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소명
창조주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우리 피조계에 대하여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그의 계획 또는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직 시간(역사) 안에서 현실화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을 그 종 예언자들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신다 (아모스3:7). 이처럼 하나님의 뜻 또는 비밀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예언이요, 이런 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을 예언자 또는 선지자라고 부른다.
이사야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는 장면은 아주 장엄하고 진지하다. 그는 만군의 주 야웨로부터 당대에 뿐만 아니라 오늘을 거쳐 세상 끝날에 이르기까지도 유효한, 아주 엄청난 메시지를 받았다. 이제 그가 받은 메시지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의 소명에 관하여 자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다왕 웃시야
때는 유다 왕국의 웃시야 왕이 죽던 해, 다시 말해서 웃시야 왕이 아직 살아 있던 마지막 해였다. 이때가 바로 주전 748년이다. 아사랴라고도 불리는 웃시야는 십육세에 왕위에 올라, 주전 800년에서 748년에 이르기까지 52년 동안 유다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주전 759년에 그가 문둥병에 걸리고, 그때부터 그의 아들 요담이 대리 통치하였으므로 웃시야의 실제 통치 기간은 약 41년 가량이라고 볼 수 있다.
웃시야는 야웨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스가랴(스가랴서의 스가랴와는 다르다)라는 선지자의 교도를 받아 하나님을 구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데 전심전력하였다. 그 댓가로 하나님은 그의 길을 형통케 하셨다. 우선 웃시야는 유다의 남쪽 네겝 광야를 지나 남단의 엘롯을 요새화하고 그곳을 유다에 귀속시켰다. 엘롯은 비록 광야 끝에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홍해 변에 위치한 항구로서 남국의 대상들이 반드시 통과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대하26:1-5).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자손이 통과한 지점중의 하나이기도 한 (민수기33:35-36; 신명기2:8) 엘롯은 에시온게벨이라고도 하고 엘랏이라고도 한다. 솔로몬 왕(주전 986-945년 통치)은 이곳을 오빌과 아라비아로 출항하는 홍해 무역 선단의 거점으로 삼았다 (왕상9:26-28; 대하8:17-18). 모든 나라나 도시가 그러하듯이 엘롯 또한 그후 유다 왕국의 국운을 따라 사양길을 지나다가, 마침내 100년쯤 지나 여호사밧(주전 886-862년 통치)에 의하여 다시 주목을 받는다. 그는 북쪽의 이스라엘 왕과 협력하여 과거 솔로몬의 영화를 흉내내어 무역 선박들을 건조하여 에시온게벨에 배치한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배들이 부서짐으로써 막을 내리고 만다 (왕상22:48; 대하20:36-37).
유다왕 여호람(주전 863-856년 통치) 때 남동쪽에 위치한 에돔이 반역하여 유다의 지배를 벗어나고는 (왕하8:20-22) 엘롯을 점거한다. 그러다가 약 60년이 흐른 뒤 엘롯은 다시 웃시야에 의하여 유다로 귀속된 것이다. 이 일만 두고 보더라도, 웃시야는 유다를 강한 나라로 구축하였었음에 틀림없다.
이 일 이후 웃시야 시대의 번영과 평화에 대하여 역대기의 기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대하26:6-15).
웃시야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고 가드성과 야브네성과 아스돗성을 헐고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 가운데 성읍들을 건축하매, 하나님이 도우사 블레셋 사람과 구르바알에 거한 아라비아 사람과 마온 사람을 치게 하신지라. 암몬 사람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심히 강성하여 이름이 이집트 변방까지 퍼졌더라.
웃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성 모퉁이 문과 골짜기 문과 성굽이에 망대를 세워 견고하게 하고, 또 거친 땅에 망대를 세우고 물웅덩이를 많이 팠으니 평야와 평지에 육축을 많이 기름이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를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더라.
