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언약신학

새언약의 4가지원리

호리홀리 2014. 11. 25. 12:26

 

               언약신학(고급)

 

                                                       박인대교수                                                                    

 

         (새 언약의 4가지 원리를 중심으로)

 


 


 

거시적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두개의 산이 보인다. 앞의 산은 시내산이고 뒤의 산은 갈보리산이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백성들과 시내산언약이 세워졌고 갈보리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 언약이 완성되었다.

 


 

언약의 특징

 


 

1.영원성(불변성)

 


 

엡3:11절“곧 영원부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이는 언약의 영원성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언약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약을 체결하실 때마다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씀을 자주하신다.(노아언약 /창9:12,16),(아브라함언약 /창17:7)(다윗언약 /삼하23:5)(모압언약  /신7:9)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 때 까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언약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내포한다.

 


 

2.대표성

 


 

신7:7절을 보면 언약체결 당사자는 모두 대표성을 띄고 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노아는 두 번째 인류의 대표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자의 대표로,모세는 구약의 대표로, 롬5:17절은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강조한다.

 


 

3.미래성

 


 

신29:14~15절은 언약의 미래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언약의 특징은 미래성이다. 미래에 있는 자들도 현재의 언약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세겜언약은 모압 땅에서 모압언약가운데 있는 대표적인 미래언약이다.

 


 

4.연속성(유효성)

 


 

신29:14~15절은 언약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모든 언약은 유효하다. 노아언약이 체결되었다고 아담언약이 무효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아브라함언약 때문에 노아언약이 폐지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언약은 유효한 것이다. 갈보리언약은 그 자리에 우리가 없었어도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지셨고 그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 것이 유효성이다.

 


 

5.통일성

 


 

모든 언약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통일성을 보여준다.

 


 


 

이제 아담언약부터 그 속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를 찾아보자. 칼빈은 말하기를 “언약의 본질은 같다. 그러나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본질은 예수그리스도이며 모든 언약은 예수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1장 아담언약

 


 

아담언약은 행위언약이며 아담의 범죄와 타락으로 그 이후 언약은 은혜언약이다.

 


 

  IPSA(she herself)

 

창3:15절은 아담의 타락 직후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은 언약으로 원 복음이라 불리운다. 캐토릭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이 말씀을 왜곡하여 해석하고 있다. 벌게이트역에서 “여자의 후손”을 IPSA로 번역한 것이다. 즉 여자의 후손을 마리아로 본 것이다. 이때부터 캐토릭에서는 마리아 숭배사상이 일어났고 각종 성화에도 마리아가 뱀, 혹은 사탄을 밟고있는 그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                 손과 원수가 되게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종교개혁자들은 분노했다. 루터는 독일어 번역성경에서 성경 원문대로 Der selbe(he himself)로 번역했다. “그 메시아 자신이 사탄의 머리를 부실것이요“ Luther Bible(1545)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שׁאר ךפושׁי  אוה”  “후 예수페카 로쉬”  “후“ 는 3인칭 대명사로서 남성으로 되어있다. 여성이 아니며 마리아는 더욱 아닌 것이다. 여자의 후손을 가리키며 예수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다.  ”예수페카“는 상하게 하다, ”로쉬“는 머리로서   ”그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고 번역된다. 캐토릭은 전통을 중요시하여 이후부터 마리아 숭배사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2장 노아언약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 제2창조사역을 시작하셨다. 노아방주는 하나님의 공의이며 심판인 것이다. 인간의 죄로 인해 미래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여주시며 언약의 표시로서 장차오실 메시야를 예표하신 것이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다. 노아는 의인이기에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다. 120년을 이겨낸 믿음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나는 제2의 아담이다’.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겠다’는 생각을 노아가  왜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노아는 포도 수확 후 자신의 죄성을 본 것이다. “나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구나” 그의 상실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노아를 두 번째 아담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세기 8장19절에서 방주사건은 종결되며 8:20절부터 9장으로 이어진다. 노아언약의 골자는 피언약이다. 9:4~5 “....피 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듯이    너희 피 곧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언약을 파기하면 피를 볼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며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  피언약은 시내산언약에서 절정을 이루고 메시아언약(눅22:20 이 잔은 나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에서 완성된다.

