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구약개론

제10장,입다의 서원

호리홀리 2015. 2. 24. 15:55

제10장,입다의 서원 

 


 

입다의 딸은 번제물이 되어 죽었나 (사사기 11:34-40)

 


 

성경 번역에 있어서 번역자는 때때로 특정한 해석을 번역문에 반영시키는 경우가 있다. 원문의 내용이 난해한 경우라든지, 번역문의 언어로 그대로 옮길 때 이해가 되지 않는다든지 (예를 들어서, 숙어의 경우), 또는 원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때 역자는 번역문에 특정한 해석을 가미시켜 번역하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역자는 원문의 내용이 불투명한 경우에도 문맥의 흐름을 분명히 해 두고자, 특정한 해석을 첨가할 수도 있다. 번역문에서의 이러한 해석적 요소는 때로 독자의 이해를 돕는데 큰 기여를 할 수도 있겠으나, 어떤 때는 원문의 의도를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사사기 11장의 한글판 번역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우선 사사기 11:37-40에 대한 한글 개역 성경과 표준 새번역 성경의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개역> 37.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38. 이르되 가라 하고 두달 위한하고 보내니 그가 그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9. 두달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40.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표준 새번역> 37. 딸은 또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한 가지만 저에게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두 달만 저에게 말미를 주십시오. 처녀로 죽는 이 몸,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가서, 실컷 울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38. 입다는 딸더러 가라고 허락하고, 두달 말미를 주어 보냈다. 딸은 친구들과 더불어 산으로 올라가서, 처녀로 죽는 것을 슬퍼하며 실컷 울었다. 39. 두달만에 딸이 아버지에게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주께 서원한 것을 지켰고, 그 딸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으로 죽었다. 이스라엘에서 하나의 관습이 생겼다. 40.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산으로 들어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애도하여 나흘 동안 슬피우는 것이다.

 


 


 

우리말 개역과 표준 새번역 공히 입다의 딸이 죽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해석적 입장을 번역문에까지 반영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위의 본문에서 입다의 딸이 죽는다는 표현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개역에서는 "죽다"라는 단어를 조그만 글자로 삽입시킨 것이다. 그러나 표준 새번역에서는 이런 식의 구분도 없이 아예 입다의 딸이 죽은 것으로 간주하여 이 단어를 번역본문 안에 그대로 반영시켰다. 우선 사사기 11:37-40의 히브리어 본문에 대한 필자 자신의 한글 직역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37. 그녀가 자기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게 이 일을 하게 해 주세요. 제게 두 달만 허락하셔서 산 위로 내려가서 저와 제 여자 친구들이 함께 저의 처녀됨을 위하여 울게 해주세요." 38. 그는 "가라"고 말하고, 그녀를 두 달 동안 보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기 여자 친구들과 더불어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됨을 위하여 울었다. 39. 두달이 지나서 그녀는 자기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자기가 서원한 바를 그녀에게 행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자를 알지 못하였고,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하나의 관습이 되었다. 40. 이스라엘 여자들은 해마다 가서, 매년 나흘을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애도하였다.

 


 


 

