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여호수아서1

여호수아서 3장:요단을 건너라

호리홀리 2014. 12. 18. 14:54

3장:요단을 건너라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와 대조를 이룬다. 홍해는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다르다. 1장의 팔로우십이 여호수아서 전체를 끌고 간다. 형통의 원리이다. 정탐군을 파송 할 때도 모세는 거창한 파송식으로 보냈으나 여호수아는 몰래 보냈다. 여기서도 팔로우쉽을 보여준다. 여호수아와 제사장 그리고 2세대인 백성들의 일치협력이다.

 


 

3장은 계속 “언약궤”를 쓰고 있다. 언약을 믿고 불가능에 도전 할 때 반듯이 언약을 이루어 주시는 것을 보여준다. 여호수아의 상황은 최악이다. 요단강 최남단 하류,모맥 거두는 시기,이 시기는 북쪽의 눈이 녹는 시기로 물이 최대로 불어난 상태이다.

 


 

어떻게 건널 것인가?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러나 형통,은혜,축복,응답은 우리가 해서 얻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아침רקב 일찍이” 이 말씀은 반복된다. 우리가 잘살든지 못 살든지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2절을 보면 3일을 기다렸다. 하나님은 왜 3일을 기다리게 하셨는가? 4:19을 보면 이 날이 정월 10일 이다. 무슨 날인가? 출애굽한 날이다. 이 두 날을 일치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침묵의 기다림, 그리고 2절의 유사들의 사역,3절 언약궤를 따르라,5절 스스로 성결,그리고 6절 제사장들의 희생과 헌신 ,이것이 가나안 승리의 비결인 것이다.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הוהי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2,000규빗, 약 900미터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또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הוהי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놀라운 일들(wonders, 기적)을 행하시리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들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고 했다.

 


 

하나님은 온 땅의 주님이시다. 이 표현은 두 번이나 반복되었다(11, 13절).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일을 체험하기 위해 자신을 성결케 해야 했다.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성결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또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가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 안에 서라”고 말했다. 백성은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났고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였다. 유대 땅에는 겨울이 우기(雨期)이며 모맥 즉 보리를 거두는 시기인 초봄에는 요단강 물이 항상 언덕에 넘쳤다.

 


 

본문에 두 개의 지명이 나온다. 싯딤을 떠나 요단으로 나간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온 지난 여정에 가장 기억하기 싫은 시기가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을 색상으로 표현하면 흑색이고 어두움일 것이다. ‘싯딤’의 의미가 그런 것이다. 막대기라는 의미를 갖지만 치고 때린다는 의미를 갖는다. 괴로움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여명이 깨는 그 순간 싯딤을 떠나는 것이다. 어디로 가는가? 요단으로 간다. ‘요단’의 의미는 ‘내려놓다, 내려가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무거운 기억, 어둡고 어려운 ‘싯딤’을 내려놓는 것이다.

 


 

요단강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은 곳이다. 세례란 말 그대로 물속에 수장시키는 것이고 그 죽음에서 다시 살리는 것이다. 죽음에서 동시에 삶, 즉 부활을 갖는 것이 세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갖는 것이 세례이다.

 


 

요단 앞에서 기다린다. 유숙하였다고 한다. 5절에 보면 백성에게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다. 그리고 6절에는 제사장에게 명령하고 있고, 7절에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며칠을 유숙하였는가? 3일간이다.

 


 

2절과 3절에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그 뒤를 따르라고 하신다. 법궤라 하지 않고 언약궤라 함은 언약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내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을 보라는 의미이다.

 

 

언약궤의 세 가지: 히브리서 9:1-12.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두 번째  십계명 돌 판이다. 이 돌 판이 두 번째 돌 판임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다.

 

첫 번째 돌 판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깨어졌다. 모세는 갈아서 그들에게 먹였고, 많은 살생이 일어났다. 심판을 받은 것이다.

 


 

세 가지 물건이 갖는 공통점이 있다.

 

통상 우리는 만나 사건을 대하면서 기적의 상징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만나를 주심은 기적의 대상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서면서 불평을 하기 시작한다. 옷이 문제이고, 떡이 문제이고, 물이 문제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듣고 응답하여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약속을 믿으시고 감동하여 들어 주시는 것일까? 전혀 아니다.

 

“뭐 떡을 주면 나를 잘 섬긴다고....” “네가!..” 하시는 뉘앙스의 응답이시다.

 


 

신명기 8:2~3절에 “네 하나님 הוהי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신다

 


 

만나의 기적을 보면서, 만나를 먹으면서 하나님을 잘 섬겼는가?  광야길 40년에 만나가 끊어지지 않았지만 섬김과 순종을 잊어버렸다. 아! 우리가 이런 자 이구나, 형편이 없구나 하고 깨닫기 위한 표징으로 언약궤에 담았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마찬가지다. 기적의 상징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고라’자손의 불순종에 대한 징계의 상징이다. 죽은 아론의 지팡이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시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고라 자신을 심판하신 심판의 상징이다.

 


 

십계명을 새긴 돌 판은 두 번째 돌 판이다. 이를 법궤에 넣어 기억하게 하셨다. 첫 번째 돌 판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깨트렸다. 갈아서 그들에게 먹였다 그리고 우상숭배의 죄를 물어 징계하셨다.

 


 

불순종과 우상숭배, 반역을 언약궤에 담아 두었다. 이 의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들을 보라는 것이다. 언약궤는 성막의 지성소에 그룹들 사이에 두셨다. 지성소는 1년에 한번밖에 못 들어 간다. 그것도 반드시 피를 가지고 들어갔다. 속죄의 피 이다.

 

속죄의 피를 “시은소”, 즉 언약궤를 덮는 경사진 덮개에 부었다. 그곳을 ‘시은소’라고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붓는 의미이다. 언약궤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다는 의미이다. 불순종과 우상숭배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어린양의 피로 부어져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림을 의미한다. 언약궤는 부적처럼 이것이 있어야 승리하고, 문제 앞에 들고 나가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어떻게 설명되는가를 보여준다.

 


 

5절에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הוהי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성결하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성결, 거룩” 많이 듣고 사용하는 단어이다.

 


 

첫째, 무엇인가로부터 끊어짐을 이야기한다. 분리됨을 의미한다. 매인 것을 끊어야 한다.

 

둘째,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항상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는 사랑으로 올인 하는 것으로 전부 아니면 전무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다. 백성들에게 “성결 하라!” 하심은 옷 빨아 입고, 행동 깨끗이 하고.... 그런 것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 하나님에게만 집중해라” 하시는 것이다. 결혼을 앞둔 신부가 신랑에게 집중하는 것과 같다. 다른 형제에게 2%정도 다른 마음을 둔다면 이는 성결이 아니다. 오직 신랑에게 올인 하는 것이 신부의 성결이다.

 

가령 자기 와이프에게 나는 98%정도 당신을 사랑하고 나머지 2%는 앞집 철수 엄마를 사랑해 한다면 허용이 되는 이야기 인가? 전부 아니면 전무인 것이다. 아내가 펄쩍 뛸 것이다.“그래도 나는 98%나 당신 사랑하는 데 뭘 그리 펄쩍 뛰냐?” 하겠는가.

 


 

우리 앞에 고난과 장애물이 놓였을 때 성경적원리는 정면돌파이다. 홍해,광야,요단,여리고,가나안전쟁....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우회나 매복을 명하기도한다. 중요한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다루실 때 고난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광야없이 고난없이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이 아니다. 인간의 죄성을 아시는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키고 계시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기꺼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