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로마서연구

로마서14:13-19 ,선한행실

호리홀리 2015. 1. 26. 18:04

롬14:13-19

 


 

1. 바울의 간접적인 접근방식의 완성(13~15)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날 때 항상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그것이 한 가족에 속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문제를 그 가족의 차원에서 논의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특별한 문제들에 접근할 때마다 그 합당한 무게에 걸맞게 의견을 제시하고 그 각 논점들은 그 가족 속에 집어넣고, 그 맥락 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믿음의 이해에 있어서 더 약한 사람들도 있고 더 강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① 다른 형제는 반대편의 지도자도 아니고 경쟁 상대도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싸우는 사람이 아님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거침이 될 만한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② 주님께서는 잡히시기 직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요15:1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사람들임을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3:35) 이 점은 교회에서 항상 견지해야 할 통제원칙입니다. 이 원칙에서 떠나면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의 결정들에 있어서 잘못되어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것을 논의하든지 우리는 형제이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③ 우리가 어떤 음식물을 먹든지, 더 이상 유대인의 의식법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 ❶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7:15) ❷ 또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행10:15) ❸ 또한 고전10:26~28에서도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❹ 딛1:15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④ 레위기의 율법 안에 있는 구분을 그 사물들 자체에 의존하여 정해진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구분을 해야겠다고 하신 것은 당신의 백성을 훈련시키고 다스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도록 한 것은 그 돼지고기에 그릇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그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❶ 금지된 것들 그 자체 속에 깨끗지 못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금지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며, 오늘날 그 모든 것을 다 먹는 것은 사도가 가르친 그 원리에 준하여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❷ 그리스도인들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의식 법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이제 다 종식되었습니다. ❸ 우리는 어떤 일을 하지 않으려 할 때 그 일 자체가 악하고 그르다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❹ 더 나아가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해도 그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시104:15) ❺ 담배를 피우는 문제도 똑같은데, 담배는 사람이 산출한 것이 아니며, 땅의 한 부분인데, 우리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시24:1)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일들에 탐닉하지 않아야 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려 한다면 바른 이유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 점을 명백히 해야 합니다. ❻ 그러한 것들 자체가 그릇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남용하는 것이 그릇된 것입니다. ❼ 성도 무절제하게 사용하고 남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붙잡아야 할 원리입니다.

 

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어느 것이나 항상 먹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은 그것이 속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속되기 때문입니다.

 


 

2. 선한 행실들의 정당성 여부(14~16)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적용해야 할 위대한 원칙은 결단코 자신만 생각해서는 안 되며, 항상 우리의 동료 그리스도인 형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행동이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특히 그 형제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약한 형제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① 그 자체로는 선하고 우리들에게도 선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가 되는,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너는 죄를 저지르고 잘 못을 범하고 있어”라고 말하게 만드는 어떤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② 새로운 회심 자들은 즉각적으로 그들의 문화적 배경이나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합니다. 오래 전에 복음이 전파되어 기독교 전통이 보편화 된 나라에서 양육 받던 사람들의 풍습이나 습관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은 매우 큰 시험이요 위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풍습이나 습관에서는 전혀 해가 없고 합법적인 많은 현상들이 다른 전통이나 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 볼 때에는 정말 끔찍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③ 사도는 양심에 순종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너무나도 중요하게 간주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❶ 선한 양심, 또는 거리낌 없는 양심에 따라 행동할 때에 그들은 양심에 의해서 정죄를 받지 않는 하나의 조건이 됩니다. ❷ 양심은 우리를 정죄하는데, 우리가 양심을 대항하여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양심은 양심의 선고를 내리지만 그 양심이 우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양심에 반하여 행동할 때 우리는 “나쁜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❸ 화인 맞은 양심은 더 이상 어느 것도 느끼지 못하는 양심이 마비된 것을 말합니다. ❹ 이것은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로 주어지는데, 안타깝게도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도덕적인 표준도 인정하지 않으므로 자신의 양심을 화인 맞게 하는 것입니다. ❺ 양심은 항상 작용하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항상 양심에 주의 깊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양심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그 사실에 호소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평안하기 위해서 단순히 법적인 문제에 호소하지 못하도록 지켜 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3. 성도의 궁극적 견인의 정당 논리(14~16)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양심은 오류와 거짓된 영성에 빠지지 않게 우리를 지켜 주는 가장 큰 안전 책입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을 집중해야 될 두 번째 문제는 성도의 궁극적인 견인에 대한 전체적인 문제입니다.

