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출애굽기

출애굽기20:1~6,사랑이 없는 순종은 무의미하다.

호리홀리 2015. 2. 9. 14:27

출 20-23장은 십계명, 율법주심.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거룩하게 살게하신 목적을 선포하신 후 거룩하게 사는 방법으로 율법을 말씀하심, 즉 거룩하게 사는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을 반포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통치의 근본사상을 요약하고, 율법을 주신 자가 누구인지를 밝힌다.

 

20:1-2절 나는 노예의 집, 애굽 땅(세상 나라를 상징,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 귀신을 섬기는 땅,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사는 땅, 죄의 세력)에서 이끌어 낸 너희 하나님으로서 구원주로서 이것을 명한다 하심.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명하시는 권위의 근거를 밝히신다.

 이 사실은 새 상태, 새 생명의 삶이 시작됨을 의미하는데,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명백히 밝히신다.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새 생명을 주신 그 자격으로 이스라엘의 삶의 도리를 말씀하신다.

 

1-2절 Motive close, 왜 지켜야하나 지켜야 할 동기를 말씀하심,

 세상 나라에서 벗어나서 죄의 노예가 죄가 시키는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거기서 해방되어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킴,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도리 즉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곧 십계명이다.

 율법은 삶의 원칙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통치하는 매개체, 구속 받은 자의 삶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다.

해방되고, 새롭게 된 삶, 나는 너희 하나님(ךיהלא;엘로헤카),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절대적(배타적) 권리 소유를 말하신다.

 

3절 1계명 -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당시 종교적 상황을 의식하시고 말씀하심으로, 당시 여러 신을 섬겼다.

 오직 하나님만이 너희 하나님인 것을 천명함.

 Exclusive Claim = 배타적인 요구, 하나님 외에 어떠한 신도 너에게 있을 수 없다.

 

4절 2계명 - 어떠한 존재의 형상을 본따서 신이라고 여기지 말라.

 

근본적 의미 =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 형태로 형상화하지 말라.

 즉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과 피조계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과 피조계 사이에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다” 건너뛸 수 없는 큰 간격을 말함.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기 전 이스라엘이라도 침범할 수 없는 경계를 정해 주사 접근하지 못하게 하심도 다 이것과 관계가 있다.

 인간의 이해와 파악 능력 밖의 존재이다.

당시 가시적, 물리적 형상으로 형상화시키지 말라는 것은 인간의 고안물도 포함된다.

즉 돈, 인간의 과학, 이성 등도 다 그 속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피조계로부터 무한히 높으신 분이므로, 하나님께서 알리실 때만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인간이 지상의 어떤 것으로부터 유추해내어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로마서 1장에 의해 혹 어떤이는 인간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을 것이라 했으나 옳지 않다(바르트와 부른너의 논쟁).

 

하나님의 형상을 어떤 피조물로도 형상화하지 말라 = 하나님을 피조화 하지 말라.

 

 하나님을 피조물로 끌어 내리는 것,

즉 피조물을 신격화 시키는 것(TWO Way crosses).

 

스랍이라도 두 날개로 얼굴을 두 날개로 발을 가리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말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접근할 수 없는 그 거룩하심 앞에 이사야가 내가 죽었구나라고 고백할수 밖에 없는 것.

 

이 선언은 당시의 종교 상황에서 보면 놀라운 선언이다.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이다.

 계명을 지킴 →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계명을 안지킴 →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계명을 지키고 안지키는 것은 그 근본이 사랑에 있다.

 계명을 지키지 않음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방종교와 다른 점은 그들은 의식과 행위로 신앙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순종의 삶으로 신앙하는 것이다.

 

십계명을 주심 - 애굽에서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시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되 섬김의 규범을 주심이다.

 천지간에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상에 노예되었던 상태에서 구원해내셔서, 이곳까지 인도해내셔서 하나님을 섬기되 천지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난, 초월하신 분이므로 어떤 피조물의 형상으로도 비교될 수 없는 유일 독특한 하나님이시요, 어떤 가시적 형태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려 해서는 안된다.

 

3절 다른 신들을 내게 있게 말라(1계명).

 

20:3절 의식영역에 있어서 하나님 섬김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섬겨야 하는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인간의 피조성을 철저히 가르쳐주신다.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고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찾아오시겠다.

 의식은 단순히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임재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의 통로이다.

오늘날 기도, 예배, 성만찬도 역시 상징적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축복하시고 임재하시는 것이다.

 

다른 신들의 존재의 속성을 알려줌, 피조물의 형상을 따라 피조물을 신격화시킨 인간의 고안물이라는 우상임을 보여준다(2계명에서 밝힘).

 천지간에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임을 십계명 자체가 밝혀주고 있다.

세상에서 너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투하는 하나님이시다.

 

질투 = 열심. 인간의 저속하고 악독한 질투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바알브엘에 빠져 음행을 함, 비느하스가 창으로 제사장을 죽임, 이때 비느하스가 하나님에 대하여 느꼈던 질투, 열심 이것을 תדק(콰다트)라 한다.

 

다른 우상에게 탈취당하시지 않으시고 진노하시는 것,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인간을 하나님이 처벌하심.

 이는 하나님의 주권 침해이다. 하나님 되심과 그의 영광을 모독하는 것 처벌하실 것을 말씀하심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하나님의 주장에 근거한다.

이 하나님의 주장을 무시할 때 십자가는 희극이 되어버린다.

 굳이 십자가의 고통스런 방법을 택하심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불순종하는 자를 3대까지 그 책임을 묻겠으나 나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는 그 축복, 은혜를 천대까지 베풀겠다 하심.

하나님의 사랑에 묻혀서 하나님의 義의 요구를 무시해 버릴 때 값싼 사랑이 된다.

이 하나님의 義의 요구가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값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 - 그의 통치에 순종하는것, 네 성품, 마음 너의 전부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라, 순종의 내적 동기는 사랑이다.

 순종은 하나님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내적인 표현. 사랑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순종은 무의미하다.

 사랑이 없는 순종은 무의미하다.

 

요한일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 그럼 그의 계명을 지키자 이것은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다.

사랑의 표현으로 순종을 하지 않을 때 상업주의 순종이 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이 전제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순종하게 된다.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형식이지 하나님의 축복을 사는 공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