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사야서의 언약적해석

이사야52:13-53:12,고난의 종

호리홀리 2015. 2. 14. 21:52

고난의 종 (52:13-53:12)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골고다 고난'을 묘사한 시편 22편과 '그의 승리와 영광'을 노래한 시편 110편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52:13-53:12에 집중적으로 묘사된 '고난의 종'은 이사야49:7; 50:4-9에서도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한 특이한 인간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한 몸에 깊은 고난과 고귀한 영광을 공유하게 되는 존재이다.

 

고난의 종이 이방 가운데 형통할 것이다. 야웨의 종이 비인간적으로 고난받으신 후에 높이 들리시는 것을 보고 열방은 떨며, 열왕은 놀라서 입을 열지 못한다 (이사야52:13-15). 선택받은 유대인에 앞서 이방이 먼저 그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일에 대하여는 이미 49:7; 51:4-5; 52:10 등에도 암시되어 있다. 야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고난의 종을 멸시하고, 그의 장래에 관한 예언도 믿지 않았다. 그가 당하는 고난을 보고 우리는 도리어 그를 비웃었고, 그를 멸시하여 그에게서 고개마저 돌렸다 (이사야53:1-3).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곧 유대인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사야42:24; 64:1-12 참조). 이런 의미에서 1절은 요한12:37-38; 로마서10:16에 인용되었다. 이방은 예전에 들어본 일도 없는 복음을 듣고 쉽게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나, 이스라엘은 예전부터 들어온 일, 곧 야웨의 종이 누구며, 그의 사역이 무엇인가 하는 점과, 그의 고난과 영광에 대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자신의 불신으로 이방에게 쉽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길을 내어준 이스라엘은 (로마서11:25, 30-31 참조) 장래의 어느 시점에 가서는 결국 자기들이 거부한 바 고난의 종을 만나서 시정받고 그분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스가랴12:10; 로마서11:26 참조). 이때가 바로 이사야 53장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과거에 고난의 종을 멸시한 이스라엘이 이제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야웨께서는 각기 제 길을 따르며 하나님을 거스려온 우리의 죄를 그에게 지우셨다 (이사야53:4-6). 이 부분에서는 야웨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은 '야웨의 종'(='그')과, 조상 때문에 야웨의 선택을 받았으나 하나님을 거스려 '그'에게 고난을 지우게 한 또 다른 '야웨의 종', 곧 이스라엘(='우리')이 대조적이다. 6절은 유대인의 '디아스포라'(=귀양살이)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호세아3:4-5 참조).

 

이사야 53:7-9에서는 '야웨의 종'이 어떤 태도로 고난을 받으며, 어떻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어떻게 묻힐 것인지를 기술하고 있다. 그는 자발적으로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세로 고난을 받았으며 (마태26:36-46; 마가14:32-42; 누가22:39-46 참조), 자기 백성의 무지와 불신 가운데 죽으셨다 (누가23:34-35; 마태27:39-44; 마가15:29-32 참조). 그의 죽음에는 행악자들이 동행하였고 (마태27:38; 마가15:27; 누가23:33 참조), 그의 무덤은 부자와 함께 하였다 (마태27:57-61).

 

이사야53:10-12에서는 야웨의 종이 고난을 받은 후에 누릴 영광에 대하여 기술한다. 그는 야웨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다 (요한19:30 참조).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여 그를 따르는 후손이 무수할 것이며, 그의 통치는 영원할 것이다. 10절에 "그의 영혼이 속건제물(贖愆祭物)을 드린다(이를 "자기 목숨을 속건제물로 드린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음)고 하였는데,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수송아지, 수염소, 암염소, 비둘기 등 다양한 짐승을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속죄제와는 달리 (레위기4:1-5:13), '속건제물'(히브리어로  '아샴')을 드리는 자는 희생물을 자기 마음대로 택하지 못하고, 오직 '흠없는 수양'만을 제물로 드릴 수 있다 (레위기5:14-6:7). '흠없는 수양'과도 같은 '고난의 종'은 야웨의 뜻을 따라 '속건제물'이 되어 인간의 죄책(罪責)을 대신 진 것이다 (벧전1:19; 계시록5:6 참조).