웃시야에게 또 싸우는 군사가 있으니 서기관 여이엘과 영장 마아세야의 조사한 수효대로 왕의 장관 하나냐의 수하에 속하여 떼를 지어 나가서 싸우는 자라. 족장의 총수가 이천 육백명이니 모두 큰 용사요, 그 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 오백명이라. 건장하고 싸움에 능하여 왕을 도와 대적을 치는 자며, 웃시야가 그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예비하고, 또 예루살렘에서 공교한 공장으로 기계를 창작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살과 큰 돌을 발하게 하였으니 그 이름이 원방에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더라.
누구든지 형통할 때 기뻐하며 (전도서7:14) 하나님과 사람 앞에 더욱 겸손하게 처신한다면, 그는 만인의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실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웃시야는 자기의 국운이 밝게 펼쳐지는 것을 보고는, 방자하게도 하나님의 종들, 곧 아론 집안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는 일까지도 넘보게 되었다. 자기의 번영과 그에 따른 위세를 믿고 그는 감히 야웨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고자 하였다. 웃시야의 거만한 행위에 하나님은 잠잠코 계시지 않았다. 웃시야를 문둥병으로 치신 것이다. 바로 주전 759년의 일이었다. 이 일은 성경의 역대하26:16-21에 기록되어 있다. 주후 제1세기의 유대인 요세푸스 역시 이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웃시야 왕 때의 지진도 (아모스1:1; 스가랴14:5) 이때 일어났다고 전해주고 있다 (요세푸스의 유대인 고대사 9권 10장 4절). 그 내용을 여기 옮기고자 한다.
그는 곧 사라져 버리고 말 것들을 풍부히 가진 일로 인하여 교만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지속되는 능력(이 힘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함과 그의 율법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을 무시하였다.....절기가 다가오자 웃시야는 거룩한 옷을 입고 성전에 들어가서 금제단 위에서 하나님께 분향하려고 하였다. 대제사장 아사랴는 80명의 제사장을 거느리고 웃시야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아론의 후손 외에는 그 누구도 분향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지 말고 성전 밖으로 나가라고 아우성을 치자 웃시야 왕은 화를 버럭 내면서 조용히 하지 않으면 그들을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더니 성전에 틈이 갈라지고 밝은 태양 광선이 그 사이로 들어와 왕의 얼굴을 덮쳤다. 즉시 그에게 문둥병이 발하기 시작했으며, 성 앞 엔로겔이라 불리는 곳에서는 산이 반쪽이 나서 서쪽 산이 4 펄롱(대략 800미터 가량)을 움직여 동쪽 산 있는 곳에 서게 되니 왕의 정원과 도로들이 심하게 망가졌다.
이사야의 초기 활동과 전환점
성경은 말하기를 (대하26:22), "웃시야의 시종 행적을 아모쯔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에 살며 비교적 쉽게 왕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신분의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나라의 번영과 그에 따른 왕의 오만함과 백성들의 타락한 생활상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충절 때문에 분노와 비탄에 잠겼을 것이다. 젊고 유능한 역사가로서 그는 비록 웃시야의 행적에 대한 회고적 역사는 기록하였으나, 아마도 아직 왕과 백성의 죄를 꾸짖는 포문은 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이사야는 생의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 일은 이사야 자신의 내적 각성이나 결의에 의한 것도 아니요, 주위 사람들이나 환경의 자극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이 일은 전적으로 '이사야가 섬기는 만왕의 왕'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신 야웨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공교롭게도 한때 유다의 번영과 영화를 상징했던 웃시야 시대의 막을 내리기 일보 직전, 곧 유다왕 웃시야가 죽던 해에 발생하였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는 인간의 번영과 그에 따른 온갖 향락, 부패, 그리고 죄악이 피어나면서 서서히 그 막을 연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점에 자기의 새로운 계획을 알리고자, 자기 백성의 죄악으로 마음 아파하는 이사야를 부르신 것이다.
야웨의 영광 앞에서
그분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다. 그의 겉옷 옷자락은 하늘 성전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앉아계신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 있었다. 스랍들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 있었는데, 둘로는 그분의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그분의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그들은 큰 소리를 내어 하나님을 찬미하는 말로 서로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웨시여!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도다." 우렁찬 노랫소리로 문지방 터가 흔들리고 하늘 성전은 연기로 가득찼다.
