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여호수아서1

여호수아서 5장 언약이행

호리홀리 2014. 12. 18. 14:59

5장 תירב이행

 


 

그들은 두 가지를 시행했다.

 

첫째, 할례이다.  תירב의 표시로 행했던 할례를 광야에서 하지 못했던 것인데 이제 시행하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코 앞에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불과 2km 그러나 요단을 건넌 그들은 은혜 충만 하였다. 야곱의 두 아들을 통한 세겜의 교훈이 있음에도 그들은 할례를 행하며 우리는  תירב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 유월절이다. 광야에서 지키지 못한 첫 유월절이다. 그들의 정체성 확립, 우리를 구원하신 여호와, 그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이다.

 


 

만나도 그쳤다. 기적은 점차 사라진다. 이제 모맥 거두는 추수가 시작 된 때이다. 스스로 노력하여 거두는 수고가 그들에게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홍해,요단강도하,여리고격파, 이제 가나안 전쟁은 그들 스스로 헤쳐나아가야 되는 것이다. 믿음이 연약 할 때는 기적을 많이 보여주신다. 그러나 이후에는 믿음으로 스스로 개척해 가야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초기사역과 말기사역을 비교해보라.

 


 


 

5:1~9 할례

 


 

5:1절에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הוהי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그들은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이 잃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이 전쟁은 이미 끝이 난 것이 아닌가? 전쟁에서 참으로 중요한 요인이 많이 있지만 사기가 꺾이면 승패는 거의 끝이 난 것이다.

 

가나안 부족의 왕들이 홍해와 광야와 요단의 결과를 듣고 그들인 녹았고 정신을 잃었으니 이제 밀고 들어가면 이기는 전쟁인 것이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엉뚱한 명령을 내린다. 5:2절을 보면 “그 때에 הוהי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

 

할례가 무엇인가? 외형적인 모양은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잘라내는 것이 아닌가! 전쟁을 앞둔 군사들에게 있어 무장해제나 다름없는 행위인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때 야곱의 아들들이 분개하여 복수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제 이렇게 된 것 우리 동생 디나를 세겜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으로 말하고 그 대가로 우리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과 혼례를 할 수는 없으니 세겜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 받으라고 속여 결국 할례 받아 꼼짝 못하는 세겜의 남자들을 죽이는 피의 보복을 한 사건이 있었다. 처참한 살육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행한 사건이다. 이 만큼 할례는 남자들을, 군사들을 꼼짝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만든다. 이제 군대를 사기 잃은 가나안 땅에 밀고 들어가기만 하면 끝 날 텐데 왜 여기서 할례인가?

 


 

창세기 15:1절을 보자 “이 후에 הוהי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말씀의 시작이 ‘이후에’라고 시작한다. 지금 아브람이 행복하고 안정되게 살고 있는데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하셨다면 아브람 편에서 들을 때 참 싱겁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게 아닌 것이다. 무언가 아브람이 안절부절 하고 안정된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 배경을 설명하는 구절이 ‘이 후에’라는 표현이다. 14장에 보면 아홉 개의 부족이 양편으로 갈려 싸우는 남북전쟁 중에 조카 롯이 재산을 잃고 포로로 끌려간 것을 알고는 그 무서운 전쟁 중에 겨우 그의 가신 318명의 병사로 전쟁에 뛰어 들어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승리하고 모든 것을 회복을 한 이후이다. 이후에 아브람에게 찾아온 것은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이었다. 보복을 염려하는 두려움이 컸다. 게다가 이 낮선 땅에서 자기는 대를 이을 후손도 없다 앞날이 캄캄하다. 당시 부족사회에서는 자손이 곧 세력이고 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두려워말라고 하신다. 여호와께서 방패임을 말씀하신다.방패는 전쟁을 막을 때 쓰는 물건이다.

 

이 시대는 자손과 땅의 부와 흥황의 기준인 것이다. 아브람의 마음속에는 전쟁에 대한 현재의 두려움과 자손이 없고 땅이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15:3)

 

아브람이 생각하는 방법은 자신의 집에서 길러온 종을 상속자로 쓰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아브람을 하나님은 데리고 밖으로 나가 하늘의 별을 보라 하신다.(15:5)

 

여기서 ‘아브람이 הוהי를 믿으니’(6)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아브람의 주장이 아닌 아브람이 하나님께 설득을 당하여 믿게 하심을 말한다. 15:8절에 보면 땅 문제를 거론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직 온전히 채워지지 않은 상태이고 하나님이 오시기는 했는데 누군지 잘 모르겠다는 아브람의 상태이다. 그런 가운데 언약체결식을 하는 장면이다. 15:8~17절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하는 아브람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이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이다. 어기는 자는 쪼개 놓은 제물처럼 끊어진다는 경고이다.