 


 


 


 


 


 


 


 


 


 


 


 


 


 


 


 

                3장 아브라함언약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복의근원,축복의 통로는 창세기22:18의 “네 씨”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네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갈3:16절을 보면 “이 언약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르켜 그 자손들이라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르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창3:15절의 "seed" “그 씨”가 창22:18절의 "seed"로 이어지며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것이 seed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창22장은 메시야의 시각으로 읽어야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당한 명령을 하셨는데 왜  아브라함은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았을까? 아브라함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아들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둘째,언약의 아들 아닙니까? 하나님이 죽게 하시면 언약은 어떻게 됩니까?

 

그러나 그가 대꾸 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22:2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평형법으로  해석해 본다.

 

아브라함아 나에게도 아들이 있다.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이다. 나는 이 아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 아들을 죽여야한다. 

 


 

이것이 기독론적해석이다. 이삭이 짊어진 나무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한다. 22:6절의 불과 칼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한다.  앞으로 십자가의 사건을 미리 시뮬레이션하시는 장면이다.

 

번제할 어린양(7)은 이삭을 대신 할 어린양이 준비되었다. 이삭과 역할이 바뀐다. 어린양은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속의 원리이다.  예배에는 대속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담대하게 자기아들을 바칠수 있었는가?

 

히11:19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아브라함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제4장 시내산언약

 


 

시내산언약에서 부터 하나님과 언약백성의 관계는 결혼관계로 묘사된다. 지금까지는 대표성을 띤 개인과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왔다면 이제부터는 언약백성전체를 대표하는 이스라엘백성과 언약을 맺는 것을 부부관계로 묘사하는 것이다.

 

문서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출19장과 24장을 다른 문서의 편집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언약의 구조를 이해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게된다.  이후의 언약은 법적 선포와 실제의 언약체결식으로 나뉘어진다. 그러므로 19:1~6은 법적선포이며 24장은 실제 언약체결식인 것이다.  하나님은 신랑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은 신부로 섰다. 언약의 골자는

 


 

                       내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다.

 


 

법적선포식이 끝난 후 언약의 세부법인 십계명과 언약법들이 선포된다.  이것들은 언약을 유지하기위한 수단이다.(출20~23장) 모세는 중재자,중보자로 섰다.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이다.

 


 

출24:1~7절은 언약체결식이다.

 

언약의 당사자가 양쪽에 서고 가운데 모세가 섰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제단과 백성사이에서 모세는 결혼식을 주례하는 것이다. 24:3절에 성혼이 선포되고 양쪽에 피를 뿌리는 피언약이 체결된 것이다. 어기면 피를 본다는 장엄한 결혼예식이다.

 

그리고 결혼식의 피로연인 화목제가 드려졌다. 이 후의 모든 언약체결식에는 번제와 화목제가 제의적절차로 등장한다. 번제는 다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의미이며 결혼서약이다. 그러나 화목제는 일부는 드리고 일부는 백성들이 나누어 먹는 피로연인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하며 교재를 나누는 것이다.

 

결혼식이 마치고 성소가 곧 하나님과 언약백성들이 살 신혼집인 것이다.

 

하나님의 집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가구는 조촐하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런데 언약을 체결하고 그 피가 마르기도 전에 백성들은 언약을 파기한다.  금송아지사건이다. 이것은 단순한 우상숭배가 아닌 하나님과의 언약파기이며 애굽의 금송아지 신 과의 언약체결식인 것이다. 출32:6“이튼 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언약의 제의적절차인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언약체결식을 한 것이다.

 


 

언약파기에 대한 모세의 1차 언약기도

 

언약파기에 대해 하나님은 “진멸”이라는 말을 반복하신다.(32:10,12) 언약기도는 언약에 근거해 언약적자비(헤세드)를 호소하는 기도이다.  모세의 1차 언약기도에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신다.

 

출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모세는 금송아지를 가루로 내어 백성들에게 마시게 함으로 회개케한다.

 

화란의 과학자이며 목사인 “니 하니”는 “The Chemistry of the Blood"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금가루를 미세하게 갈아 물에 뿌렸더니 포도주 색깔 같이 벌겋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성찬식이라했다.

