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구약의 역사

열왕기상14:21-15:24, 역대하10-16 제14장 남북갈등 시대의 유다(931-870B.C., )

호리홀리 2014. 12. 10. 13:31

 

제14장  남북갈등 시대의 유다(931-870B.C., 왕상14:21-15:24, 대하10-16)


여로보암이 분열할 당시에 르호보암을 따른 지파는 유다뿐이었다. 베냐민 지파는 처음에 지역적 특성 때문에 여로보암을 지지하였으나 르호보암에게 돌아와서 유다와 합하게 되어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대로 여로보암은 열지파를 소유하였다. 또 제사장들과 레위족속들과 신실한 신앙인들이 유다로 돌아왔다.


1. 분열 유다의 첫왕 르호보암과 애굽의 침략 -

르호보암(931-913B.C., 왕상14:21-31, 대하10-12) - 르호보암은 41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17년간 통치하였다. 그의 신앙은 부왕 말기의 영향과 그 모친의 영향을 받아 타락하여 문란하게 우상을 섬겼다. 이스라엘과 전쟁이 있었으며 애굽왕 시삭의 침략이 있어 큰 피해를 보았다.

- 시삭의 침략(왕상14:25-27, 대하12:2-12) - 르호보암 5년에 애굽왕 시삭의 예루살렘 침략은 그의 교만을 징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르호보암은 시삭에게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과 솔로몬의 금방패까지 빼앗기고(조공으로 바침) 유다의 독립을 유지했다.


2. 여로보암을 이긴 아비야왕(913-911B.C., 왕상15:1-8, 대하13:1-22) -

르호보암이 17년을 다스린 후 그 아들 아비야가 왕이 되어 3년을 다스렸다. 그도 아비의 죄를 버리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언약 때문에 은혜를 주셔서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심으로 북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40만의 군사로 80만의 여로보암의 군대를 이겼다. 북이스라엘은 50만의 희생자를 내었고 아비야는 종교 중심지 벧엘과 몇 성읍과 마을을 빼앗았다.


3. 개혁왕 아사의 성공과 실패(911-870B.C., 왕상15:9-24, 대하14-16)

아비야의 아들 아사가 왕위에 올라 41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부왕의 3년의 통치에 비해 장기간의 통치였고 신앙의 통치자로 우상을 제거했다.


⑴ 아사의 개혁 운동(왕상15:11-15, 대하14:2-5, 15:8-18) -

그는 개혁을 궁중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머니의 우상숭배를 꾸짖고 태후의 위를 폐했으며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들을 찍어 살랐으며 열조의 우상들과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제거했으나 산당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전쟁을 막아주시고 유다에 평안을 주셨다. 개혁 운동은 선지자 아사랴의 힘이 컸다.


⑵ 애굽 및 구스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대하14:9-15) -

41년의 통치기간 중 아사왕은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하나는 구스(에디오피아) 세라의 군대는 군사가 100만이요 병거가 300승이었고 아사왕의 군대는 58만이었다. '마레사'까지 진입한 적군을 맞아 아사왕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크게 승리하여 많은 전리품들을 얻었고 하나는 이스라엘의 바아사왕과의 전쟁이었다.


⑶ 이스라엘과의 전쟁과 하나님의 책망(왕상15:16-22, 대하16:1-10) -

아사왕 16년에 바아사왕이 유다를 공격해 왔는데 세라 군대와의 전쟁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던 그 믿음이 없었다. 바아사가 라마를 점령하고 거기에 성을 건축하려고 할 때 아사왕은 아람왕 벤하닷의 원병을 청원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바아사는 북방 도성들의 방비를 위해 철군했는데 아사왕은 바아사가 라마성을 건축하던 재료로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했다. 그때 선지자 하나니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왕을 의지하였다고 책망하자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아사왕은 하나님의 징계로 발에 중병이 들었을때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불신앙을 회복하지 못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고 2년 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