 

참고적으로 11절 상반절에 있어서, 맛소라 성경의 "그가 자신의 수고로 인하여 ('메아말 나프쇼') 볼 것이요, 만족히 여길 것이다"에 의하면 고난의 종이 무엇을 보는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 구절을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고 번역함으로서, 이 애로점을 나름대로 해결해보고자 시도하였다. 쿰란에서 발견된 이사야 제1사본에는 이 구절이 "그가 자신의 수고로부터 빛을 볼 것이요, 그리고 만족히 여길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1호 동굴의 두 번째 이사야 사본과 4호 동굴에서 발견된 한 이사야 사본에서도 '빛을‘이라는 낱말을 포함하고 있다,

 

칠십인역 역시 '빛을'이라는 낱말을 포함하고 있으나 '본다'는 동사를 사역으로 이해하여, '주께서 그를 그의 혼의 수고로부터 빼내어 그에게 빛을 보여 주기를 원하신다'고 번역하였다.

 

이상의 사본학적 증거들을 통하여 맛소라 성경이 실수로 한 낱말을 빠뜨린 것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으나, 10절을 ('야웨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야웨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통하여 볼 때 11절에서 목적어로서 '그 씨'가 내포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사야서 저자는 11절에서 자연스럽게 목적어를 생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쿰란의 제1호 동굴에서 발견된 두 이사야서 두루마리나 칠십인역이나 모두 11절의 어려운 구문을 나름대로의 이해를 따라 본문 안에 주석적 요소를 삽입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고난의 종과 예수 그리스도

 

선지자 이사야는 구약 성경의 일반적 예언과는 판이하게 다른 한 인물의 고난에 대하여 소개한다. 이 인물이 당하는 고난의 독특함에 대하여는 이사야 제53장에 집중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49:7; 50:4-9; 52:13-53:12 등에 기록됨). 그의 이름도 족보도 언급함이 없이, 이사야는 그를 단지 '종' 또는 '야웨의 종'이라고 부를 뿐이다. 그는 몹시 심한 고난을 받았으며 인간들로부터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천시할 뿐이었다. 그러나 실상 그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지고 대신하여 고난을 받은 것이다. 그는 잠잠히 고난을 받았는데, 그의 고난으로 인하여 우리가 진정 평화를 누리고 고침을 받게 되었다. 그 자신 또한 고난받은 일로 인하여 결국은 만인의 숭배를 받게 될 것이며 많은 의인을 얻게 될 것이다.

 

오늘날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이사야 53장을 이스라엘 백성과 열방의 관계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선택받은 백성 곧 유대 민족이 열방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의 복음이 이방 세계까지 확장된 이후로 반기독교적 입장을 지키려는 유대인 랍비들이 고집하는 것으로서, 중세 이후 대부분 유대인 랍비들의 사상을 지배하는 해석으로 남아있다. 신약 성경을 필두로 하여 기독교도들이 이사야 53장을 예수님과 연관시켜 해석하는데 대립하여 유대교 랍비들은 이의 메시야적 해석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회당에서 이사야 52:13-53:12을 읽는 것마저 금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고대의 유대인 랍비들은 이 예언을 메시야와 연관시켜 해석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탈무드의 한 곳에서는 (T.B. Sanh., 94a)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의 종을 메시야로 이해하는 동시에 그를 히스기야왕과 관련시켰다. 그리고 요나탄의 아람어 타르굼에서는 이 '종'의 형통함을 메시야와 연관시키고, 고난받는 종은 이스라엘과 연관시키었다: "보라 나의 종 메시야가 형통하리라" (52:13의 타르굼); "그들(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오심을 고대하는 동안 그들의 양상은 열방 가운데 어두울 것이며, 그들의 영광은 사람들의 영광보다 못하리라" (52:14의 타르굼). 비록 이런 해석들에 미흡한 점이 있긴 하지만, 과거의 랍비들은 이사야 53장에서 메시야에 관한 메시지를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처음부터 이 예언의 의미를 깨달은 것 같지는 않다. 공생애 기간중 예수님은 몇 차례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언급하신 적이 있다.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기 공생애 후반기에 적어도 네 차례에 걸쳐 이 일을 예고하셨다: 1)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마태16:21-28 = 마가8:31-39 = 누가9:22-27); 2) 변화산을 내려오면서 (마태17:12 =마가9:9-13 = <약간 다르게> 누가9:44); 3) 갈릴리에서 (마태17:22-23 = 마가9:30-32); 4)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마태20:17-19 = 마가10:32-34 = 누가18:31-34).