 

그러나 앞장선 자들을 처단하기 위하여 레위지파가 하나님편에 선다. 이 일로 세겜사건으로 인한 시므온은 탈락했으나 레위지파는 회복되어 하나님을 수종드는 지파의 은혜를 받는다. 헤세드인 것이다. 백성들의 강요에 의해 이 일을 진행한 아론은 오히려 대제사장의 가문을 이룬다. 역시 하나님의 헤세드인 것이다.

 

 

언약파기에 대한 모세의 2차언약기도

 

아직 하나님의 진노는 풀리지 않으셨다. 출33:3“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가나안은 약속한 것이라 주겠으나 너희만 가라 그리고 다시 “진멸”이란 말을 하셨다. 다시 모세는 언약적자비를 호소하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사

 

출33:14“내가 친히 가리라” 언약기도는 특별한 기도이며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인 것을 알 수 있다. 모세의 생명을 건 중보기도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세를 통해 보여준다. 하나님과 동행한다 하지만 범죄하고 더럽고 냄새나고 청소되지 않은 우리의 마음의 방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불편해 하실까?

 

결혼식하고 나서 하나님은 즉시 신부인 언약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광야로 데리고 나가셨다. 자주 변하는 그들을 40년간 훈련시키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1세대는 계속 칭얼 거린다. 기적을 보고 나온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 물 등, 계속 기적만을 요구했고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2세대는 달랐다. 그들은 언약을 지켰고 토라(말씀)에 순종했고 가나안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제5장 모압언약

 


 

모압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모압고원에서 가나안을 내려다보며 체결한 언약으로 신명기를 가르킨다. 모압언약의 법적선포는 신26:16~19절이다.

 


 

            보배로운 백성  (내 소유)

 

             가장 높은자   (제사장 나라)

 

             성민이다.     (거룩한 백성)

 


 

시내산 언약의 주 체결자는 1세대였으나 모압언약의 주 체결자는 2세대였다.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의 구조는

 


 

                      안식일-안식년-희년

 


 

그러나 그들은 희년을 지키지 않았다. 신28장과 레26장은 언약적축복과 저주가 기록되었다. 그러나 축복보다 저주가 많아 오히려 언약적저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언약적저주의 3단계

 

1단계: 자연재앙/아합왕 때 많은 선지자 학살과 언약파기에 대한 기근

 

2단계: 전쟁/앗수르에게 이스라엘 멸망, 바벨론에게 유다멸망

 

3단계: 디아스포라

 


 


 


 

        6장 엘리야에게 주신 Gentle Whisper

 

             

 

엘리야의 승천은   Good  or Bad?

 

엘리야의 승천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엘리야의 승천 자체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이 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언약파기에 대한 심판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가신 것이다. 이 사건을 어찌 낭만적으로 볼 수 있겠는가?

 

왕하2:12을 보면 엘리사는 자신의 옷을 찢는다. 비극 앞에서 참기 어려운 행동의 표현이다.  2:14절에서는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나이까?” 하며 절규한다.  하나님이 떠나셨다.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안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승천은 Bad 사건이다.

 

엘리야의 시대는 가장 영적으로 타락한 시기였다. 오므리왕조의 아합은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고 수많은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페니키아의 공주였던 이제벨은 바알 우상숭배로 이스라엘전체를 장악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언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이런 시대에 엘리야는 생각하기를 모세와 같은 기적을 주께서 보여주시면 이 백성이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왕상18:17절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것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 이 악한 시대에 기적을 보여주셔서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켜주옵소서! 엘리야의 이 기도가 응답되어 불이 떨어졌다. 그러면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왔는가? NO! 그때 뿐이었다.

 

이것은 엘리야의 마지막 진검승부였다. 오랫동안 준비했고 모든 백성을 갈멜산 정상으로 모아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주었는데...... 엘리야의 실망을 이해 할 수 있겠는가? 이제벨은 더욱 광분했다. 하나님의 기적을 수없이 보고 들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니 아합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엘리야의 상실감은 죽기를 청했다.

