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레위기

레위기1장~5장,예배의 의미

호리홀리 2015. 2. 9. 15:41

레 1:3 번제의 효과는 죄값이 치루어져 그의 죄가 가리워져 속하게 된다.

 הוהי ינפל ונצרל ותא בירקי(야크리브 오토 리르초노 리프네)

 

 의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의 조건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것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과 상호 교환된다.

히 11:4 더 나은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는 제사요 이는 의롭다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즉, 더 나은 제사 = 열납되는 제사 = 의.

 

1:4 안수한다 = 동일시한다. 내가 죽어야 할 것을 짐승이 대신 죽는다.

그러므로 내 죄를 전가한다는 의미보다는 내 대신 짐승이 죽는다는 동일시의 의미가 더 강하다.

예를 들어 신약의 안수는 하나님이 디모데가 장로회에 안수하셨다는 것으로 하나됨의 의미가 더 커서 동일시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뿐만 아니라 야곱이 므낫세, 에브라임에게 안수한 것은 야곱의 축복에 동참함이다.

 

레위기 1장에서 번제의 의미를 살펴보면, 대속적인 죽음에 의해서 내 죄가 사해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는 중요한 의미이다.

가죽을 제외한 전부를 태워 드리고 내장과 다리를 씻어 전부 드림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노아에게서도 속죄적인 의미의 번제를 찾아볼 수 있다.

창 8:21ff에서 노아의 제사를 열납하시면서 하나님은 인류의 악함을 인정하시고 그러면서도 이 땅과 모든 생명을 저주하지 않으시고 멸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희망이 없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를 사하사 죄의 결과인 사망의 효력을 무력케 하셨다.

 이는 레위기와 일치한다.

삶의 질서존속을 약속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하신다.

 

번제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창 22장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서 나타난다.

창 15:9 언약의식과 관련하여 제사드림이 나오는데 이도 번제이다.

언약과 제사의식을 논할 때의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창 22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온전함을 알기 위한 시험이다.

 번제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헌신, 자기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가 있음을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창 22장은 창 17장과 더불어 주어진 할례의 언약(새 삶의 시작으로 새 삶에 대한 요구)을 완결하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신제사를 요구하심. 당시에도 통상적인 제물은 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22:9). 따라서 인신제사를 요구하심은 상상밖의 일이다.

결국 시험의 목적이 경건, 헌신을 알고자한 것이었다는 결론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이삭을 바치라는 이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인신제사를 하나님은 절대로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세의 율법에서도 절대 인신 제물을 드리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전체 삶을 통해 드리는 헌신과 순종을 즉,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더욱 요구하시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질 수 많은 제사(대하 3:20, 모리아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짐)를 예시한다는 것을 비춰볼 때, 이삭을 바치는 인신제사는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삭은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선언 명령이었다.

이삭은 그 허리 안에 이스라엘이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인신제사는 필연적이었다.

 동물의 피가 인간의 죄를 해결 못하므로 인간의 제사가,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번제에는 ①경건 또는 헌신, ②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삭을 바치라는 인신제사에는 이삭이 죄인으로 반드시 죽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의해서 심판과 죽음이 제거된 후에야만 경건과 헌신이 의미있고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였다.

따라서 이삭은 죄인이요 죽어 마땅했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요구가 다른 사람의 죽음에 의해서 만족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유일무이한 인신제사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이다.

 인신제사를 금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이교에서의 악한 풍속(이기적인 제사)의 부당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을 확대하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도 죄를 대속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특별한 의미에서의 인신제사를 드려야 할 분이 오셔야 함을 의미한다.

 

소제(החנמ  중에 한줌을 태우는 것을 ‘기념물’(레 2:2)이라 한다.

 번제는 헌신, 화목제는 감사, 서원, 낙헌제는 교제, 속죄제, 속건제는 속죄, 소제는 처음 것을 바친다.

 이런 것들이 제사 속에 포함되어 있고 또한 제물의 재료는 손으로 수고하여 얻은 것이라고 한다면, 신 26장의 고백처럼 이스라엘의 생명이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의미이다.

 

이 제사(의식)의 내적 의미가 ‘하나님 섬김과 감사의 삶’에 있다고 할 때, 선지자들의 지적(삶과 의식의 괴리)과 롬 12장의 바울의 명령들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갈 5장, 롬 6장에서 성도의 삶을 ‘열매’라고 한다는 것을 본다면,

삶이 모두 주께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제사의 ‘제물’은 삶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또한 제물은 내 삶과 나 자신을 바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사가 삶의 대표적 집결형태로써 나타난 것이 첫째 의미라고 한다면 두번째 속죄제와 속건제의 의미는 피로 인한 대속에 있다.

 

피는 생명의 희생인데, 제물이 희생됨으로써 내가 희생됨을 대신한다(제물과 나는 identification 됨).

