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임마누엘
주전 740년경, 택함받은 백성 이스라엘 자손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뉘어 있었다. 그 무렵 앗시리아가 점점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이 두 나라의 국운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사야 제7-12장 말씀은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주셔서 외치게 하신 예언과 경고와 위로의 말씀이다. 세상의 제국들은 늘 요란하지만 장차 '임마누엘'이라고 불리는 한 아들이 태어나 나라를 세울 것이다. 그의 왕국은 영원무궁할 것이며, 이방인, 선민 할 것 없이, 그에게로 돌아와 그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그는 '구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 임마누엘에 관하여 몇 단계에 걸쳐서 여러 각도로 소개하고 있다. 그중 이사야 제7-12장의 내용에 의하면, 임마누엘은 처녀의 몸에서 탄생할 것이요 (7:14), 영원한 권세를 받으실 것인데 (9:6-7), 그는 하나님의 성령에 충만하여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리실 것이다 (11:1-5).
유다왕 아하스
이사야 제7-12장은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왕 아하스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이 스물에 왕위에 올라 16년을 통치한 아하스의 재위 기간은 주전 744-728이 된다. 그는 부친이나 조부와는 달리 하나님을 멀리한 사람이다. 그는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야웨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다" (왕하16:3-4; 대하28:2-4).
한편 이 무렵 북쪽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앗시리아가 강성해지면서 점점 인근 국가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람과 이스라엘은 연합 작전을 펴서 그와 맞서고자 했고, 자기들의 연합 세력에 유다도 합류하기를 원하였으나, 유다는 이를 거절한다. 결국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왕 베가는 유다를 치기로 결의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다.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유다 침입은 이미 요담의 통치 말기부터 시작되었었다 (왕하15:37). 그러나 아하스 때의 상황은 전과는 아주 달랐다. 하나님은 아하스의 죄악을 눈감아주지 않으셨다.
"아람 왕 르신은 남쪽의 대상 무역 중심지 엘랏을 회복하여 아람에 돌리고 유다 사람을 엘랏에서 쫓아내었고, 그 대신 에돔 사람이 엘랏에 이르러 거하였다" (왕하16:6). 아람 왕은 "유다를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데려갔다. 또 이스라엘 왕 베가는 유다를 공격하여 크게 살륙하였는데, 하루 동안에 용사 십이만명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대하28:5-7). 이때 이스라엘 자손이 유다 사람 이십만명을 사로잡고 그 재물을 많이 노략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갔는데, 오뎃이라고 불리는 선지자와 몇몇 지도자의 반대로 결국 유다 포로들을 돌려주게 되었다. 이에 관한 자세한 기사는 역대하 28장 8-15절에 기록되어 있다. 아하스 때에 유다를 괴롭힌 것은 아람과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다. 에돔과 블레셋 또한 이런 기회를 틈타 유다를 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대하28:17-18). 이처럼 주변 국가들의 공격으로 유다는 오직 예루살렘만이 남아서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군에 간신히 대항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사야7:1; 왕하16:5).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한 유다는 앗시리아 왕에게 도움을 청한다 (대하28:16). 앗시리아 왕 디글랏 빌레셀 3세는 돕기는 커녕 도리어 유다를 쳐서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대하28:20). 할 수 없이 아하스는 성전과 왕궁과 대신들의 집에서 보물을 꺼내어 앗시리아 왕에게 바친다 (왕하16:7-8; 대하28:21). 이에 앗시리아 왕은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아람의 왕도 다메섹을 쳐서 취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가고 또 르신을 죽였다 (왕하16:9). 앗시리아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주전 734-732년 사이에 아람을 침공하였으며, 다메섹은 주전 732년에 완전히 함락되었다.
이때 북왕국 이스라엘 역시 디글랏 빌레셀 3세의 말발굽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국토의 3분의 2를 빼앗기고, 많은 백성은 사로잡혀 가게 되었다. 이 일로 베가의 통치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왕하15:29-30). 한편 유다왕 아하스는 앗시리아 왕에게 복속하고 조공을 바쳐야 했다. 따라서 유다의 역사가는 기록하기를, "보물을 취하여 앗시리아 왕에게 주었으나 유익이 없었다"고 하였다 (대하28:21).
이러한 역경 중에 아하스의 우상 숭배와 어리석음은 더욱 고조를 더해갔다. 앗시리아 왕을 만나러 다메섹에 간 아하스는 거기서 이방 신전의 제단 양식을 배워온다. 그리고는 그와 똑같은 제단을 만들어 예루살렘 성전에 설치하고는 아람의 신들에게 제사하였다. 원래의 성전 놋단을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는 이런 식으로 아람 열왕이 섬겨온 신들의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이었다 (대하28:22-25; 왕하16:10-18).
