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사야서의 언약적해석

이사야서,제1장/하나님의 간청

호리홀리 2015. 2. 11. 14:05

제1장/하나님의 간청

 


 

제1장은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에 대한 엄중한 책망과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간절한 호소로 이루어져 있다.

 


 

1) 역사적배경

 

여로보암 2세(주전 800-760년 통치; 왕하14:23-29 참조)는 예후 왕조의 제4대 통치자이다.

그의 통치 기간에 이스라엘은 황금기를 누렸는데, 각종 사회적 병폐는 아모스서와 호세아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때 앗시리아는 자국의 문제들로 골치를 썩고 있어서 이스라엘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였다.

 

주전 763년은 앗시리아의 불-사갈레(Bur-Sagale) 왕 때 일식(아모스8;9-10 참조)이 있던 해로 요나의 니느웨 예언 활동이 있었을 것이다. 주전 763-761년 사이에 여로보암 2세는 선지자 요나의 예언대로 북쪽의 영토를 회복한다 (왕하14:25-27).

 

스가랴(주전 761-760년; 왕하15:8-12 참조)는 악한 왕으로서, 여섯달의 통치 후에 살해당하고 만다.

그의 죽음으로 다섯 대에 걸친 예후 왕조의 통치는 막을 내린다.

스가랴를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한 살룸(주전 761-760년; 왕하15:13-15 참조)은 자신도 역시 한 달 만에 므나헴에 의하여 살해되고 만다.

 

므나헴(주전 761-751년 통치; 왕하15:16-22 참조) 역시 악한 통치자였다.

주전 755년 앗시리아 왕 불이 쳐들어오자, 므나헴은 부자들에게서 재물을 뜯어내어 그것을 앗시리아 왕에게 주어 돌아가게 한다.

 이 무렵 앗시리아 세력의 신장으로 근동의 주변 소국들은 점차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의 아들 브가히야(주전 752-750년; 왕하15:23-26 참조) 역시 악한 왕이었다.

 그는 앗시리아에 복속하여 자기 백성에게 중한 세금을 과하였으므로 백성의 원성을 사게 되었고, 결국 베가의 반역을 만나게 된다.

 베가의 반역으로 2대에 걸친 므나헴 왕조는 막을 내린다.

 

베가(주전 751-731년 통치; 왕하15:27-31 참조)의 통치 때, 남쪽의 유다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다.

다메섹에서 다스린 르신 왕의 등장으로 아람은 다시 부상하여, 이스라엘과 손잡고 유다를 위협하여 반(反)앗시리아 동맹에 참여케 하려고 하였다.

공포에 질린 유다의 아하스는 이사야의 예언을 무시하고 앗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앗시리아 왕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유다와 암몬과 에돔과 모압에게 조공을 부과하고, 이스라엘의 갈릴리와 길르앗을 점령하여 백성을 사로잡아 간다 (주전 734-732년).

다메섹은 주전 732년에 완전히 함락되고 만다.

베가 역시 호세아의 반역의 칼에 최후를 마친다.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26:52)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말년의 대부분 이스라엘 왕들은 칼로 나라를 취하고 자기 또한 반역의 칼에 맞아 죽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최후 통치자 호세아는 주전 732-723 사이에 재위하였다 (왕하17:1-41 참조).

 주전 727년 앗시리아 왕 살만에셀이 침공하자, 호세아는 그에게 신복하고 조공을 바친다.

얼마가 지나서 호세아는 이집트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내통하고는, 앗시리아를 배반하여 그에게 더 이상 조공을 보내지 않는다.

호세아의 반역은 앗시리아 왕의 진노를 불러 일으켜 결국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하고 만다 (주전 723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호세아 구년에 앗시리아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시리아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사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야웨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야웨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의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왕하17:6-8).

 


 

2) 남왕국 유다의 동향

 

웃시야, 요담, 아하스 시대는 바로 뒤따르는 장들에서 살펴볼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 통치 연대와 참고 구절만을 밝히고자 한다: 웃시야=아사랴 (주전 800-748년, 왕하15:1-7; 대하26:1-23); 요담 (주전 759-743년, 왕하15:32-36; 대하27:1-9); 아하스 (주전 744-728년, 왕하16:1-20; 대하28:1-27).

그 다음 왕인 히스기야는 주전 729-699년 사이에 통치하였다.

히스기야에 대하여도 역시 뒤에 가서 자세히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에 대한 소개를 생략하고자 한다. 다만 그의 재위 기간 중 앗시리아의 침입으로 큰 곤경에 빠졌다는 사실만을 여기서 밝히는 바이다.

 

이들 네 왕이 다스리는 동안 남 왕국 유다 역시 동시대의 북 왕국 이스라엘과 거의 비슷한 운명을 맞는다.

웃시야와 요담의 통치 기간을 통하여 유다는 대외적으로 진출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나, 백성의 종교 및 도덕적 수준은 점점 하락하고 있었다.

 아하스와 히스기야의 재위 기간 중 유다는 앗시리아의 대외 진출에 밀려 점점 궁세에 몰리게 된다.