사사기 11장의 문제는 입다의 서원에서 시작된다 (30-31절). 출전에 앞서 입다는 서원하기를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야웨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서원은 신학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번제 ('올라')란 구약 성경에서의 용법상 "온전히 불살라 바치는 제사"를 가리킨다. 입다가 의도한 바는 소나 양같은 가축일리도 없고, 그렇다고 그가 집에 돌아갈 경우 혹시 그를 환영할 수도 있는 개와 같은 애완용 동물도 아니다. 따라서 입다의 서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그는 인신 번제를 서원한 셈이 된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이 인신 번제를 금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리는 가나안 민족의 행위를 가증히 여기셔서 (신12:31; 18:10), 이런 제사를 금하고 있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레18:21).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다 (레20:2-5).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창22:2),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으로서 (창22:1) 몰렉에게 자녀를 불살라바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입다가 인신 번제를 서원하여, 그대로 자기 딸을 죽여서 번제물로 바쳤다고 해석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입다의 문제성 있는 서원에 대하여 그의 비도덕적 출신 성분과 생활을 들어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로서 (11:1), 길르앗의 적자들로부터 쫓겨나서 돕 땅에 거하며 "잡류"들의 두목이 된 (11:2-3) 불량배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사람으로서 입다는 얼마든지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는 어리석은 서원을 내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입다가 서원대로 자기 딸을 죽여서 번제로 바쳤을 거라는 견해는 우리 한글 번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초대 교회 이후 많은 기독교 주석가들은 그만두더라도, 주후 1세기의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 역시 사사기 11장의 내용을 재기술하면서 입다의 딸이 이때 죽은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올 때, 그는 자기가 이룬 커다란 업적으로도 비길 수 없는 재난에 빠지게 되었다. 그를 맞으러 나온 자는 다름 아닌 자기 딸이었다. 그녀는 무남독녀인데다 처녀였다. 이에 입다는 그 큰 곤경으로 인해 심히 애통하였으며, 서둘러 자기를 맞으러 나온 자기 딸을 나무랬다. 그녀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 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승리와 동족의 자유를 맞는 일로 죽는 것일진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그리 무자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는 자기 아버지에게 두 달간의 유예 기간을 청하여, 친구들과 함께 자기의 젊음을 위해 애곡하도록 해달라고 하였고, 그리고 그 기간이 지나면 아버지의 서원대로 실천해도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기간이 지나자 그는 딸을 번제로 드렸다. 이런 제사를 드리는 것은 율법에도 어긋나거니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이런 행실에 대하여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해보지도 아니하였다 (유대인 고대사 5권 7장).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도, 헬라어 역본인 칠십인역을 비롯한 다른 고대 역본들도 "죽는다"는 단어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다만 아람어 타르굼의 39절 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삽입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자를 알지 못하였고,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하나의 관습이 되었다. 이는 아무도 자기의 아들이나 딸을 길르앗 사람 입다가 한 것처럼 번제로 바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제사장 비느하스에게 묻지 않았다. 만일 그가 제사장 비느하스에게 물었더라면 그녀를 피로 대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타르굼에 나오는 위의 삽입문을 통해 볼 때, 타르굼 역자는 입다의 딸이 이때 번제물로 죽은 것으로 이해한 듯 하다. 그러나 타르굼 역시 "죽는다"는 말은 삽입하지 않았다.

 


 

비록 주후 1세기의 요세푸스가 입다의 딸이 이때 번제물이 되어 죽은 것으로 기술하고, 많은 성경 주석가들이 요세푸스와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하더라도, 한글 번역문에서 히브리어 원문에도 없는 "죽는다"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삽입시킨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한글 성경은 이 구절들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하지만 사사기 11장을 통하여 볼 때, 어쩌면 입다의 딸이 이때 번제물이 되어 죽은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서원을 이루고자 평생 처녀로 보냈을 가능성도 크다. 성경을 번역할 경우 아무리 그럴듯한 해석이라도 함부로 본문에 그 내용을 삽입시켜서는 안된다. 필자는 사사기 11장에 대한 위의 두 한글 번역본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그와 더불어 입다의 딸이 이때 번제물이 되어 죽은 것이 아니라 평생 처녀로 보냈을 가능성이 있음을 다음의 몇 가지 점을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가) 입다가 무모한 서원을 하여 결국 자기 딸을 죽이게 되었다고 보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입다의 부도덕성 내지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지적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사기 11-12장을 자세히 살펴볼 때 입다는 그리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요 오히려 율법을 잘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입다가 기생에게서 태어난 서자였다고 해서 (11:1) 그가 부도덕한 사람이었다고 간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는 적자들로부터 학대를 당하여 부당하게 집에서 쫓겨나서 돕이라는 곳에서 살 수 밖에 없었다 (11:2-3).

 


 

11장 3절 하반절의 한글판 번역 또한 독자로 하여금 입다가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끔 도와주는 구실을 한다. 이를 개역은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고 하였고, 표준 새번역은 "건달패들이 입다에게 모여들어 그를 따라다녔다"로 번역하였다. "잡류" 또는 "건달패"로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아나쉼 레이킴'이다. 형용사 '레이크'는 문자적으로 "비어 있는, 텅빈"이라는 뜻인데, 이 용법으로는 삿7:16 ("빈 항아리"); 창37:24; 41:27; 신32:47; 느5:13; 겔24:11; 사29:8; 왕하4:3; 잠12:11; 28:19에 등장한다. 두 번째로 이 문자적인 뜻이 연장되어 "빈털털이의, 천대받는, 경시되는, 경박한"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데, 이런 용법은 삿9:4; 11:3; 대하13:7; 삼하6:20 네 곳에 등장한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아둘람 굴로 도망하였을 때 "환란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여 그와 함께한" 것처럼 (삼상22:1-2), 입다에게 모여든 사람들 역시 "잡류" 또는 "건달패"라기 보다는 일종의 천민 계급이었을 것이다. 입다는 자기에게 모여드는 천민들을 가지고 사병 (私兵) 조직을 구축하였겠고, 이때문에 정규군대 조직이 없었던 당대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암몬 자손의 침입을 받았을 때 입다를 통솔자로 초청하였던 것이다 (11:4-11).

