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사야서의 언약적해석

이사야58:1-59:21,참된예배

호리홀리 2015. 2. 14. 22:04

제58-66장/시온의 영광

 


 

조물주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죄인이 되어 저주 아래 놓인 인간에게 구원을 베풀 자 누구인가? 스스로 종교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가식적인 종교 행위는 하나님이 돌아보지 아니하신다. 죄악에서 죄악으로만 치닫는 인간들 역시 스스로의 무덤을 팔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누군가 중재할 자를 찾지만, 피조계 중에서는 아무도 얻지 못하신다. 결국 조물주 하나님은 스스로 구원의 방도를 마련하시고, 심판주와 구원주의 역할을 하신다.

 

이 구원 사역을 실제로 완성시킬 '야웨의 종', 곧 메시야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시온'에게 영광을 가져올 유일한 통로가 된다. '새 하늘과 새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창조로 이어지는 그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을 바라고 순종하는 '야웨의 종들'에게는 가장 복된 '역사적 사실'이 되겠지만, 하나님을 거스리고 패역한 일들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이런 복된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형벌을 받을 것이다.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58:1-59:21)

 

하나님은 선지자더러 외치라고 하신다. 1절 하반절의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는 말씀은 미가3:8에 대한 메아리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들이, 의롭게 살지도 아니하면서, '종교인'으로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날마다 하나님을 찾으며 그의 길 알기를 기뻐하는 백성처럼 보인다. 그들은 스스로 마치 정의와 공평을 행하는 백성인 양 착각하고는, 하나님더러 '오셔서 의(義)의 심판을 내려달라'고 구한다 (이사야58:1-2).

 

사람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특정 종교 단체에 속해 있으면서, 정기적인 종교 행사에 참석하고, 또 그 종교에 소속한 교인임을 대내외적으로 밝히는 것으로, 자기들이 믿는 신(神)을 만족시키고, 또 종교적으로 추구하는 목적(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어떤이들은 정기적인 종교 행사 외에도 좀 더 열심을 내어 그 종교의 깊은 세계를 추구하며 일반인들의 생활과는 약간 거리감이 있는 수도자(修道者)의 길을 걷는다. 우리 기독교로 말할 때, '이름만 내건 교인'이 있는가 하면, 금식, 철야 등을 통하여 열성적으로 교회 생활에 임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에 열심을 낸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고 볼 수는 없다. 사람들 보기에는 '열성적이고 좋은 종교인'일지라도, 하나님을 찾기는 커녕 실제로는 그런 열성적인 종교 생활을 통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종교란 하나의 '처세(處世) 수단'으로 전락할 뿐이다. 한때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내가 금식도 하며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내 소원을 안들어줍니까?"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었다 (3절). 이런 류의 불평은 종교에 열심을 내되, 매사에 자기 욕심을 따라 구하는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참고적으로 성경에 언급된 유대인들의 금식으로는 유대력으로 7월(티슈레) 10일의 속죄일 금식 (레위기23:27-32 참조) 외에, 4월(탐무스) 17일, 5월(아브) 9일, 7월(티슈레) 3일, 10월10일의 금식이 있다 (스가랴7:3-5; 8:19 참조).

 

그러나 이들의 금식은 종교적 겉모양만 갖추었을 뿐 (5절), 그들의 비열한 행실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금식 중에도 자기 사업(3절과 13절의 '오락'은 '사업'이나 '일'로 번역함이 적합하다)에 여전히 신경을 쓰며 일꾼들을 더 혹사시킨다. 그뿐만이 아니다. 심지어는 금식중에 싸우며 다투며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이사야58:3-5).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종교란, 그것이 금식이든 (6절) 안식일이든 (13절), 한 마디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6-7, 9-10절).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종교인'이야 말로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가 이루어져 그의 보호와 사랑을 한 몸에 받을 것이다. 이런 이들과 이들의 후손이야말로 바로 황폐했던 땅을 다시 일으켜 꽃피우게 하고 (12절) 그 땅을 차지할 (14절) 복된 사람들이다 (이사야58:6-14).

 

안식일에 대한 강조(이사야58:13-14)는 예레미야17:19-27; 에스겔20:11-26; 22:8, 26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택함받은 백성이 안식일을 '존귀하고 즐거운 날'로 여기고, 이 날에 노동으로부터 모든 육체를 쉬게 하고, 야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로 지킬 때, 성도 자신은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얻을 것이요, 하나님은 불신 세상에서도 증거될 것이다.

 

인간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있다.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사야 59:1-8에서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몇 가지로 열거하고 있다. 우선 이스라엘의 죄는 개개인의 말과 행실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3절). 사회적으로도 정의와 공평은 찾아볼 수 없고, 거짓되고 허망한 말과 압제와 포악한 행동 뿐이다 (4-6절). 더 나아가서 그들의 생각하는 것이나 하는 짓이나 모두가 무고한 사람을 증오하고 망치고자 하는 것들 뿐이다 (7절). 근본적으로 그들은 평강과 공평이 무언지도 모르고 이미 그릇된 길에 들어선 것이다 (8절). 바울은 이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이런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로마서3:15-17).

 

선지자는 이런 백성의 일원으로서 비통한 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자신을 포함하여 자기 백성이 죄로 인하여 처한 상황을 묘사한다 (이사야59:9-15상). 자기가 속한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 또는 국가 등 어느 단체를 들어 그 죄악이나 불법을 경고하는 자는 자신도 그 단체의 일원임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선지자는 공평과 정의가 떠났다고 한다 (9, 14절). 그리하여 빛은 사라지고 어두움 뿐이라고 한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이든 그 안에 죄악과 불법이 들어와 도처에 만연할 때, 처음에는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하여 배를 채우는 듯 하지만, 결국은 그들 자신을 포함하여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에 따른 피해를 입게 된다. 이렇듯 혼동과 좌절 속에 빠진 민족을 대표하는 심정으로 선지자는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올린다 (12-15상반절).

 

하나님 앞에 죄인된 인간이 구원에 대하여 속수무책일 때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가 시작된다. 선지자 '이사야'의 이름 뜻('야웨가 구원하신다'는 뜻)이 보여주듯이,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야웨 하나님이 홀로 이루시는 것이다 (이사야59:15하-21). 16절의 '중재자'(히브리어로 '마프기아')는 이사야53:12의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개역)라는 문구중 미완료형 동사 '기도하다'('야프기아')와 같은 낱말로서, 여기서는 분사형으로서 명사적 용법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 점은 제53장에 언급된 '고난의 종'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바, '스스로 중재자역까지 행하시는 야웨'와 동일시됨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야웨의 구원은 그의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복수, 곧 열방의 심판을 수반하기도 한다 (17-18절). 야웨 하나님이 심판주가 되시어 '급히 흐르는 강처럼' 오실 때에 동서 사방의 만백성이 그의 이름과 영광을 두려워할 것이다 (19절). 그리고 그는 구속주(救贖主)로서 '시온', 곧 자기 백성에게 임하실 것이다 (20절). 여기서 말하는 '시온'은 과거의 '시온'이 아니라, '야곱 (자손) 가운데 자기 죄과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만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서는 메시야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교회'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하나님이 이들 자기 백성과 새롭게 세우시는 언약은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이 영원히 그들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2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