 이때 북왕국은 멸망하고, 남 왕국 유다는 거의 멸망의 위기에까지 이르게 되나 간신히 구원을 받는다.

 백성의 타락은 이때도 여전하였다.

 

유다는 히스기야 이후 약 110년을 더 견디다가 멸망하게 되는데, 참고적으로 이 기간 중에 유다를 다스린 왕들은 다음과 같다: 므낫세 (주전 699-644년), 아몬 (주전 644-642년), 요시야 (주전 642-610년), 여호아하스 (주전 610년), 여호야김 (주전 610-599년), 여호야긴 (주전 599-598년), 시드기야 (주전 598-588년).

 


 

예언 속에 사는 언약백성

 

일찍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은 오래 전부터 예고되어 왔다.

야곱 곧 이스라엘이 자기 후손의 장래 일을 미리 말하였고 (창세기 49장), 이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율법)을 전해준 모세도 지금으로부터 약 3400여년 전에 이 민족의 운명을 노래로 적어 당시의 백성들에게 읽어 들려주었다. '들으라 노래'라고도 불리는 이 노래는 신명기 32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 지어다. 그들이 야웨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우매무지한 백성아 야웨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 야웨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케한 연고로다 (신명기32:1-19).

 

이사야 제1장에 기록된 말씀은 형식으로 보나, 표현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신명기 32장의 예언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신명기 32장의 '들으라 노래'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종 역사를 예언한 것으로서, 이사야 뿐만 아니라 역대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메시지 안에도 반영되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부지런히 그것을 고찰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에 대하여 그 마지막까지도 예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불러 (신명기32:1; 4:26; 30:19; 31:28; 시편50:4 참조) '야웨를 거스리는 백성'을 고발한다 (이사야1:2). 자기를 기르고 키워 주신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을 버리는 일은 미천한 동물 세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한다 (이사야1:2-3).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한 마디로 요약해주고 있다. 이 죄는 다시 몇 가지로 열거되고 (3-4절), 상처 투성이의 인간으로 비유되었으며 (5-6절), 더 나아가서 그 죄에 대한 댓가로서 당대의 시대적 형벌이 묘사되어 있다 (7-9절).

 

이 마지막 부분(이사야1:7-9)은 유다의 거의 전 국토가 이방인에 의하여 삼키우고, 수도 예루살렘만 겨우 남아 위기에 처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장래 일에 대한 예언이라기 보다는 이사야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기술하는 말씀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때의 일인가?

히스기야 재위 14년, 곧 주전 715년에 예루살렘과 유다는 앗시리아 왕 산헤립의 침공을 받아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왕하18:13-27). 히스기야의 부친 아하스 때에도 유다는 주변 국가들(아람, 이스라엘, 블레셋, 에돔)의 공격을 받아, 오직 예루살렘만이 남아서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군에 간신히 대항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사야7:1; 왕하16:5-6; 대하28:5-21). 유다 왕 히스기야는 그 부친 아하스와는 달리 하나님을 섬긴 경건한 왕이었다. 게다가 히스기야 제14년 때의 위기는 이사야 36-37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사야1:7-9의 묘사는 아하스 때의 일이 아닌가 한다.

 

7절에 "파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낱말 '마흐페카'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모두 6회 나오는데, 항상 소돔과고모라의 멸망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신명기29:23; 이사야13:19; 예레미야49:18; 50:40; 아모스4:11). 그만큼 당시 유다의 위기는 심각한 문제였었다. 그나마 예루살렘이라도 남아 소돔과고모라의 운명을 면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스라엘의 헤브론 산지와 예루살렘 산지,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의 포도밭 안에는 밭에서 골라낸 돌로 쌓아 만든 노천 막사들이 흔히 눈에 띈다. 이들 돌막사들의 위에는 보통 지붕과 벽을 나무가지나 솎아쳐낸 포도 나무 가지로 덮은 초막이 세워져 있다. 농사철 특히 포도를 따는 시기에는 때때로 온 가족이 초막으로 옮겨와 거주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초막은 완전히 집의 역할을 대행하게 된다. 포도가 익어가는 철에 포도원을 지키는 일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 보다 효과적인 감시를 위하여 포도원 지기는 높은 지점을 필요로 한다. 성경 시대에는 노천 막사 위의 초막이 이러한 감시장소로 사용되었다.

 이사야 5장의 포도원 비유에서 이것은 '망대'라고 불렸다. 포도 수확을 마침과 더불어 포도원에서는 농부들이 떠나고, 포도 나무 가지에서는 그 잎들이 떨어져서 포도원과 그 안에 우뚝 서 있는 초막은 황량한 모습으로 남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광경을 비유로 하여 유다의 재난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다: "딸 시온은 포도원의 초막 같이, 원두밭의 막사 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이사야1:8).

