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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6:21-열왕기하10:11) 제11장 - 오므리 왕조의 번영과 몰락

호리홀리 2014. 12. 10. 13:25

 

제11장 - 오므리 왕조의 번영과 몰락(왕상16:21-왕하10:11)


-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을 창건 후 50년 동안에 세 번의 혁명이 있었고 바아사 시대 외에는 정세가 심히 불안했다. 오므리 왕조 때에 비로소 안정을 얻었으나 종교적으로는 암흑기였다.


1. 오므리 왕조 창건까지의 이스라엘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분열 이후 긴장 속에 전쟁이 계속되었고 바아사 시대에 유다를 침략함으로 더욱 치열해졌다. 바아사는 라마를 점령하고 성을 건축하여 기지를 삼아 유다를 전부 점령하려 했으나 유다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원병을 청하여 그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은 라마 건축을 버리고 후퇴하였고 유다는 이것을 취하여 게바와 미스바를 강화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시므리 왕을 죽인 군대장관 오므리가 정권을 잡으므로 정국은 안정 되었고 그의 왕조는 4대에 걸쳐서 44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오므리는 세멜에게서 산을 사고 그 위에 성을 건축한 후 사마리아라고 칭한후 수도로 삼았다.   또 다윗왕과 솔로몬 이후 잃어버렸던 권세를 회복하여 모압을 속국으로 삼아 지배하게 되었고 모압이 조공을 바쳤다. 오므리 왕조는 강력하고 번영한 나라였으나 영적으로는 크게 타락한 때였다.


2. 아합왕의 전사(왕상16:29-22:36) -

아합왕은 부왕 오므리의 뒤를 이은 후 부왕의 강력한 정책을 확대시켜 '트랜스 요르단'을 장악하기 위해 힘을 썼다. 다메섹을 경계하기 위하여 두로와 시돈(페니키아:베니게)으로 동맹을 맺고 그 동맹의 증표로 이세벨을 아내로 맞았고 남방 유다와의 동맹을 위해 그의 딸 아달랴를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에게 주었다.

이세벨은 바알신에게 헌신한 자였기에 이스라엘을 바알신화시키려고 투쟁일선에 나섰다. 종교적인 위기가 닥친 것이다. 아합왕은 상아궁을 지어 호화로운 생활을 탐했고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았다. 아합왕의 권세와 호화로운 궁전과 그의 세력도 끝이 와서 아람과의 전쟁에 죽었다.


3. 오므리 왕조의 몰락(왕상22:40-왕하10:11) -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위를 계승하여 2년간 치리하였으나 병사하고 그 동생 여호람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바알 신상을 제거하고 아람군이 침입한 어려운 때에는 굵은 베를 입고 옷을 찢으며 회개하기도 했으나 참 회개가 아니었음은 선지자 엘리사를 죽이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아람왕이 '트렌스 요르단'을 사이에 놓고 긴장상태에 있었고 아람왕 벤하닷이 죽고 하사엘이 왕위에 올랐을 때 길르앗 라못(요단강 동편의 길르앗의 요새이며 도피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아람과 싸울 때 부상을 입어 치료하는 중에 군대장관 예후에게 피살되어 오므리의 왕조는 엘리야의 예언대로 4대만에 무너졌다.


4. 오므리 왕조가 유다에 미친 영향 -

오므리 왕조는 유다와 혼인 정책으로 연합하여 남북의 긴장을 해소하고 주변 국가들에 국력을 확장하려는 이해관계에서 하나가 되었다.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을 이김으로 부귀와 영광이 극에 달했으나 이스라엘과의 친선이 깊어짐에 따라 종교적으로 부패와 타락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잃게 되었다. 국권도 점점 쇠약해져 그 아들 여호람 때에 에돔과 립나가 배반하여 수하에서 떠났고 아합의 딸 아달랴는 유다 왕국의 씨들을 학살하는 비참한 결과를 보게 되었다. 아달랴가 요아스가 위에 오를 때까지 6년간 통치하게 되어 유다왕국의 계대가 일시 중단되는 비극을 보게 되었다.


5.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왕상17-19, 21: 왕하1:1-2:11(엘리야) (왕하2:12-13:21(엘리사) -

아합왕과 그 아들의 통치 시대에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이 가장 대표적인 선지자의 활동이었다. 엘리야는 길르앗 디셉 사람으로 여러 가지 이적을 보면

①아합왕 때에 삼년반 동안의 가뭄을 선포하고 그릿 시냇가에 숨어 까마귀가 날라주는 떡과 고기로 연명하다가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서 한 과부와 그의 아들을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도록 기적으로 먹인 일과 그 아들이 병들어 죽은 후 그 아들을 기적으로 살린 일이다.

②3년후 이스라엘에 가뭄이 심하므로 아합이 가뭄을 엘리야의 탓으로 돌려 많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엘리야를 죽이려 했으나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으고 참 신이 ‘여호와냐 바알이냐’를 가리는 격전을 벌였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태우며 도랑에 채운 물을 핥게 하던 이적을 일으켰고 이방신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다.

③자기를 죽이려는 아합과 이세벨을 피해 호렙산으로 가는 도중 심신이 지쳤을 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대신하게 하라는 분부를 하셨다.

④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있을 때 언약의 백성들에게 '땅'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인데 그 기업을 지키려는 언약의 가정과 개인의 권리를 멸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책망하시는지 보여 주었다.

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된 후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 때에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가서 그 병이 낫겠느냐고 물으려 할 때 엘리야가 왕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는 예언을 듣고 왕이 두 번에 걸쳐 50부장과 50인의 군대를 보내 그를 잡으려 할 때 엘리야의 기적으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은 모두 죽었다.

⑥ 그의 승천으로 위대한 선지자의 생애는 마지막의 찬란한 막을 내리는 영광스러운 장면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엘리사의 사역을 보면 그는 부유한 농가 출신으로 열두 겨리 소로 밭을 갈 때에 엘리야를 통해 부름을 받았고 그의 활동 기간은 여호람왕의 초기부터 예후를 거쳐 여호아하스와 요아스왕 때까지 약 50년이다. 그는 궁중의 왕들과도 교통이 있었고 많은 이적 중에서도 사람들의 병을 고치거나 불쌍한 자들을 돕는 일상의 일들이 많았다. 엘리야의 선지학교를 더욱 번창시켜 선지자 양성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