이사야는 잠들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멀쩡하게 깨어 있었다.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열어 우리 인간이 보통은 볼 수 없는 세계를 보게 하신 것이었다. 이로부터 약 800여년이 지나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인 요한은 밧모 섬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성령에 감동되어' 하늘로 올라가서 이런 모습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계시록4:1-2). "세째 하늘, 곧 낙원에 이끌려 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경험이 있다고 시사한 사도 바울 역시 어쩌면 이런 경험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고후12:1-4).
이사야는 그가 본 장엄한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하였다. 그가 기록한 이사야서를 보면, 이 사건이 그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심었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사야는 그가 남긴 책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틀림없이 이때 들은 스랍들의 찬미 소리가 그의 마음에 깊숙히 박혔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적으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는 표현은 성경 전체에 31회 나오는데, 그중에 이사야서에만 총 25회 출현한다 (1:4; 5:19,24; 10:20; 12:6; 17:7; 29:19; 30:11, 12, 15; 31:1; 37:23; 41:14, 16, 20; 43:3, 14; 45:11; 47:4; 48:17; 49:7; 54:5; 55:5; 60:9, 14). 나머지 6회의 경우는 시편71:22; 78:41; 89:19; 렘50:29; 51:5; 왕하19:22이다. '야곱의 거룩한 자'(29:23)와 '그(이스라엘)의 거룩한 자'(10:17; 49:7), 그리고 '너희들의 거룩한 자'(43:15)를 포함하면 이사야서에 나타난 횟수는 총 29회로 늘어난다.
이 놀랍고 위엄스런 광경에 이사야는 언어를 잃었다. 겨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의 언어를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야웨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자고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적으로 대면한 사람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시내산의 한 불붙는 나무 가운데 나타나신 야웨를 목격한 모세는 "하나님 보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다" (출애굽기3:6). "이집트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던" 모세도 (사도행전7:22) 이때 만은 야웨께 고하기를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입니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언어를 부정하였다 (출애굽기4:10).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 예레미야 역시 자기의 언어를 부정하면서 "슬프도소이다. 주 야웨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예레미야1:6). 한편 한 높은 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하신 것을 목격한 베드로는 '심히 무서워하여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하여',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정신없는 말을 내뱉었다.
제단 숯불로 입술을 지지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6:6-7).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스랍'이라는 이름은 이사야 6장에만 등장한다. 아마도 스랍은 에스겔과 사도 요한이 목격한 '네 생물'(에스겔1:5-25; 계시록4:6-9)과 동일하거나 또는 유사한 일종의 '하늘의 천사'일 것이다. 에스겔은 다른 곳에서 이 네 생물을 '그룹'이라고 부르고 있다 (에스겔10:1-22).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는 분"이시라고 묘사한다 (시편104:4). 그리고 에스겔이 본 "생물 곧 그룹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난다"고 하였다 (에스겔1:13).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읍 위에 흩뿌린 진노의 불은 "그룹들 사이에 있는 숯불"이었다 (에스겔10:2,6,7).
재미있는 것은 '스랍'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사르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사라프'와 동일한 어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에스겔이 본 그룹 사이에 있는 숯불이 하나님의 심판을 땅에 내리는 '진노의 불'이라면, 이사야가 목격한 스랍이 가져온 숯불은 사람의 죄와 악을 사하는 '사랑과 용서의 불'이라고 하겠다.
예레미야는 이사야와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하나님은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예레미야를 향하여 '그 손을 내밀어 그의 입에 대시며' 하시는 말씀이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하셨다 (예레미야1:9). 다니엘 또한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그의 입술을 만졌다'고 하였다 (다니엘10:16).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인간의 언어로 담기에는 너무나 순결하고 고귀하고 놀라운 것이기에, 하나님은 자기 선지자들을 불러 보내시기에 앞서 먼저 그들의 입술을 정결케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인간의 언어는 부인당하고, 오직 하나님의 생각과 언어로만 무장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동일한 자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지식'을 고백하여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다가, 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말을 입밖에 꺼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라는 책망을 들은 사람이다 (마태16:16-23). 이러한 쓰라린 경험이 베드로로 하여금 먼 훗날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고 권면하게끔 한 것 같다 (벧전4:11).
