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로마서연구

로마서14:1-6 ,영적강자가 되라

호리홀리 2015. 1. 26. 17:57

롬14:1-6

 


 

1.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관계들(1)

 

① “믿음이 연약한 자”란 믿음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갈피를 못 잡는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구적으로 약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기에는 약한 사람, 즉 그 순간 그 시점에 이르기까지 그 믿음에 있어서 약하거나 미약했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② 그들은 믿음 안에 있었으며, 거듭난 사람들이고, 교회의 지체들이며, 마땅히 교회 지체들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삶과 생활의 세부적인 국면에 이르렀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의 입장에서 옛 율법적인 사고방식,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사고방식으로 물러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 차원에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③ 유대인들은 율법 안에서 양육되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가장 난제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방식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 곧 믿음의 차원으로 줄곧 생각하는 데에 실패하는 것인데, 구원에 관한 진리를 믿는 것과 그  진리를 자신들의 행실과 일상의 삶,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적용시켜 나가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믿더라도 특별한 논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는 행위를 의지해서 뒤로 물러가 넘어지는 위험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 가운데서” 진행해 나가는 성향을 말하는 것입니다.(갈3:3)

 

④ 믿음이 약한 자와 강한 자를 나누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고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❶ 중생은 전적이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생사입니다. ❷ 거듭남에 있어서 우리가 감당할 역할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거듭남의 문제에 있어서 조금의 차이도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❸ 우리가 이제까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행실을 보였느냐 하는 것이 거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❹ 거듭남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동등하고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일에 있어서도 다 동등합니다. ❺ 우리 모두는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며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길 밖에 없지만 체험에 있어서는 모두가 다를 수 있습니다. ❻ 우리가 거듭날 때 생명의 씨앗이 우리에게 심겨지고, 그 씨앗 자체에는 전혀 차이가 없지만, 그 씨앗에 일어나는 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ale음에 있어서 약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⑤ 그 차이를 야기 시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❶ 천성적인 재능에 의해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또 어떤 이는 권면하는 자로 쓰임을 받습니다. ❷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관련하여 기질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기질에 따라서 염려를 많이 하는 성도일 수도 있고, 열성적인 성도일 수도 있습니다. ❸ 부지런함과 철저함이라는 문제가 우리에게 생명으로 주어진 우리 속에 심겨진 씨앗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성적인데서 기인하여, 부지런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고,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❹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면서, 영적인 교훈과 가르침에 따라 그 마음을 새롭게 하고 그 행실들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새롭게 함으로서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다. ❺ 기독교적인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 신앙생활은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약한 자들을 환영할 우리의 의무(1~4)

 

① 믿음에 있어서 연약한 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로 인하여 과민한 상태에 있는데, 더 강한 형제가 더 약한 형제의 이러한 조건을 절대로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❶ 연약한 자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여 그것을 제거하려고 한다거나, 또는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계속 언급하게 된다면 연약한 자는 더욱더 악화 될 것입니다. ❷ 연약한 자의 고통 거리를 재미거리로 만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강한 자에게는 웃음거리가 될지 모르지만 약한 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일 수가 있는데, 그것을 아무런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하여 재미거리로 만드는 일은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❸ 더 약한 사람들을 힘으로 제압하려거나 자신의 의견을 은근히 주입시키려고 하는 것은 선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❹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며, 우리가 도우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❺ 그 형제를 받되,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받으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받아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영접함을 받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받아야 합니다.

 

② 이러한 문제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우리의 행동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❶ 이 주변적인 문제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❷ 이러한 논점들에 대한 관점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서로 자녀로 받고 서로 존중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❸ 우리가 아무리 잘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연약하거나 부족한 부분에 대하여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❹ 강한 형제들은 언제나 자신은 모든 지식을 다 섭렵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위험에 빠지기 쉬운데, 기독교의 신앙이란 결코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❺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완전하고 철저한 지식에 도달하지는 못했는데, 어떤 사람은 조금 덜하고, 어떤 사람들은 조금 더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더 나아갔으니 우리는 부지런히 완전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에 지식을 더해가야 합니다.

 