제사드리는 자는 제물의 피를 통해 죄의 무서움을 실감해야했고 하나님을 반역한 댓가의 심각성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죽을 것을 제물이 대신 죽는 것이다.

그러나 제물이 죽는다고 해서 진정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을까?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은 죽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두 가지(드려짐과 속죄)가 동시에 만족되는 예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이다. 그러므로 제사는 본래부터 완전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보다 나은 온전한 제사(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를 바라보는 성질이 있었던 것이다.

 드려짐과 속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동시에 충족한다.

 

offering 하나님과 나의 화목           

 

하나님으로부터의 내 죄의 속죄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

 

피와 살은 결국 의식적 용어인데 성만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겨냥하고 제사의 온전함을 기념하는 중요한 성격이 있다.

 

화목제, 감사제, 서원재, 낙헌제 등 여러가지는 그 모델이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한 것이 그 모델이다. 다른 제사와 다른 화목제의 특징은 제사드리는 사람이 그 제육에 참여함이다.

제사자가 함께 참여하는 교통, 사귐을 통하여 대적관계의 해소, 화목이 이루어진다.

 그 화목에 근거한 사귐이 그 요소마다 나타난다.

 


 

* 신약에 근거해서 구약 제사제도를 밝힐 수 있겠으나 구약의 제사제도를 통해 신약을 밝힐 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죽음을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하는 삶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막을 주시고 그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삶, 섬기는 삶의 형식이 제사이다.

자신의 경건과 수고로 되는 것이 아니고 먼저 우리의 죄 값이 먼저 치뤄졌음을 알아야 한다.

 대속적인 죽음(죄사함이 있은 후에) 후에 헌신과 경건이 가능하다.

제사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통한 삶(하나님의 은혜)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드림이다.

 성막에서 상징적 형태로 섬겼다.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이는 예표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말하기 때문이다.

 

레 1:3-4 제사가 열납됨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의 삶의 핵심을 차지하는 성막이 하나님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성막에서는 제물 즉, 가시적 물건, 행동으로 의식이 이루어지기는 하나 여기서 예배자는 하나님의 어떤 면을 가장 철저히 느끼고 의식하게 될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물론 하나님이 임재하시겠다고 했지만 그리고 법궤, 그룹 등으로 임재를 표현했지만)이므로 하나님의 철저한 영적 성격을 느낄 것이다.

영이신 분, 인간을 초월해 계시는 분임을 느낀다(하나님의 인도하심, 역사하심은 생활 속에서는 더욱 느낄 것이나).

 

그러면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요 4:24 신령과 진정이다. 이때 진정은 진리, 참된 것, 진실함이다.

이 신령과 진정은 여러 말로 번역이 가능하다. 신령 - 영, 성령. 진정 - 진리, 참된 것, 진실함.

 하나님을 확실히 의식되는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 자세, 영적 자세가 절실히 요구된다.

 하나님이 예배에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인 영적인 자세로 내면의 마음을 원하신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바로 상한 심령이다(시 51:17).

 

시편에서 예를 보면 다윗의 시, 아삽(레위인으로서 성전에 관련된 찬양대 사람들)의 시를 볼 수 있다.

사해사본 psalm scrawl에 보면 시편 중 가경이 한 편 삽입되어 발견되는데 여기에 나와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상번제를 드릴 때 찬양을 드렸고, 이 찬양을 위해 365곡을 지었다.

절기, 안식일을 위해 작곡했다 한다.

제사가 있을 때 찬양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요제와 같은 흔들어 드리고 들어서 드리고 하는 외적 상징도 있었지만 상당히 영적 내용을 갖춘 찬송도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향은 성도의 기도(게시록, 스가랴 보면 분향시 밖에서 백성은 기도한다)로 보인다.

그래서 제사는 외적 상징 의식과 함께 내적, 영적인 찬송, 기도가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속죄제를 드리는 경우는 행하지 말아야 할 것(금령)을 범한 경우인데, 누가 알려주거나 스스로 깨닫거나 간에 드려졌다.

 

속건제는 누가 맹세, 저주하는 말을 듣고도 증언을 거부할 경우, 부정한 것에 접촉한 경우, 말로써 함부로 서약하는 등 말로 범죄하는 경우, 여호와의 성물을 범하는 경우에 드려졌다.

그러나 속건제는 속죄제보다 가벼운 경우의 죄일때이고 그리고 20%를 더하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경우와 하나님의 성물을 속되게 하는 경우로 보여지기도 한다. 어쨌든 두 경우(속죄제, 속건제) 다 죄를 깨닫고 죄를 속하는 제사이다.

그래서 죄가 용서 받고 사해지는 제사이다.

 이것은 신약의 요한일서 1:9와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