하나님의 부르심과 이사야의 응답
제단 숯불이 이사야의 입술에 닿기 전까지 이사야는 야웨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다. 다만 스랍들에 둘린 그의 모습을 보고 스랍들의 찬미 소리만 들었을 뿐이다. 이제 야웨께서 직접 이사야를 부르신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은 땅 위에 당신의 영광을 가득 채우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 뿐만 아니라 그분과 더불어 하늘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간절히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애가 타는 듯한 하나님의 부르심, 물론 하나님은 이미 이사야를 택하셨고, 그가 긍정적으로 대답할 것도 아신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소명'의 개념을 즐겨 사용하는 듯 하다. 소위 말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편만하다.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성경 문구가 바로 이때 이사야가 하나님께 대답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다. 이런 고백이 있기까지의 상황 배경은 별로 고려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지도 못하였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앞에서 자신의 더럽고 누추한 모습을 비춰보지도 못하였고, 그분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지도 못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부르심을 받은 바도 없는 많은 이들이 너무나 쉽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외치면서 자원하는 것이다.
물론 반드시 이사야나 예레미야, 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들이 경험한 바와 같은 특별한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과의 기본 관계가 성립된 사람, 삶을 통하여 어떤 종류의 경험이든지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그분을 올바르게 아는 사람이라면 단순한 감정으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자원적인 고백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이런 예를 성경을 통해서 아는 바가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을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처음에 자기 형제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다 (요한1:40-42). 어느날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올라 무리를 가르치신 후, 베드로더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신다. 이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히고 이러한 일을 목격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하기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통하여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경외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다시 불러 말씀하시기를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신 것이다 (누가5:1-11).
이사야가 전할 메시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했을 때의 일이다. 마침내 다윗을 따르는 무리와 압살롬을 따르는 무리의 대접전이 벌어진다. 다윗은 출전하는 장수들에게 자기를 생각하여 어린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압살롬의 자랑스런 머리카락이 나무가지에 걸리어 결국 압살롬은 요압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요압은 자기 왕의 부탁을 무시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의 죽음에 대하여 전혀 모른 채, 아무쪼록 자기도 이 희소식을 다윗에게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압에게 간청한다. 그러나 요압은, 압살롬을 죽인 일로 결코 다윗 왕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미 미천한 구스 사람을 전령으로 보냈고, "이 소식으로는 상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자기가 아끼는 아히마아스를 말린다 (삼하18:1-23).
어떤 소식은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 '수확하는 날의 얼음'과도 같겠지만 (잠언25:13), 어떤 소식은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고 마침내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진위 여부와는 아랑곳없이 듣는 사람의 귀를 간질이는 달콤한 메시지가 있는가 하면, 듣는 사람을 두렵게 하고 그의 분노를 살 수도 있는 '충직한 메시지'도 있다. 압살롬의 죽음에 관한 소식은 다윗왕의 분노를 살 수도 있는 메시지였다. 그래서 요압은 이 일로 아히마아스를 아끼고 대신 천한 구스 사람을 보낸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기 나라의 멸망에 관한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다. 그가 이 메시지를 전했을 때 그가 받은 것은 불신과 비난과 옥살이 등 온갖 고난이었다. 사랑하는 자기 민족의 멸망을 외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예레미야는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고 (예레미야9:1) 호소하였겠는가. 누가 이와 같은 메시지를 원하겠는가? 이 얼마나 슬픈 사명인가?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 역시 자기 백성에 대한 일종의 저주였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 못할 것이다.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 귀를 무겁게 하고, 그 눈을 덮으라. 그리하여 그들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고, 그 귀로는 듣지 못하고, 그 마음으로는 깨닫지 못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돌이켜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은 '내 백성'이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이 백성'이라고 부르신다. 이사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백성을 가리켜 '입술이 부정한 백성'이라고 불렀었다.
