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사야서의 언약적해석

이사야,제2장/메시아시대의 회복

호리홀리 2015. 2. 11. 14:13

제2장/메시아시대의 회복

 


 

야웨 하나님이 택한 백성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을 보이시는가?

 하나님이 당신 백성을 향하여 품으신 불만은 무엇이며, 그분은 그 불만을 어떻게 표현하시는가?

 이사야 제2-5장은 아마도 웃시야와 그의 아들 요담이 유다를 통치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당신 백성을 향하여 품으신 불만과 그에 따른 심판, 그리고 장차 있을 이스라엘의 참된 영광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마치 '책망과 심판'이라는 침침한 그늘이 이사야 제2-5장에 점철되어 있는 듯 하지만, 실상 이 부분은 그 맨 처음(2:2-4)에 희망과 위로를 가득 담은 아름다운 약속의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중간 부분(4:2-6)에서도 그 약속을 잊지 않았다는 표시라도 하듯이, 다시 메시야와 관련된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 준다.

 


 

유다왕 요담

 

먼저 시대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주전 759년, 그의 부친 웃시야가 문둥병에 걸려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요담은 나이 이십 오세에 유다를 다스리기 시작하여, 주전 743년에 죽기까지 16년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친 웃시야가 주전 748년에 죽었으니, 그는 약 5년간만을 홀로 다스린 셈이다. 요담은 대체로, 그의 부친처럼 '야웨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 그의 부친이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려다 당한 일(지진과 문둥병)은 요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그는 평생에 '야웨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백성은 여전히 사악을 행하였다.

웃시야 왕 때의 국가적 번영과 더불어 이미 시작된 이 종교 및 도덕적 부패는 점점 더 강한 힘으로 사회 전체에 침투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고 분향하였다.

 

요담은 부친을 이어 국력 강화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야웨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성전이 위치한 모리아 산(대하3:1)의 남쪽 비탈에 땅을 돋우어 만든 오펠 지역 안에 (대하33:14) 집을 많이 건축하였다. 오펠 지역 역시 '시온 산성'이라고도 불리는 '다윗 성'과 성전이 위치한 모리아 산과 더불어 견고한 성벽에 둘리어 있었다. 예루살렘의 이 세 지역을 두르는 성벽은, 이미 웃시야가 망대들을 건축하여 견고히 구축하였었다 (대하26:9).

 

요담은 이처럼 성전과 예루살렘을 견고히 하는 일 외에도, 유다 산지에 사는 주민들을 위하여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여 그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요담은 암몬 왕과 싸워 이겨 다시 암몬 자손으로부터 3년 동안 조공을 받아냈다. 본래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쳤던 암몬 자손은 아마도 주전 748년에 웃시야가 죽자 유다를 반역하고 조공 관계를 청산했던다. 이에 요담은 신속히 그들을 공격하여 다시 조공을 받아낸 것이다. 그러나 요담의 죽음에 즈음하여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유다를 침입하기 시작하자, 암몬 자손은 이 기회를 틈타 다시 유다의 멍에를 벗어난 것이다 (이상 왕하15:32-36; 대하27:1-9 참조).

 

국가적 번영이 반드시 그 나라의 영적 수준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도, 영적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서 반드시 그의 건강이나 경제 및 사회적 상황 등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유다 왕국은 웃시야와 요담의 통치기에 어느 정도 국가적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켜 조공을 받아내고, 대상 무역의 거점을 확보하여 국고 수입을 늘렸다. 내부적으로는 수도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요새화했을 뿐만 아니라, 지방 산지의 주민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농업 활동을 육성해주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번영기에 살았던 유다 백성의 영적 상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악을 행하는 백성'으로 나타났다 (대하27:2). 바로 이 무렵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다를 향하여 그들의 죄악을 적나라하게 꾸짖으며,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며, 그러면서도 장차 있을 회복과 영광에 대하여 선포한 선지자가 바로 미가와 이사야 였다.

 


 

미래의 영광에 대한 약속

 

이사야 제2-5장에 기록된 메시지는 웃시야와 요담이 통치하던 때의 유다와 예루살렘을 겨냥하고 있다. 그는 앞서 언급한 대로 외적 부유는 모두 갖추었으나 창조주 하나님은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세대를 향하여 책망과 경고의 맹렬한 포문을 연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그러한 이사야의 메시지가 책망이나 경고 보다는 아름다운 약속으로 시작된다는 점이다 (이사야2:2-4).

 

말일에 야웨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야웨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야웨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는 아마도 이 아름다운 메시지를 동시대의 선지자 미가(4:1-5)로부터도 들었을 것이다. 이사야는 이제 자기 민족의 죄악과 그에 따른 형벌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들이 너무 저상(沮喪)할까봐, 먼저 마지막 날에 임할 예루살렘의 영광을 그들에게 전해준다.