 

① “망하다”라는 단어의 뜻은 형제를 끝내 멸망으로 인도할 길목에 놓는 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과 10장에는 어떤 하나님의 자녀도 멸망하거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되는 일이 결코 있을 수 없음을 확증하는 진술들이 있습니다. ❶ 우리는 성경에서 언뜻 모순 되게 보이는 대목들을 다룸에 있어서 항상 성경은 스스로 모순을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합니다. ❷ 성경은 어떤 모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모순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❸ 언뜻 보기에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조화시키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② 성경은 어느 곳에서나 영혼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마16:26) ❶ 그 영혼들의 궁극적인 운명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❷ 만일 영혼의 운명이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크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❸ 만일 그렇다면, 단 한 사람도 끝내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낙오 되거나 떨어져 나가는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❶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결국 그 말은 마귀가 하나님을 물리치고 승리자가 된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❷ 마귀가 와서 사람을 유혹하였고 사람이 그 마귀의 말을 듣고 넘어졌으며, 모든 고통은 마귀로부터 야기 된 것입니다. ❸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귀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마귀로부터 자신의 백성들을 구해 내셨고, 또한 결단코 마귀에게 도로 내어주시는 일은 없습니다. ❹ 단지 실족하여 넘어지는 일은 있을 수가 있어도 영원히 망하는 일이란 도무지 있을 수가 없습니다. ❺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행사이기 때문에 거기에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④ 낙심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불순종할 때 일어나는 것으로 한 가족 내의 자녀들이 육신의 부모에게 불순종하여 가족을 불명예스럽게 하고, 그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하늘 아버지께 불순종 할 수 있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거나 결코 그리스도인이 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생각될 만큼 행동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낙심한 사람들은 항상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무리 멀리 벗어났다 할지라도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죄를 짓고 있는 동안에는 참 비참하고, 그들은 일종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으나 그러면서도 정죄 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⑤ 첫 번째 창조와 새로운 창조 사이의 차이점, 즉 대표로서의 아담과, 대표로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점은 아담은 넘어질 수 있었고 넘어졌다는 것이며, 우리는 모두 그 귀추를 함께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행하신 일은 완전히 다릅니다. 거기에는 실패 할 수도 없었고, 실패하지도 않은 어떤 것이 존재합니다. ❶ 아담은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넘어졌습니다. ❷ 만일 하나님께서 또 다른 아담을 창조하셨다면, 그 또한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❸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혜를 따라서 하시지 않고 당신의 지혜를 따라서 행동하셨습니다. ❹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실패의 모험을 무릅쓰지 않으셨습니다. ❺ 하나님께서는 실패할 수 없는 어떤 일을 하신 것입니다. ❻ 그 방법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은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❼ 여기에 많은 형제들의 맏아들이 계시며, 여기에 새로운 인류의 머리가 계십니다.  여기에 실패할 수도 없었고 실패하지도 않은 어떤 것이 존재합니다.

 

⑥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방식을 그의 아들 안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구원이 떨어질 수도 없고 떨어지지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수반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⑦ 진리 자체는 결코 편의에 따라 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❶ 진리는 영원합니다. ❷ 진리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❸ 진리는 확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❹ 편의에 따라 조정하는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❺ 편의를 따라 조정하는 일은 우리가 그것을 제시하는 방식 속에 있는 것뿐으로 우리가 본질적이지 않은 주변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을 때만 존재합니다.

 


 

4. 감사의 법칙들(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는 이제 이 전체 문제를 주관하는 어떤 보편적인 원칙들을 설정해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① 원칙은 진리의 여러 부분들과 대목들은 그 자체로가 아니라 전체와의 관계에서만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지체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어떤 특별한 부분이나 지체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항상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 점을 인식하는데 실패하게 될 때에 교회의 여러 방면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② 개별적으로 각각 따로 떼어서 생각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데, 여러 운동들의 결함이 그것입니다. 예언운동, 성결운동과 같은 운동들은 특별한 것들을 내세움으로서 전체로서 생각되어야 할 부분까지도 그 자체에 모두 포함시킴으로서 전체적인 균형을 잃고 탈선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③ 진리의 개별적인 국면이나 어떤 특별한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항상 다른 교훈들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❶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전체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❷ 진리에는 서로 모순 되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❸ 진리의 모든 부분들이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되 마치 몸 안에 있는 손과 발이나 다른 어떤 지체가 서로 모순 되거나 충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예화 : 중세 초기에 살았던 매우 경건하고 헌신적인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최고의 야심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이론적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조금도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다만 믿음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얼마 뒤 그녀는 자기 남편들과 자녀들, 가정을 버려두고 하나님을 위한 전임 봉사사역에 종사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 확신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는데, 그녀가 집을 떠날 때면 어린 자녀들이 울고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큰 희생적 봉사를 기꺼이 계속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이라는 식으로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그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 문제는 그 여자가 한 국면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다른 교훈을 망각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최고의 임무는 자기 가족을 돌보고 자기 어린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것은 남자를 보필하고, 둘이 한 몸을 이루어 자녀를 낳고, 그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여자의 크고 영광스러운 역할입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그 여자는 다른 부르심의 확신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과 사회의 근본적인 법칙 중 하나와 충돌하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것입니다.] ❹ 사람들이 한 교리, 한 진리를 따로 떼어놓고, 동일하게 확실한 다른 어떤 교훈과 충돌한다는 걸 알지 못할 때에 많은 부작용을 낳습니다.(가족은 하나의 근본적인 단위로서 어떤 분열도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④ 우리는 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것을 중요하게 여겨 중심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 부분들은 그 자리가 있으니 결코 인위적으로 중심의 자리에 갖다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한 부분이 너무 강조되거나 너무 집중되어 큰 것인 중심의 영광을 감소시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 ❶ 초대 교회 가운데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보는 것으로 이해되어, 먹고 마시는 것이 중심적인 논점이 되었는데, 이런 분쟁은 하나님의 나라 자체를 모질게 짓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❷ 그리스도께서 나의 임금이심을 자신에게 상기시키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또한 내 안에 계심을 상기시켜야 합니다. ❸ 나의 최대의 관심은 먹거나 마시거나 어떤 날들을 지키거나 이것저것 다른 것을 행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❹ 오직 그 임금께서 내 마음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이 내 최대의 관심이어야 합니다.