만일 우리가 전할 메시지가 이러한 내용이라면, 아마도 위에서 말한 바 자원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줄행랑을 칠지도 모른다. 선지자는 전할 메시지의 내용을 자기가 알아서 정하지 못한다. 자기의 생각에서 나오는 대로 메시지를 외치는 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듣는 대상만을 의식하여 그들의 귀를 부지런히 간질여주기만 하는 이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다. 돈을 받으면 단 말을, 못받으면 쓴 말을 뱉는 이 역시 사기꾼이다.
택함받은 백성의 참혹한 운명
이사야는 이처럼 예기치 못한 메시지를 듣고는 자기가 속한 민족을 위하여 걱정스런 마음으로,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묻는다. 이때 하나님의 대답은 가혹할 정도로 단호하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야웨께서 사람들을 멀리로 옮기고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엘라 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비교적 짧고 간단한 대답 같지만, 그 내용은 택함받은 백성 곧,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의 끝까지 겪어야 할 운명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마치 눈 멀고, 귀 먹고, 또 둔한 마음을 소유한 자와도 같이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듣고,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이처럼 둔해진 마음은 단시일 내에 밝아지지 아니할 것이다. 도시들이 다 폐허가 되고, 주민들은 도망하거나 죽임을 당하고, 집들은 주인을 잃고, 토지는 황무케 되며, 백성들이 먼 곳으로 포로되어 끌려가서 이스라엘 땅이 거의 초토화되기까지 이 민족의 이런 비극적 무지(無知) 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이 민족의 대부분이 망하고, 그중 십분의 일만 남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파멸에 이를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중 대략 열 지파가 연합하여 시작한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3년에 국가로서의 생명이 끊기었다. 유다 지파를 주축으로 하고 거기에 베냐민 지파가 합류한 유다 왕국은 주후 588년에 망하였다. 그후 페르시아가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코레쉬 왕의 칙령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지에서 고토로 돌아온다. 이때 유다 지파가 중심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이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자연스럽게 '유대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주전 6세기 곧 페르시아 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피로 물든 파란만장한 민족사를 보게 된다. 헬라 나라, 로마, 비잔틴 세력, 아랍 국가들, 십자군, 다시 아랍 세력, 터키 사람, 그리고 영국으로 이어지기까지 이스라엘 땅은 끊임없이 이방인의 발에 짓밟혀 왔다. 그동안 유대인, 곧 과거의 이스라엘 민족은 수없이 짓밟히고, 포로로 끌려가고, 죽임 당하였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유대인의 민족사적 비극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해준다. 그뿐인가. 유대인은 심지어 문명화와 과학화를 자랑하는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히틀러와 그를 추종하는 독일 나치 정권에 의하여 단시일 내에 600만을 잃었다. 그것도 우리가 다 아는대로, 너무나 처참한 방법으로. 이것이 택함받은 백성의 운명이었다면 본디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우리는 절대자의 냉혹한(?) 일처리 방법 앞에서 그만 입을 다물게 될 뿐이다.
유대인 자신들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이방인들도 '택함받은 백성' 곧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가혹한 취급에 대하여 의아해 하면서, 혹자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혹자는 그 해답을 찾고자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행한 사실은 이 일로 박수를 보내는 일부 이방인도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찾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
우리는 택함받은 백성에 대한 이제까지의 가혹한 처사 때문에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깊고 원대한 계획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엘라 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사야는 "남은 자"에 관하여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4:3; 6:13; 10:20-23; 37:32). 하나님은 반드시 과거에 택한 백성 이스라엘, 곧 오늘의 유대인을 다시 부흥시키신다. 그러나 오직 남은 자만이 이 영광에 들어올 것이다. 유대인이 이제까지 비록 오랫동안 그들의 왕 메시야 예수를 부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언젠가 그들은 반드시 자기들의 왕 예수께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것이다. 그들은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울 것이다" (이사야27:6).
지금으로부터 약 1900여년 전 바울 사도는 이상 언급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보면서,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라는 말로써 자기 민족 곧 유대인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밝히고 있다 (로마서11:1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약속은 절대자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이며, 그의 종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선포하신 말씀이기에 반드시 우리 인간의 어느 시간(역사) 안에서 성취될 대대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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