예루살렘의 위기와 이사야의 메시지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아하스와 싸울 때의 일이었다 (이사야7:1; 왕하16:5). 유다 왕 아하스는 주전 744-728 사이에, 이스라엘 왕 베가는 주전 751-731 사이에 통치하였으므로, 이 두 사람의 통치가 겹치는 기간은 주전 744-731년이 된다. 그리고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아람과 이스라엘을 침공한 때가 주전 734-732년이므로,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유다 침공은 다시 주전 744-734년 사이로 좁혀진다. 아하스와 유다 백성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떨고 있었다 (이사야7:2).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 이사야에게 임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가지고 이사야와 그의 아들 스알야숩이 아하스를 만난 곳은 윗못 근처였다 (이사야7:3).
"너는 정신 차리고 잠잠히 있어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한 민족이 되지 못하리라" (이사야7:4-8).
65년 안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더 이상 하나의 '민족'(히브리어로 '암')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구체적인 예언은 전체 예언의 진위를 가리는데 뚜렷한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예언은 주전 744-734년 사이의 것이므로,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하는 (왕하17:6) 주전 723년은 적합하지 않다. 그러면 이사야의 '65년'은 과연 어느 때를 가리킬까?
에스라4:2에 의하면, 유다가 포로에서 귀환했을 때 '유대인들을 대적한 원수들'은 앗시리아 왕 에살핫돈(주전 681-669년 사이에 통치)에 의하여 사마리아로 강제 이주되어 들어왔다. 그렇다면 열왕기하 17장 24절("앗시리아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의 사건은 주전 723년 사마리아가 멸망한 직후 앗시리아 왕 사르곤이 행한 일(왕하17:6; 18:11 참조)이라기 보다는, 그보다 훨씬 후인 에살핫돈 왕 때의 일을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자야말로, 에브라임 땅에 그나마 남아 있던 일부 북쪽 지파 사람들을 혼혈화시킨 (여기서 사마리아인이 나왔을 것이다)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으므로, 이사야의 '65년'을 성취시키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하겠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주전 744-734년과 주전 681-669년 사이의 최대폭은 75-53년이 된다. 그러므로 65년은 얼마든지 가능한 숫자가 된다. 이사야 7장의 침공은, 앗시리아의 역사 자료를 통하여 볼 때, 아마도 아하스 왕 통치 제10년이 되는 주전 734년이 될 것이다. 이때로부터 65년 되는 해는 주전 669년이므로, 열왕기하 17장 24절의 강제 이주는 바로 주전 669년 경에 있었을 것이다.
이사야가 전하는 메시지는 도무지 현실적으로 들리지가 않았다.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입으로 유다는 거의 전 국토가 초토화됐고, 하루 동안에 12만명이나 되는 대군이 살륙당했으며, 20만명이나 포로로 잡혀갔다가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아하스는 이사야의 희망적 메시지를 들으면서도, 선지자와 야웨 하나님을 의지하기는 커녕 도리어 마음 속으로는 엉뚱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앗시리아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아하스의 속 마음을 모르실 리가 없는 하나님은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는 경고의 말씀도 잊지 않으신다 (이사야7:9).
불신 세대에게 주는 징조
야웨께서는 이 악한 왕 아하스더러 무슨 징조든지 구하라고 하신다 (이사야7:10-11).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찬 그에게 신앙의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아하스는 여전히 야웨 하나님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약속보다는 자기 자신의 지혜를 더욱 신임하였다. "나는 구하지 않겠다. 나는 야웨를 시험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의 답변은 (이사야7:12) 마치 겸손한 신앙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 듯 하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기의 지혜를 더 의존하는 불신자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의 조소일 따름이었다. 그의 희망은 여전히 앗시리아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는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이사야7:13)며 꾸짖은 것이었다.
여기서 야웨께서 친히 주신 징조는 아주 독특한 것이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7:14). 이 예언은 사무엘하 제7장의 메시야 예언과 유사한 면이 있다. 다윗이 야웨를 위하여 전 짓기를 원하자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을 축복하시면서 그에게 태어날 아들에 관하여 약속하신다. 이 약속은 메시야와 솔로몬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야웨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삼하7:11-16).
이사야 제7장의 예언도 먼 훗날에 오실 메시야와 가까운 날에 성취될 일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먼저 이 아이는 가까운 미래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하나의 징조가 될 것이다. 이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아람과 이스라엘 두 나라의 백성은 사로잡혀 가서 그 땅이 버려지게 되고, 그 무렵에 이 아이는 버터와 꿀을 먹게 될 것이다 (이사야7:15-16). 주전 732년에는 앗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하여 다메섹이 무너지고, 주전 723년에는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에 의하여 사마리아가 무너진다.
유다마저도 앗시리아가 가져오는 재난을 피할 수는 없다 (이사야7:17). 그러나 아람이나 이스라엘과는 달리 그 황폐한 땅에 남은 자들은 그나마 버터와 꿀을 가지고 생계 유지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7:21-25은 이때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버터와 꿀은 비록 땅이 황무하게 되고 밭을 경작할 수 없어서 곡식이나 포도주는 얻을 수 없으나 그나마 온갖 잡초가 무성하여 소나 양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우유와 야생 채취도 가능한 들꿀일 것이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기거하면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 마태3: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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