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사야서의 언약적해석

이사야4장,여호와의 싹

호리홀리 2015. 2. 11. 14:23

야웨의 싹과 그의 백성

 

하나님은 심판을 즐겨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악인을 골라내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심판으로만 끝나는, 또는 심판만을 위한 심판은 있을 수 없다. '주께서 심판의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에서 무고히 흘린 피를 청결케 하시면' (4:4),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그 날에 '야웨의 싹'은 영광과 존영 그 자체로 화한다. 이스라엘 안에 살아남은 자들에게 '그 땅의 열매'는 자랑거리와 명예가 된다" (4:2). 여기서 '야웨의 싹'과 '그 땅의 열매'는 대구(對句)를 이루어 결국 같은 존재를 가리키고 있다. '싹'은 히브리어로 '쩨마흐'라고 한다. 이 낱말이 여기서처럼 특별하게 쓰인 경우로는 슥3:8(내가 내 종 순을 나게하리라); 슥6:12(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야웨의 전을 건축하리라); 렘23:5(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렘33:15(그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를 들 수 있다.

 

이상 언급한 구절들에서 '쩨마흐'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속에서 중요하게 사용될 특별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 비유적 표현은 이사야11:1의 '호테르'(역시 '싹'으로 번역)와 '네쩨르'('가지'로 번역), 및 이사야53:2의 '요네크'('연한 순'으로 번역)와 '쇼레쉬'('싹' 또는 '줄기'로 번역)와 맥락을 같이 하여, 모두가 메시야되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 땅의 열매' 또한 같은 의미를 갖게 되어 '메시야'를 가리킨다. 그는 '야웨'로부터 오신 분이요 (로마서1:4; 누가3:38 참조), 동시에 '이스라엘 땅'에서 나오셨다 (로마서1:3; 누가3:23 참조).

 

메시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 지난 2,000년이라는 세월 가운데 '야웨의 싹'은 실제로 열방 가운데 '영광과 존영 그 자체'였다. 그는 지상에 '자기의 몸'되는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를 통하여 무한한 영광을 받으셨다. 이제 '이스라엘 땅의 열매' 되신 메시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지나 , 그 땅에 모인 백성(유대인)들에게로 향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땅의 열매'는 그들에게도 '자랑거리와 명예'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온에 남아있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은, 열방중 택함 받은 자들과 더불어, 누구나 다 믿고 '성도'라고 (또는, '거룩하다'고) 불릴 것이다 (4:3; 사도행전13:48 참조). 과거에 예루살렘의 상류층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나 풍부한 재력에 의하여 남들과 구별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제 메시야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때에는 '거룩한 자' 곧 '성도'라는 명칭이 가장 명예스런 이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저들을 보호하셨던 것처럼 (출애굽기13:22; 민수기14:14), 장차 임할 그 날에도 "야웨께서는 그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닫집을 덮으실 것이며, 또 천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될 것이다" (4:5-6). 사도 요한 역시 이와 비슷한 묘사를 하고 있다 (계시록7:15-17).

 

여기 '닫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후파'는 오늘날도 유대인들이 결혼식 때 사용하는 넓은 천으로, 이 후파의 네 모퉁이를 장대에 매어 네 사람이 높이 받쳐들고 그 안에는 신랑 신부가 함께 서서 혼례가 진행된다. 신랑 신부는 이 후파 아래서 성혼 축복을 받는다. 이 날은 또한 마치 아름답게 단장한 신부와도 같은 성도가 신랑되신 예수님을 맞아 혼례를 올리는 날이기도 할 것이다 (계시록21:1-4 참조).

 

여기서 묘사하는 예루살렘은 도대체 무슨 예루살렘인가?

과거에 선택받은 백성 곧 유대인들에게 현실적으로 임할 '마지막 영광'을 함께 누릴 지상의 예루살렘인가 (이에 대하여는 계시록 11장을 참조할 것), 아니면 계시록 21장에 묘사된 바 새 하늘과 새 땅에 있게 될 새 예루살렘인가? 그 해답은 "둘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 이후에 있을 예루살렘의 영원한 영광을 묘사하고자 한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지상에서의 영광과 천상에서의 영광을 하나로 묶어 언급한 것이다 (카일 & 델리취의 주석).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별해 내고자 심판을 행하신다 (마태13:47-50 참조). 그러므로 심판의 메시지가 있는 곳에 반드시 구원의 메시지가 따른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에게 겁주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를 원하신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은 언뜻 보기에는 무서운 심판 이야기로만 가득 차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당시 (그리고 장래에도) 고난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힘과 소망을 주고자 기록된 말씀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