 


 


 

5.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각(17~19)

 

우리가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주도적인 생각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천과 관련하여 항상 이 나라에 속한 백성들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항상 우리 마음의 첫 면에 간직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사고방식 전체를 통제하고 조정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들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합니다. ❶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행하는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❷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의의 선언을 받은 사람들이고, 의롭다 하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받는 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❸ 그들은 이전에 육체 안에 있었으나 지금은 성령 안에 있고, 이제 의의 영역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❹ 우리의 방식은 이제 새로운 틀, 즉  가르침의 틀 안에 부어짐을 받고 인도하여 맞추어진 새로운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❺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는 변혁이 일어난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음은 여전히 상세한 어떤 행실과 윤리적인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속한 영역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❻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별한 행위의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행동해 모든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이 속한 나라, 그 나라의 임금에 맞추는 차원에서 행실의 모든 문제를 바라봅니다.(벧전1:16) ❼ 그리스도인들은 일차적으로 상세한 국면에서 의의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심오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앞에 옳게 되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❽ 의의 영역, 의의 통치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의라고 규정지을 수 있습니다.

 


 

6. 평강을 망치는 것(17)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전가된 의로움을 얻었으니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① 우리가 평강과 안식에 있어서 부족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보편적으로 그릇된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❶ 이런 사람들은 그릇된 일을 할 것을 걱정하고 겁을 낸 나머지 항상 안달하며, 생각이나 마음 전체 속에서 항상 쉼이 없습니다. ❷ 반대와 비평을 받을 것이라고 항상 생각하여 자기가 만난 어느 누구와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않으려 하며, 이런 저런 문제에 대해서 싸우려 듭니다. ❸ 비판은 자기 방어구조의 한 부분으로 자기의 입장에 관해서 너무 두려움을 가지거나 걱정하는 나머지 비판적인 태도와 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❹ 이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모습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말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상세한 것들에 너무 지나치게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에 대해서도 다시 두려움의 조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②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❶ 자신의 권리, 자신의 요구 사항, 자신의 즐거움, 자신의 행복에 집중현상을 보이고, 그것이 모든 다툼과 분쟁의 원천이 됩니다. ❷ 자기 보호와 자기 방어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❸ 남편과 아내 사이나 부모와 자녀, 상전과 일꾼, 여러 나라들 사이 역시 그러합니다. 항상 “나 자신”이요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을 거절합니다. ❹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 같다. 너희는 저 바깥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정확히 똑 같이 행동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들여오신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답변만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④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하려고 자기 삶의 상세한 국면들을 정밀하게 살피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⑤ 구원은 사람들에게 그 안에 있는 평강을 줍니다. 우리 복되신 주님께서는 이 내면적 평강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특히 당신의 지상 생애가 끝나갈 무렵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⑥ 우리의 마음이 안식하므로, 더 이상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겁을 내거나 신경질적이거나 비평적인 상태에 있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벌이 있는 두려움”을 버렸으며 우리는 생명의 위대함과 영광, 그 생명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진지함을 인식하기 때문에 안식할 수 있습니다.

 

⑦ 우리가 내면적인 평강을 가지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대한 끊임없는 병적 걱정으로부터도 건짐을 받게 될 것입니다.❶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고전 4:3) 그것이 평강의 궁극적인 핵심입니다. ❷ 우리 자신 속에 안식을 가지되, 자기 자신도 자신을 판단치 아니하는 정도로 안식을 가지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⑧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입니다. ❶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화평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큰 특성입니다. ❷ 그들의 하늘 아버지는 평강의 하나님이시며, 그들은 그 평화를 나누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❸ 그리고 그들은 아버지와 같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⑨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의 왕”일 뿐만 아니라 또한 “평강의 왕”이십니다.(사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