 

우리도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기대할 때 있는가? 기적은 일어나지 않지만 일어난들 사람의 마음은 억지로, 강제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로하고 먹고 재워서 호렙산으로 데려간다. 19:8절의 “그 굴”은 모세가 언약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을 만난 바로 그 굴인 것이다. 히브리어의 정관사 “하”(the)가 붙어있다.  엘리야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아 하나님께 대든다. 19:10“....이스라엘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오직 나만 남았거늘”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퉁명스러운 엘리야의 외침은 계속 허공을 가른다.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도,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고 불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한다. 폭풍,지진,불은 엘리야의 사역이며 기적들이다. 엘리야야 이런 것들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Gentle Whisper"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은 ”Gentle Whisper" 인 것이다. 그래서 언약의 말씀을 받은 호렙산의 “그 굴”로 데려오신 것이다. 엘리야, 엘리사 이후 선지자들은 말씀을 기록하며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바꿔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엘리야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고 있다. 내 뜻대로 안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 10절 말씀에 이어 14절에도 그대로 반복된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요나같이 끝까지 고집부리는 엘리야의 사역은 그래서 비극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데려가신다. 롬11:2절을 보면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송사했다..”고했다. 고소한 것이다. 법정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기적을 보여주었는데도 믿지 않는 저놈들을 다 쓸어 버리시옵소서’ 라는 것이 엘리야의 송사의 내용인 것이다. 모세는  주의 언약백성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생명을 건 언약기도를 드렸는데 엘리야는 자기백성을 송사한 것이다.

 

마17장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킨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어리석게도 모세와 엘리야같은 기적을 원했으나 마17:5“....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사역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야의 사역은 이렇게 중단되었고 승천했다. 죽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죽지 않았으니 다시 올 것이라 믿었다.  예수님도 ‘엘리야가 왔다’라고 세례요한의 사역을 빗대어 말씀하셨다.

 


 


 


 

                     7장 새 언약

 

                  (새 언약의 4대원리)

 


 

새 언약의 4개 기둥을 보면

 


 

첫째,렘31:31~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슴이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

 

둘째,겔36:26~28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율례를 지켜 행할지라. 28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세째,마26:26~28, 눅22:20“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

 

네째,히7,8,9,10장

 


 

렘31:31~34절을 텍스트로 해서 새 언약의 4가지 원리를 찾아본다.

 


 

                 1.Self-Evidence

 

                 2.Voluntarism

 

                 3.Perfection

 

                 4.Assurance

 


 


 

1.Self-Evidence

 


 

렘31:34 “.....다 나를 앎이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다 아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고민은 선민의식이었다. 우리는 과연 선민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가? 아버지에 대한 상처였다. 왜 우리를 때리시는가? 나라를 망하게 하시고 흩으시고 포로로 끌고가셨는가? 이 모든 것이 해결된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이다.

 

남성 성인이 3,000명 이었으니 아이들과 부녀자들 까지 족히 1만명을 넘었을 것이다. 행2장의 베드로의 멧세지는 요엘서로 시작된다. 사람들이 성령에 취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우리가 술먹고 취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각 나라 방언으로 듣게 것은 요엘서의 성취”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날 설교의 서론에 불과했다. 본론은 시16,시110이었다. 시16편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예언되었다는 것과 시110편에 예수그리스도의 승천과 통치에 관한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행2:25~28 “다윗이 저를 가르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슴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베드로는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다. 죽음,부활,승천,통치까지....

 

행13장에 보면 바울의 설교논리와 베드로의 논리가 같다. 행13:34절에 시16:27절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설교하고 있다. 시16편은 2,22,34,35,89,110편과 함께 유명한 메시아 예언이다.

 

시22편은 십자가상에서 일어날 상황을 미리 예언한 것이다. 숨을 쉴때마다 조여드는 고통,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십자가형틀이었다. 요19:28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시22:7~8은 마27:35,요19:23~24절의 예언이다. 사53장은 3인칭 “그”로 시작하지만 시22편은 메시아 자신의 이야기이기에 1인칭 “나”로 시작된다.

 

행2:26~27절의 베드로의 설교는 시16:8~11절을 인용한다. 내 시신이 무덤에서 썩지 않는 것이 믿어지겠는가? 우리 옆에 마가의 다락방 아래 다윗의 무덤이 있는데, 베드로의 말이 이해가 되겠는가? 시편의 주인공이 다윗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그가 누구냐? 메시아라는 것이 베드로의 설교였다.

 

시16편은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다. 3절“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다. 땅에 있는 연약하고 말썽많고 부족한 우리를 향한 예수그리스도의 고백이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가 무슨 더 큰 은혜를 더 구할 수 있겠는가?

