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사야서의 언약적해석

이사야8장,야웨 하나님을 조용히 기다리겠다

호리홀리 2015. 2. 11. 22:16

사마리아가 함락되던 주전 723년은 유다 왕 히스기야 제6년이었다. 이 일이 있은지 약 8년 후 (히스기야 제14년), 곧 주전 715년에 있었던 앗시리아의 유다 침입은 거의 유다 전 국토를 초토화시켰고 예루살렘만이 덩그렁 남게 되었다 (왕하18:13-16). 이사야7:18의 '이집트 나일강 끝에 있는 파리'는 어쩌면 이때 앗시리아의 산헤립과 싸우고자 출정한 '구스 왕 (당시는 아직 왕자였다) 티르하카'를 (왕하19:8-9) 가리킬 것이다 (이집트 제25왕조의 왕들은 구스, 곧 에티오피아 왕들이었다).

 

이상 기술한 바, 앗시리아에 의한 아람과 이스라엘의 멸망, 그리고 유다 땅의 초토화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8:1-8에서 약간 달리 표현되어 있다. 이사야는 먼저 하나님의 명령대로 많은 사람이 분명히 볼 수 있도록 커다란 서판에 "속히 노략이 임한다. 약탈이 임박하다"라고 기록한다. 그리고 '그 여선지자'(틀림없이 이사야의 아내를 가리킬 것이다)와 동침하자 그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 이 아들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속히 노략이 임한다. 약탈이 임박하다"는 이름을 얻는다. 왜냐하면 이 아이가 "아빠, 엄마"라고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과 사마리아가 약탈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8:1-4).

 

이런 점에서 이사야7:14-16의 예언은 일단 "속히 노략이 임한다. 약탈이 임박하다"라고 불리는 이사야의 아들이 징조가 되어 성취될 것이다. 이사야7:14에서 '처녀'로 번역된 히브리어 '알마'는 구약 성경에 모두 7회 나타나는데 (창세기24:43; 출애굽기2:8; 잠언30:19; 시편68:25; 아가1:3; 6:8; 이사야7:14), '처녀'라는 뜻 말고 '젊은 여인'을 뜻할 수도 있다. 특별히 이사야7:14에서는 '알마'에 정관사가 붙어서 '그 처녀' 또는 '그 여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사야8:3의 '그 여선지자'는 7:14의 '그 여인'을, 그리고 거기 이사야의 아들은 7:14의 '아들'을 성취시켜 주는 첫번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와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주시는 징조요 예표였다 (이사야8:18). 이러한 사실은 이사야7:14의 예언을 훨씬 후에 있을 메시야의 처녀 탄생(마태1:22-23)과 연관시켜 주는데 전혀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앗시리아로부터 화를 당하는 주된 원인은 이 택함받은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실로아 물'을 거절하고, 이방 세력을 의지한 것이다 (이사야8:6). '실로아 물'은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 내지는 능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2:13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은 도리어 그들이 의지하는 열강, 곧 앗시리아를 끌어다가 그들을 벌하신다. 이 일로 이스라엘은 멸망의 재난을, 유다는 '목에까지 차는' 재난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백성의 구원의 소망은 오직 그 날개를 온 땅에 펼치는 임마누엘에게만 있다 (이사야8:7-8). 임마누엘로 인하여 (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열방들이 아무리 온갖 힘과 꾀를 낼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무너질 것이다 (이사야8:9-10).

 


 

예언의 말씀에 대한 반응

 

하나님의 반복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도 유다 백성도 하나님께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과 경시 풍조가 가득찬 세대에 사는 선지자 이사야를 향하여, 하나님은 "이 백성의 길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사야8:11). 이 백성은 '앗시리아와 같은 외세에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선지자 이사야를 공격하여 도리어 그를 '모반자'라고 한다 (우리 한글 역본은 이사야8:12 상반절을 그릇 번역하였다. 이 구절은 "이 백성은 모든 걸 가지고 '모반'이라고 말하지만, 너희는 '모반'이라고 말하지 말라"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아모스 역시 모반자라는 말을 들었다 (아모스7:10). 예레미야도 이와 비슷한 일로 감옥에 던져졌다 (예레미야38:1-6). 예수님 역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반역'이라는 죄목으로 고소당하였다 (요한19:12).

 

불신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선지자'는 얼마든지 '그 사회의 모반자' 또는 '사회의 독'이라고 매도당할 수 있다. 사도 바울도 이런 욕을 들어야만 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사도행전24:5).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로하시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다 (요한16:33).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실 분은 오직 야웨 하나님 뿐이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성소도 되지만, 그들에게 거치는 돌, 걸리는 바위도 된다 (이사야8:13-15). 택함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 오랜 역사 동안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들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비밀들이 그들에게 전해졌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자기 땅의 자기 백성에게로 오신 (히브리서1:1-2; 요한1:11) 메시야 마저도 지난 2,000년 동안에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이 예언의 말씀은 백성이 잘 깨닫지도, 믿지도 아니할 것이기에 차라리 소수의 믿는 자들 가운데 인봉해 둠이 적절하다. 이사야8:16은 두 개의 명령형 동사를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명하시는 말씀이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이사야의 기도로 이해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이 절은 "(너는) 내 제자들 가운데 증거의 말씀을 싸매고 가르침을 봉인하라"가 되고, 후자의 경우 "제 제자들 가운데 증거의 말씀을 싸매고 가르침을 봉인해 주십시오"가 된다. 그 다음 절과의 연결을 통해서 본다면 후자가 더 적합한 듯 하다. 다수의 무리가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거절한다면, 차라리 믿는 소수의 무리 가운데만 이 말씀을 봉인해 두고 백성이 깨닫기까지 기다리게 함이 더 낫다는 선지자의 바램인 것이다. 그리고 선지자 자신은 "야곱의 집으로부터 (정해진 기간 동안) 얼굴을 가리우시는" 야웨 하나님을 조용히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이사야8:17).

 

그러나 불신의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보다는 '죽은 자나 다름없는' 무당이나 신접한 자 또는 마술사를 더 의존한다. 누구든지 증거의 말씀과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아니하고 제 임의대로 말하는 자는 흑암 속으로 붸겨날 것이다 (이사야8: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