 


 

이렇게 언약을 체결하였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자 하갈을 통하여 자신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13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침묵이 이어졌다. 결국 17장에 보면 아브람이 99세의 나이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아브람이 생리학적으로 절망적일 때인데 나타나셨다.

 


 

창17:1“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이다. 여기에 담긴 중요한 세 가지 속성이 있다.

 

첫 번째가 “기르신다.” 두 번째가 “충만하게 하신다.” 세 번째가 “힘과 능력을 주신다.”라는 속성이 합하여져 있다. 이 속성을 다 포함한 것이 “내가 시작하고 내가 마친다.”이다.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이 말은 처음과 끝이라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의지와 사랑이 담겨 있다. 내가 시작한 것은 내가 완성한다는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이시다.

 


 

하나님이 창17:1“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하셨다. “내 앞에 행하라”? 이게 무슨 뜻인가? 이 말은 영어성경을 보면 “work before me”라고 했다. 엄마가 아기를 키울 때 걸음마 시키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이제 겨우 서고 걸음을 떼려는 아이를 뒤에 두고 따라와 하는 엄마가 있는가? 아니다 양손을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게 한다.

 


 

아브람! 네가 내손에 붙잡힌 인생이니 네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음마 시키듯이 내가 붙잡고 가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람 더러 아브람아 네가 어떻게, 어떻게 살아라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해가 되는가? 우리는 자꾸 율법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자꾸 요구하고 강요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절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그 아버지가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는 분인데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써 놓은 것이 전부이다. “work before me”라는 의미는 아기 걸음마를 시키듯이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끌고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시다.

 


 

할례의 진정한 의미

 

창17장은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마침내 할례를 명하시고 영원한 언약(17:19:...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을 세우시고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신다.(5) 그리고 언약의 표징으로 이삭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신다. 이스마엘은 할례 이전의 아들이다. 이스마엘은 자기 힘, 자기실력, 자기방법으로 얻은, 즉 육신에 속한 아들이다.그러나 이삭은 죽음 몸 같은데서 얻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다. 그래서 다르다.

 


 

신앙생활의 기초는 정확히 이 차이이다. 우리는 뭔가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전혀 아니다. 내가 뭘 해다가 바친다해도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그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걸 원하심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 너! 네 힘으로 살래, 내 힘으로 살래!” 하시는 이 차이이다. 그러니까 왜 이 가나안 전쟁을 앞두고 ‘할례’라는 무장해제를 시킬까?

 

이 가나안 싸움은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건 네 무기나 병력, 작전, 사기에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만 의지하라. 언약궤를 바라보라는 것은 주 만 바라보라 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원리인가!

 

결국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배우는 게 뭔가? 찬송가 가사에도 보면 “내 힘만 의지할 때면 패 할 수밖에 없도다” 우리가 의지할 우리의 장수는 우리 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결론이다.

 


 

골로새서 2:8~12을 보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놀랍게도 할례가 신약에서  세례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세례가 무엇인가? 옛것에 대해서는 죽고 소망에 대해서는 다시 사는 사건이다.

 

우리가 사는 삶의 원리는 새로운 원리이다. 이것을 은혜의 원리라고 한다.

 

이스마엘은 율법의 원리라고 한다.

 


 

할례의식은 언약을 이행하겠다는 2세대의 의지이며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것인 동시에 1세대가 광야에서 실패한 책임은 남자들에게 있는 것을 보여준다. 불평,불순종,반역,그리고 모압여인들과의 행음사건으로 소멸된 책임은 남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이를 회개하는 행위가 할례의식인 것이다.

 

사사기로 가면 다시 시작되는 남자들의 죄로 인해 공동체는 분열과 심판이 반복된다. 이런시각으로 라합과 아간사건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하겠다.

 


 

5:10~12 유월절

 


 

할례는 언약체결식이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써 유월절에 참여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언약백성의 언약체결식에는 이후 유월절을 지키는 의식이 동반된다. 언약백성임을 확인하는 정체성의 확립,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얻은 백성과 하나님과의 언약갱신의 의미가있다. 이것은 장차 예수그리스도의 유월절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을 보여주는 예표인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여리고 성의 공격이 시작 될 쯤 적정을 살피던 여호수아 앞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났다. 모세에게 했던 대로 신을 벗어라. 신을 벗는 것은 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지휘권을 내어 놓으라는 것이다. 이 전쟁의 지휘관은 여호와라는 것이다. 여호와만 의지하고 명령을 받고 순종하라는 것이며 나를 따르라는 것이다.여리고성의 전투는 이렇게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