 


 

입다는 출전에 앞서 암몬 자손의 왕에게로 사신을 보내어 야웨 하나님과 과거의 역사에 호소하면서 평화적 해결책을 종용한다 (11:12-13). 입다의 이러한 태도는 율법의 가르침에 부합된다. 하나님은 암몬, 모압, 에돔을 치지 말라고 명하셨다 (신2:5,9,19). 입다는 과거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간섭을 구체적으로 회고하면서 (11:12-27) 가급적 암몬 자손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시도하였다. 11장 12-27절의 내용을 통하여 볼 때, 입다는 역사 속에 나타난 야웨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입다는 길르앗의 적자들로부터 쫓겨나서 돕 땅에 거하며 "건달패"의 두목이 된 불량배였으며, 따라서 이런 종류의 사람으로서 입다는 얼마든지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는 어리석은 서원을 내뱉을 수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좀 지나친 해석이라고 하겠다.

 


 

나) 이제 입다가 서원한 일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하자. 입다가 서원한 바를 (30-31절)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점은 두 가지 문구로 묘사되어 있다. 첫째 문구는 "야웨께 돌린다"는 것이요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는 야웨께 속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둘째 문구는 "번제로 바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구의 결합 형식은 "갑 또는 을"로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의심할 나위없이 "갑 곧 을" 또는 "갑, 다시 말해서, 을"의 형식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입다는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자기 집 문에서 맨먼저 나와 영접하는 자를 야웨의 소유로 인정하여 그를 번제로 바치겠다는 것이다.

 


 

번제의 히브리어 명사형 '올라'의 어근은 "오르다, 올라가다"를 뜻한다. '올라'에는 어원상 "태우다"라는 뜻이 없지만, 그 용법에 있어서는 거의 예외없이 "온전히 불살라 바치는 제사"를 의미한다. 삿11:31의 "번제로 바치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창22:2) 하신 것과 거의 동일한 표현이다. 이 명령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이 취한 조처를 통해 볼 때, 아브라함은 이 명령을 문자 그대로 이삭을 잡아 바치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입다는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번제 명령을 염두해두고 자신의 서원을 발설하였는지도 모른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입다가 의도한 바는 가축이나 애완용 동물을 번제로 바치겠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입다의 서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그는 인신 번제를 서원한 셈이 된다.

 


 

전쟁에 임하여 급한 나머지 깊은 생각없이 부주의로 인신 번제의 서원을 하였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야웨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였다"는 기록을 (11:29) 미루어 볼 때, 입다가 언급한 "올라"는 다른 의미를 염두해둔 가능성도 있을 법하다.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그를 야웨께 드리겠다"고 서원하였고 (삼상1:11), 사무엘을 얻은 후 그대로 실천하였다 (1:28). 자식이 없어 구박받던 한나는 서원대로 아들을 얻자 전혀 망설임이 없이 그 아들을 성소에 바친 것이다. 야웨께 평생 바쳐진 사무엘은 번제물로 죽지도 아니하였고, 그렇다고 평생 총각으로 남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나의 서원대로 "평생 야웨께 바쳐졌다"고 볼 수 있다. 입다와 한나의 서원을 동일한 성격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한나의 서원을 통해서 볼 때, 입다의 서원도 어느 정도는 한나의 서원과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여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바울의 권면을 (롬12:1)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다) 11:34-40을 통하여 히브리어 원문 또는 각종 고대 번역본에 "죽는다"는 단어가 없다는 점은 입다의 딸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이 큼을 입증해주는 가장 강력한 요소중의 하나이다. 입다의 딸과 그녀의 친구들이 애곡한 바는 "그녀의 처녀됨을 위하여"였다. 이 표현을, 그 자체적으로 볼 때,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라고 해석해야 할 근거는 전혀 없다. 입다에게 있어서 무남독녀를 평생 처녀로 보내게 한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었을 것이다. 딸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별히 39절의 "그는 자기가 서원한 바를 그녀에게 행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자를 알지 못하였고,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하나의 관습이 되었다"는 문장 순서를 통해볼 때, 서원을 행한 결과가 바로 '그녀가 남자를 알지 못하였다'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다시 말해서 입다와 같이 인신 번제를 서원할 경우 번제물로 뽑힌 그 사람을 평생 동정으로 보내게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에서 하나의 관습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상 필자 자신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입다의 딸이 죽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재삼 강조하는 바는 입다의 딸이 과연 이때 번제물이 되어 죽었는지 아닌지 사실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고, 또 히브리어 원문에도 "죽는다"는 단어가 없는데 이를 번역문에 삽입하여 아예 한 쪽의 해석만 두둔한다면 이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필자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한글 번역문에 대한 재고를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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