절을 보면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돌아섰다는 표현은 대패를 말한다. 참으로 적반하장 격인 기도이다.

 

잘못은 스스로 해 놓고 그 원망을 모두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모습이다. “하나님 내가 언제 간다고 했나요? 보내 놓고 왜 먹을 것 입을 것 안주시나요? 하는 이런 모습이다

 


 

15절을 보자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לארשׂי가운데에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본문에 보면 아간의 죄를 두 가지로 규정한다. 언약을 어겼다고 한다.

 

아간의 죄가 윤리적 범죄가 아니라 언약을 어겼다고 했다. 그 다음으로는 망령된 일을 행하였다고 하였다. 망령됨은 잘 쓰지 않는 표현이다. 성경 속에서 보면 “망령”은 “네빌라”이다.

 


 

“네빌라”라는 표현은 가슴 아픈 말이다. 동사로 쓰일 때는 부정한 성적관계를 말할 때 쓰인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할 때 음행하는 것으로 비유했다. 대표적인 기록이 호세아서이다. 호세아서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아내가 계속 가출하고 부정하게 되고, 심지어 아이까지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와서 사랑하며 살아감을 호세아서에서 보여준다.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한다. 하나님 앞에 남은 것은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 밖에 없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죄인 앞에 고난을 받고 무릎을 꿇는 모습이다. 이러한 그림을 호세아서에서 보여준다. “네빌라”는 부부간의 관계가 틀어진 부정적인 관계를 표현한다.

 


 

16절~18절까지 보면.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לארשׂי을 그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아간을 찾아 들어가는 순서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이지 않는가? 아간을 처음부터 지명하여 뽑으면 될 텐데... 처음부터 이렇게 좁혀 들어갔을까?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한사람의 죄가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설명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로마서에 보면 한사람의 죄로 인류가 타락하였는가 하면, 한사람의 속죄로 인류의 죄 값이 다 치루어졌다. 대표성의 원리이다. 아간 한사람의 죄가 전 이스라엘 공동체를 무너뜨렸다. 패배를 가져왔다. 아간을 어떻게 처리 하였는가? 21절,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어디에 숨겼다고 했는가? ‘장막 가운데’라고 하였다.

 


 

‘장막’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바로 공동체의 핵심, 중심적 개념을 갖는다. 이 장막의 협의적 해석을 하면 가족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권속이고 가족이다. 여자 한사람의 죄로 가정이 무너졌다. 그것도 에덴이라는 환경 속에 세운 장막이 무너진 것이다. 가정이 무너진 것이다. 그 마지막 책임이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가? 아담에게 물었다. 왜 그랬을까? 이게 하나님이 세운 공동체의 윈리이다. 성경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표현한다. 여자는 교회를 상징한다. 반면에 남자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래서 남자는 항상 책임의 자리에 있다. 가정에서 자녀가 잘못하였거나 아내가 잘못했거나 모두가 책임은 남자에게 있다.

 


 

아간을 어디에 묻었는가?

 

25~26절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לארשׂי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아간 한사람의 죄,그 결과로 아간은 대속물로, 속죄물로 아골 골짜기 돌무덤에 뉘었다. 이 모든 사건이 여기서 종결이 되어 버린다면 복음이 되겠는가!

 


 

‘아골 골짜기’는 히브리어로 ‘아키르’이다. 다시 호세아서 2:14~15절을 보자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기 아골 골짜기가 등장한다. ‘아골 골짜기’는 환난이라고 했다. 환난이 모인 장소이다.

 


 

그런데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을 삼고”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말씀하신 “소망”이라는 말, 히브리어로 “티크와”인데 이는 “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여리고성 라합의 구원의 장면으로 돌아가서 보자. 라합의 집 창에 붉은 줄을 매달았다. 붉다라는 의미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상징한다. 호세아서에서 상징하는 소망, 즉 줄이라는 개념이 여기와 연결이 된다. 소망이라는 뜻이다.

 


 

여리성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멸망에 이르지만 슬프고 한 많은 인생을 살던 기생 라합 만이 사망의 자리에서 소망의 붉은 줄 때문에 이끌어 냄을 받았다. ‘붉은 줄’ 때문에 처들어오는 병사들이 기생 라합의 식구들만 그 멸망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서 불러냄을 받았다.

 


 

‘불러내다, 이끌어 내다’ 여기서 교회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교회라는 개념의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나온다. 죽을 진노의 자리에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이 교회인 것이다. 이끌어 냄을 받은 자들이다. 누구처럼? 라합처럼!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오늘날 까지 있더라”하였다. 기생 라합이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족보에 들어가 오늘날까지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