 

이때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고 당치도 않은 일로 간주하거나 (마태 16장 베드로의 경우) 아니면 심히 근심하면서 실망감을 표시하였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메시야 곧 유대인의 왕을 기대하던 주후 1세기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고난받는 메시야"는 상상밖의 개념이었거나 아니면 받아들이기 거북한 일이었다. 화려한 메시야, 원수를 쫓아내고 온 천하를 호령하는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기대하던 그들로서는 비천하고 고난받는 메시야 개념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후 그의 제자들은 이 메시지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일컬어지는 베드로는 훗날 나이가 들어 쓴 편지 가운데서 (벧전 2:21-25) 이 예언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초대 교회 일곱 집사중의 하나인 빌립 또한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났을 때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사야 53장의 예언을 예수님과 연결시켰다. 그 경위를 누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950년전 에티오피아의 한 고관 내시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그곳서 유대인들이 섬기는 야웨 하나님을 경배한 후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민족적인 배경을 통해 볼 때 그가 유대인인지 아니면 이방인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비록 이방의 고관 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야웨 하나님을 섬기는 독실한 신자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사에 이르는 길을 지날 때 마차 안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다. 이때 빌립이라고 불리는 한 유대인이 그에게 접근한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령으로부터 '예루살렘에서 가사에 이르는 길까지 가라'는 지시를 받고 거기에 이른 것이다 (사도행전8:26-29).

 

에티오피아 내시는 마침 이사야의 예언을 소리내어 읽고 있었다. "당신 지금 읽고 있는 글을 이해하십니까?" 하고 빌립이 물었다. "가르쳐주는 이가 없는데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하고 내시가 대답하였다. 내시는 친절하게도 빌립을 마차 안에 올라앉으라고 청하였다. 빌립이 보니 내시가 읽고 있던 글은 이사야 53장이었다. 내시는 이 예언의 내용이 선지자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를 가리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빌립은 이 예언의 주인공이 바로 얼마 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유대인 예수라고 밝히면서, 그가 바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왕 메시야요,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구세주라고 가르쳐주었다 (사도행전8:30-39).

 

야웨 하나님은 본래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거의 독점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 곧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우리 이방 교회가 메시야로 믿는 예수를 인정하기는 커녕 그를 배신자로 또는 사깃군으로 간주한다. 왜 선택받은 민족이 그들의 왕 메시야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혹시 유대교의 한 이단을 믿는 것일까? 아니면 성경적 유대교의 원뿌리를 (원래 전통을) 우리 이방 교회가 이어가고 있는 것인가? 한편 유대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방 교회의 괴수' 예수에 대하여 고민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불쌍하게도 이방 기독교인들이 거짓 메시야를 추종하고 있다고 한다. 혹자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갈래로 보는 동시에 이방 기독교인들을 이등 유대인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사야의 예언을 통하여 '고난의 종'을 주의깊게 들여다보면 위의 물음에 대하여 속시원한 대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 예수는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의 심장이요 중심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어느 누구도 그를 피할 수 없으며, 반드시 그와 한바탕 생사간의 대결을 벌여야 한다. 예수, 그는 도전자로 오셨다. 그리고 그의 도전은 그의 고난과 영광을 통하여 선포된다.

 

지난 2,000년 동안 이방인들은 '고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의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려왔다. 같은 기간 동안에 대부분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심을 입은 이 '고난의 종'을 조롱하고 멸시하였다. 나는 이사야 53장의 메시지가 오늘날 누구보다도, 옛날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받았었던 이들 유대인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그 첫째 이유로는, 고난의 종이 보고 만족히 여길 '씨'는 이방인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으나, 유대인 가운데서도 역시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요, 그 둘째 이유로는 이 예언의 내용을 통해볼 때, 이방인의 복종이 있은 후에 유대인의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후에 야웨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니 그들이 나, 곧 그들이 찌른 자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스가랴12:10). 이 예언은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서, 장차 유대인들이 그들이 찌른 바 자기들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날이 반드시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