 

'말일'은 히브리어 '아하리트 하야밈'을 번역한 것이다. 이 히브리어 표현은 구약 성경에 모두 13회 나타난다 (창49:1; 민24:14; 신4:30; 31:29; 사2:2; 렘23:20; 30:24; 48:47; 49:39; 겔38:16; 단10:14; 호3:5; 미4:1). 이 표현은 말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멀리 떨어진 시점'을 의미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그 시기가 달라질 수 있다. 여기서는 미4:1; 신4:30; 31:29; 렘23:20; 30:24; 겔38:16; 단10:14; 호3:5에서 사용된 것처럼, 그 문자적 의미 그대로의 '마지막 때'를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아하리트 하야밈'은 메시야되신 예수님의 초림에서 시작하여 역사의 종말까지 계속된다고 볼 수 있다 (히브리서1:2; 벧전1:20 참조).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하셨다 (요한4:22). 과연 메시야 예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유대인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거기서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 처음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요, 복음을 기록하고 전하기 시작한 이들 또한 거의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었던 곳은 예루살렘이다. 시날 평지의 바벨이 세계 모든 종족 분산의 출발점이었다면,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 성령 강림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모이는 하나의 '통로적 출발점'이라고 하겠다.

 

미가나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이 이 메시지를 외치던 주전 8세기, 지구상에는 '야곱의 하나님'을 아는 이들이 극소수였다. 이방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스라엘 백성들 조차도 그를 믿지 아니하고 거절하던 그 때에 이러한 메시지는 과연 얼마나 호소력이 있었을까? 아마도 많은 유다 백성들은 "말도 되지 않는다"면서 이들 선지자들을 비웃고 배척하였을 것이다. 아니, 사실 그러하였다.

 

시내산에서 선포된 율법은 한 민족 이스라엘을 지상의 모든 종족으로부터 구별하였다. 그 날 시내산에는, 그곳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장엄한 장면이 펼쳐졌었다 (출애굽기 19장). 그러나 시내산의 영광도 시온 곧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그리스도 복음의 영광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하였다 (갈라디아서4:21-31 참조).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군사력에 의존하는 모든 열강과는 달리, 사랑의 법으로 다스리신다. 그야말로 '말일'이 되면 모든 열강의 통치 수단은 완전히 깨어지고, 오직 왕 메시야의 통치만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요,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미래의 영광에 대한 이러한 약속 때문에 선지자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야웨의 빛에 행하자"고 간곡히 권한다.

 


 

백성의 죄악과 그에 따른 심판

 

이사야 2:6-4:1은 그 내용에 의하여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2:6-22에서는 장차 임할 심판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기술하며, 3:1-15에서는 특별히 지배층을 향하여, 그리고 3:16-4:1에서는 예루살렘 여자들을 향하여 외치는 말씀이 담겨 있다.

 

먼저 2:6-22에는 각각 두 차례 씩 반복되는 두 종류의 후렴구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다시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가) 6-11절, (나) 12-17절, (다) 18-19절, (라) 20-21절. 이 반복되는 후렴구는 각 부분의 맨 끝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앞의 두 부분에서는 (11, 17절)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야웨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요, 뒤의 두 부분에서는 (19, 21절)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야웨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이다. 어떤 피조물이든 창조주이신 당신 앞에서 스스로 높아지는 것을 미워하시는 '질투의 하나님'은 종국에 가서는 모든 높아진 것을 쳐내리시고 홀로 높아지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가) 6-11절: 웃시야와 요담의 통치하에 일시적으로나마 황금기를 누리던 유다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주 미련하고도 어이없는 죄악을 범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복속시킨 나라들(동방과 블레셋)의 좋지 못한 풍속을 배워 자기 나라에 유행시켰고 (6절), 재물과 군사력 증강에 힘쓰는 동시에 (7절), 자기 땅을 온통 우상들로 채우고 그것들에게 경배하였다. 이처럼 무지하고 배은망덕한 백성을 어찌 용서하랴?

 

(나) 12-17절: 인간의 타락은 자연계에도 손상을 가져온다. 노아 홍수 직전 '땅이 썩었던 것은 그 위에 사는 인간들 때문'이었다 (창세기6:12). 그러므로 바울은 자연계의 탄식과 소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로마서8:19-22).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웃시야와 요담의 통치하에 건축된 "높은 망대나 견고한 성벽" (대하26:9-10; 27:3-4 참조), 그리고 웃시야의 '무역 선박들'과 그것들이 가져온 온갖 귀중품 (대하26:2 참조) 역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다) 18-19절: 모든 거짓 신, 곧 우상들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라) 20-21절: 심판날에 사람들은 자기들이 금은으로 만들어 경배하던 우상들을 던져 버리고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자 할 것이다. 계시록 6:15-17에도 이와 비슷한 묘사가 나온다.

 

이상은 모두 "야웨의 날"(12절)에 벌어질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야웨의 날'이란 표현은 사13:6, 9; 겔13:5; 욜1:15; 2:1, 11, 31; 3:14; 암5:18, 20; 오15; 습1:7, 14(2회); 말4:5에도 나오는데, 항상 마지막 심판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오직 심판주이신 야웨 하나님만이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목시키고자 하는 말씀이 바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이다 (2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