 


 

위선적이고 생명 없는 종교 

 

이제 선지자는 하나님을 거역한 이 백성을 아예 소돔과고모라의 백성과 동일시한다. 그리고는 처음 (2절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들으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면서 (이사야1:10) 이 민족을 책망한다. 이사야1:10-15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은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이들의 죄악은 한 마디로, 종교인으로서는 각종 종교 행사나 활동에 열심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한 인간으로서 동료 인간과의 관계를 선과 의로 맺지 아니하고 악과 불의로 맺고 있다는 점이다.

 

화목제, 번제, 소제 등 각종 예물이나 절기 및 기도 등 종교적 활동 내지 행위는 모두가 하나님이 요구하셨고 또 원하시는 것들이다. 하나님이 이것들을 명하신 목적은 택하신 백성을 믿지 않는 이방인과 구별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고자 함이었다 (레위기19:2). 그러나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은 표면적인 종교 활동에만 지나치게 열심을 내는 나머지 결국 그 목적을 상실한 채 위선적인 종교인으로 타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타락이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열성적인 교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여기 본문에서 보는대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도 있다. 하나님은 악인이나 또는 선을 행치 않는 자의 열성적인 종교 활동을 축복하기는 커녕 오히려 저주하신다. 그분은 위선적이고 생명 없는 종교 활동 보다는 차라리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가슴', '겸손히 순종하는 손과 발'을 훨씬 더 기뻐하신다 (삼상15:22-23 ; 잠언15:8; 21:27; 28:9; 전도서5:1 참조).

 

12절의 '야웨 앞에 보이러 온다'는 표현은 본래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세 차례 있는 큰 명절 때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할 경우 사용되다가 (출애굽기23:14-17; 34:23; 신명기16:16), 점차 예배를 위한 일반적인 성전 방문에까지 사용되었다 (시편42:3; 84:7). 하나님을 본다고 말하는 것을 피하고자 고의로 수동형 동사로 바꾸었는데, 그 이유인즉 하나님을 보는 자마다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들 위선적인 종교인들에게 먼저 악을 제하고 의로운 행실을 보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사야1:16-17).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5:23-24)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여기 이사야 본문의 말씀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위선적인 종교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피할 수는 없다. 야웨 하나님은 더러운 속을 그럴듯한 껍데기로 위장한 이 백성을 향하여 간곡히 권면하신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이사야1:18). 이와 같은 하나님의 간절한 초청에 순순히 응하는 자에게는 '땅의 좋은 소산을 먹는' 복이 임하겠지만, 거절하여 거스리는 자는 자신이 '칼에게 먹히는'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사야1:19-20).

 


 

 정화(淨化) 를 통한 회복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절, 예루살렘은 '신실하고, 그 안에 공평과 의리가 충만하던' 성읍이었다 (이사야1:21).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때의 예루살렘과 그 안에 있는 성전을 여러가지 말로 찬양하였다. 그중에 하나 잘 알려진 시편을 보자.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야웨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야웨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야웨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시편122:1-9).

 

이처럼 아름답던 성읍에 야웨의 전은 여전히 서 있고 그 안에서의 종교 활동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도덕 상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낳은 사랑하는 친자식도 때로는 원수처럼 미워지는 일이 있듯이, 하나님은 이들을 가리켜 '원수'라고 부르시면서 그들의 악한 행위에 대한 보복을 선언하신다 (이사야1:24). 그러나 이 '보복'은 '원수'를 멸하기 위한 재앙이 아니라, 사실상 자식의 잘못을 고쳐서 좋은 자식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매질'이요, 마치 광석에서 불순물을 제하고 순 금속만을 얻어내는 용광로의 제련 작업과도 같은 것이다 (이사야1:25-26).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반드시 본래 택하신 목적대로 회복시키신다.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이든 아니면 오늘날의 유대인이든, 이들 택한 백성에게 있어서 타락과 심판과 구원이라는 역사적 고리는 수없이 자주 지속되어 왔다. 메시야 예수께서 지상에 오신지 약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과거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아직도 자기들의 왕 메시야를 거절하고 있음을 본다. 그들이 이제까지 보여준 '역사의 고리'를 통해서 보건대, 그들은 반드시 쓰라린 정화 작업을 거쳐 다시 깨끗한 백성으로 나오게 될 날이 있다. 그러나 이 정화 작업에서 제거되어야만 하는 '찌끼'가 있는데, 이는 바로 살아계신 야웨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우상을 섬기는 모든 이들인 것이다 (이사야1:27-31).

 

반역과 심판 후에 있을 이 백성의 마지막 구원에 대하여는 이미 오래 전에 '들으라 노래'에서 모세도 언급한 바 있다: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 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신명기32:43).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맺은 언약은 영원한 것이기에, 결코 이 언약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이다. 모세는 이 언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그런즉 그들이 대적의 땅에 거할 때에 내가 싫어 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며 아주 멸하지 아니하여 나의 그들과 세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야웨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열방의 목전에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낸 그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야웨니라 (레위기26:42-45).

 

그러므로 이사야와 동시대에 살았던 선지자 미가도 언약에 성실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눈물겨운 언약적 자비를 호소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미가7: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