 


 

2.Voluntarism

 


 

엘리야가 말하기를 하나님 한번만 기적을 보여주시면 저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럴까요? NO

 

하나님은 GentleWhisper 로 말씀하셨다. 겔 36:26~27절 “새 영을 너희 속에 두어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것이며” 자발적으로 주의 일을 하게하시는 것이다. 못 이겨서 하거나 부탁해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조용히 오신 것처럼  부드러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다. 눅24:45절에 부활하신 후 자신을 적극적으로 증거하거나, 빌라도나, 적을 멸 하실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랬다면 다 믿었을 것인가? NO

 

마음이 먼저 항복하지 않으면 않된다. 그럼으로 엘리야의 말같이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Gentle Whisper, 부드러운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이 변화되었고 뜨거워진 것이다. 눅24:32절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 진 것이다. 이것이 신약시대 부활 후 교회에서 하나님이 새 언약 백성들을 만나는 방법이다. 말씀을 풀어주시는 것.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 진 것이다.

 

시16:9~10에서 예수님은 기쁘고 즐겁게 십자가 지셨다. 사랑하는 이땅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쁘고 즐겁게 십자가 지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헌신한들 십자가에 비교될 수 있겠는가?

 

불신자들이 우리를 향해 노예같이, 환자같이 산다고 할 때 우리가 기쁨으로 예배하고 섬길 수  있다면 그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기쁨으로 섬기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이다.

 


 


 

3.Perfection

 


 

렘31:31~34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 31:33절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자녀관계도 되지만 결혼관계로 묘사한 것이 언약이다. 구약은 결혼관계로 신약은 결혼관계를 초월하는 관계를 보여주신다. 곧 완전한 용서인 것이다.

 

출24:8~11절의 언약의 피는 이스라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곧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최대의 명절 유월절에 먹는 어린양은 희생양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위해서 희생된 것이다. 어린양이 존귀하신 하나님인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어찌할꼬 하며 회개했다.

 

 


 


 


 

4.Assurance(히7~10장)

 


 

히9:15“..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기업은 유업 즉 유산이다. 천국을 유산으로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산은 부모가 죽을 때 받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죽을 수 있느냐는 것이 유대인의 생각이었다. 즉 신성모독인 것이다. 히9:16~17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죽으셨다. 인간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그분이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하나의 의문은 예수님이 꼭 승천하셔야 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희생양으로 돌아가셨으나 부활은 희생양으로 한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으로 하신 것이다. 십자가 부활로 말미암아 대제사장으로 준비되신 것이다.

 

원래 인간인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가지고 휘장을 지나 지성소로 들어가 언약궤에 피를 뿌리고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고 나온다. 그러나 인간 제사장은 완전하지 않다. 들어갔다가 나와야한다.

 

그러나 완전한 대제사장은 그 안에 들어가 계신다. 이 땅의 지성소를 폐하시고 하늘의 지성소에서 왕의 권위로, 여기서 왕으로서의 사역이 설명된다.

 

하나님께 중보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모두 원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더럽고 냄새나고 시기,질투등등 그때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셔서 나를 변호해주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의심은 다 풀어진 것이다. 그리고 녹아졌다. 그들은 도저히 헤어지지 못하고 남았다. 이렇게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초대교회가 이것을 경험했다.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충만해야한다. 억지로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억지로 하지 않게 하시려고 십자가지셨는데 우리가 힙들다하면 되겠는가?  새 언약의 성도는 기쁨으로 감당해야한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성도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밝고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해야한다.

 

이 모든 구속사는 하나로 귀결된다.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억지로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는가?(J. 뉴톤,C.S 루이스)

 

루이스가 어느날 학회에 참석했다가 어느방에 잘못 들어갔다. 비교종교학회 방이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루이스가 주저없이 이야기했다. 은혜 아닙니까? 그렇다 종교개혁의 첫 번째 슬로건도 오직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천사의 범죄는 용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용서하신다. 인간은 은혜로 사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예배 때 마다 찬양한다. 천국가면 계시록 7,14장 같이 모두가 찬양대원이다. 구원의 은혜 앞에 어찌 찬양하지 않겠는가?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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