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출애굽기

출애굽기33장,내가 친히가리라

호리홀리 2015. 2. 9. 15:17

출 33장의 ינפ 모세와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뒤만 본다.

죽이는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하나님 그 자신은 어떤 가시적 형태인, 언어의 형태인 계시와는 구별되며, 그 하나님 자신은 어떤 인간도 파악할 수 없으며, 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낼 수 없다.

 오직 배면만 즉, 가시적 형태는 간접적 경험으로만 하나님 자신을 알 수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되심, 독생하신 하나님만이 하나님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본질, 본 모습을 완전하게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오관을 초월한, 인간의 경험을 초월한 방식으로 임재해 계시며, 영육의 통일체인 인간과는 다른 분이시다.

즉, 인간과 하나님과의 무한한 거리를 말한다. 그래서 cult는 상징성을 띨 수 밖에 없다.

 

cult : 상징적으로 제물과 언어로 나타내는 것이 의식이다.

영이신 하나님,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성막에서 가시적, 가현적 형식을 띠는 의식을 통해 만나는 것은 상징성을 띨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독립적 영역이 아니라 실재적 삶의 영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이것이 깨어질 때 의식 자체도 무의미해진다.

영이신 하나님이 가시적 형식을 띠는 의식을 하도록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방식의 고려에서 나온 것이다. 영육의 통일체로서, 영적인 것과 분리되지 않으며 영적인 본질을 담고, 영적인 삶도 전체적인 삶의 일부분으로 가장 실제적인 삶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 영적 성격이 가장 두드러지는 장소인 성막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영육의 통일체 즉, 육체와 상관되는 인간의 섬김은 모든 활동이 육체적으로 나타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 섬김이 영적 사귐을 상징하는 형식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도 물론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과 우리와 영적 사귐이 가능하겠으나 우리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무한 질적 차이 때문에 더더욱 죄인(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이러한 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안된다.

성령님이 없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실제적 만남이 불가능하다.

 칼빈은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할 때 성령으로 그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한다’고 말한다.

 영의 질적 격차, 죄인으로서의 장벽 때문에 상징화된 의식을 해소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이 은혜를 실제화시키는 분은 성령이시다.

 

cult의 공동체성과 관련하여 상징될 수 밖에 없는 필연성,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섬김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면, 물론 영적인 예배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예배 의식은 공동체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공동체로서의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은 항상 communication이요, 이렇게 communication이 요구됨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한 마음으로 드려지는 것이 요구된다.

 

공예배에서 요구되는 것(공동체에서 드려지는 예배에서 요구되는 것)은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한 마음으로 영적 예배를 드리려면 상호 communication이 필수적이다.

그들의 내면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고리 즉, communication 수단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적 내면을 직접 대할 수 없고 언어나 행동이라고 하는 영적 내면의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내면과 접촉하게 하는 것이 언어와 행동이다.

 따라서 어떤 공동체가 어떤 영적 체험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형식성을 띤 외부적인 매체가 필요하다.

 이것이 cult가 왜 언어와 형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그 이유를 밝혀준다.

 cult는 항상 공동체를 전제로 하므로 공동체가 함께 하기 위해 언어의 통일이 있게 된다.

 

말 signifying referent ; 말 자체도 상징이므로 음성기호 sign이라 한다.

기호라는 것은 공동체 안의 하나의 약속이다.

행위는 상당히 형식화되어 있다.

 언어와 행동은 영적 내면을 가르키기는 하나 내면 그 자체는 아니므로 따라서 언어와 행동은 내면 상태에 대해 상징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영적 내면에 뿌리를 둔 언어와 소리라는 외부적 표현, 가청적 표현인 찬양은 그것이 단순히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내면의 찬송과 분리될 수 없다.

 

외부적 형식, 약속만으로 공동체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한 마음으로 드릴 수 있다.

 오직 이 의식을 믿음으로 참여하여 드릴 때, 성령이 이 예배가 영적 내면에 실체가 되도록 하신다.

요 4:24 신령과 진정으로 = 정당한 예배, 이때 신령은 우리의 영과 성령 둘 다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남은 다시 태어나고 또한 위로부터 나는 이중적인 의미의 언어를 요한은 사용한다.

 

롬 12:1-3의 영적 예배는 영적 존재로서 적합한 예배 형식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영적 존재가 변화되어 외부로 나와야 한다.

 전인격과 삶을 통한 예배, 단순히 표식의 형태로서만이 아닌 즉, 영육의 통일체로서 드린 예배가 섬김의 삶으로, 외부적 표현으로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는 것은 그 몸을 통해 자신의 삶을 드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