③ 강한 형제가 더 약한 형제의 주장을 찬동하지는 않지만 결코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약한 형제의 주저함을 판단하는 생각을 표현하지 말아야 하는데서 그치지 말고,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이러한 “주변의 문제”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토론을 하게 될 경우에는 더더욱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❶ 토론 자체를 위해서 토론하지 말아야 합니다.(자신의 주장을 위해 면박하지 말아야합니다.) ❷ 유희나 즐거움만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있는 어떤 것에 관한 토론을 해서는 안 됩니다. ❸ 자신을 과시할 목적으로 토론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❹ 이런 문제들을 나쁜 분위기나 절제되지 않은 방식으로 토론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❺ 토론과 논쟁 사이를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토론은 좋은 교육 방식이지만, 논쟁은 그릇된 것입니다.) ꊧ 이기려고 애를 쓰고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논쟁입니다. ꊨ 논쟁의 결과는 그것의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ꊩ 다른 사람의 입장을 더 굳게 해주고, 더 고집을 부리게 함으로서 자기의 입장을 더욱 방어하려고 결심하게 합니다. ꊪ 결국 어떤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그 정신은 쌍방 모두에게 잘못된 것으로 언제나 선 보다는 해를 더 끼치는 것이 논쟁입니다. ❻ 우리의 소원은 항상 진리에 대한 더 바른 이해를 얻고 서로 도와주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❼ 우리는 토론을 위해 가르침의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교사의 임무는 항상 가르침 받는 자들의 입장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ꊧ 자기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수준을 평가해야 합니다.(어린아이인지, 성인들인지 평가해야 합니다.) ꊨ  어린이들과 갓난아이들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ꊩ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질문들에 대답할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 하며, 자신의 말을 거듭 되풀이 할 용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ꊪ 모범의 가치를 잊지 말고 그 가치를 절하 하지 말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너무 많은 것을 법칙으로 세워 놓지 말고 오히려 그들에게 이치상 설명하며, 다른 방식을 시도해 볼 준비와 다른 방식의 기회를 줄 용의가 있어야 합니다.) ꊫ 무엇보다도 가르침의 진수는 가르침 받는 사람들에게 사랑어린 관심을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④ 특별한 음식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것은 계명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보편적인 가르침을 적용하여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❶ 아직 우리는 결론들에 이르는 단계에 있지 않고 해석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❷ 우리는 성급히 결론에 이르지 말고 먼저 해석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❸ 이교도들은 이교 신전으로부터 우상에게 고기를 제물로 드렸고 신전에서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 중에는 “푸주간”이라고 불리는 고기 시장에서 팔리곤 했는데, 유대인들은 그러한 고기가 우상숭배와 연관되어 그 고기는 더럽혀 졌다고 생각함으로 그 고기를 먹는 것을 삼갔던 것입니다. ❹ 이방인들도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일에 관하여 생각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고기를 먹는 것은 다시 한번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ㄲ로이라고 느껴서 그 고기가 이교도의 신전에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 모르므로 모든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❺ 어떤 사람은 모든 종류의 음식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습니다. ❻ 사도 바울은 그 뿐만 아니라, 딤전4:1~8의 대목에서 혼인을 금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식물(고기)을 먹지 말라고 명하는 어떤 교훈을 다루고 있는데, 당시 1세기에 매우 인기 있었던 개념들을 이상하게 혼합하는 것들이 인기가 있었는데, 그것들은 신비주의나 금욕주의, 그리고 종교 철학, 어떤 의미에서 마술까지도 호기심 어리게 혼합하였습니다. ❼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특별한 문제들과 함께 모든 유의 그리스도인에게 영향을 미치기 쉬운 이 이단적인 가르침을 포함시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❽ 그래서 바울은 채식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며, 약한 자들의 결심에 대하여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❾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를 누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신 그 자유에 견고히 선 상태에서 주를 위한 열심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로 종결 되어지는 것은 무엇이든 가능하지만, 개인의 어떠한 목적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들이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하나님과 무관한 일들은 금해야 합니다.

 


 

3. 율법주의의 실례들(1~4)

 

너무 유약한 형제들은 구원의 중추적인 진리를 믿기는 하지만 그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상세한 부분에 적용시킬 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믿은 것들을 부인하게 됩니다.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야 합니다.

 

① 사람이 고기를 먹느냐, 채소를 먹느냐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❶ 사람들이 규칙과 규례들을 만들어내고 성경을 통해 그 정당성을 입증할 수 없는 사항을 고안해 내는 위험은 항상 존재합니다. ❷ 그 가르침과 목적이 선하다고 할지라도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교리들과 합치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율법주의의 도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❸ 성경에서 특수하게 지적되지 않은 어떤 상세한 요점들에 지나친 탁월성을 부여하여, 지키게 하고, 자기들이 정한 규칙을 어기는 것을 비난하거나 억압하는 것들은 모두 율법주의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❹ 우리가 세워 놓은 표준을 가직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경향에 빠질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바리새인들이 그것에 대한 좋은 예입니다.) ❺ 누가복음 9:49~50에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자기들의 그룹에 들지 않았고 모든 방면에서 자기들을 닮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그가 전혀 제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워놓은 기준을 거부하셨습니다. ❻ 교회의 역사는 사람들이 자주 그릇된 이유 때문에 분열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서로의 인식의 차이, 작은 규례들, 또는 교회 연합,등등) ❼ 성경의 전체 강조점은 정신에 주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사랑의 정신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에 의해 정해진 규례와 같은 것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② 그리스도인들은 거침돌을 피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❶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고, 디도에게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것에 대한 답은 사도행전 16:1~3과 갈라디아서 2:3~5에 정확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❷ 그 원리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유대인들인 것처럼 율법에 순응하고 모든 것을 행할 필요는 없지만 꼭 지켜야 할 것들을 제시하는 것은 유대인 성도들의 신앙의 양심을 위한 차원에서 제시된 결정이라는 것입니다.(행15:19~20) ❸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이 하는 일에 대하여 이해를 하지 못하여, 바울이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유대인들의 규모를 지키지 말라고 한다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행21:21) ❹ 그래서 야고보와 교회 장로들이 바울에게 제안하고 바울은 받아 들여 유대인 성도들의 오해를 풀어 준 것입니다.(행21:23~24,26) ❺ 바울은 자신을 반대하는 과격한 사람들의 반응으로 인하여, 그들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한 교회의 요구인 자신의 머리를 깎는 것이 좋을 리가 없었고, 서원을 하는 의식 법을 행하므로, 이방인들이 억지로 의식 법에 순종하도록 강요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유대인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는 아무래도 좋다고 여기는 규칙들을 들어 준 것입니다. ❻ 바울은 여전히 복음에 입각하여 절대적인 자세를 견지했고, 자기가 이방인들에게 가르친 것과 자신의 믿음 위에 굳건히 서 있었지만 예루살렘 안에 있는 소동이나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머리를 깎고 서원도 할 수가 있었습니다. ❼ 그는 평안을 위해서 그렇게 했으며, 복음의 확산을 위해서 그리고 정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❽ 바울은 위대하고 분명한 원리들을 전제해 놓은 상태에서 어떤 사람이 “모든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 아래 들어가게 하는 것이 옳으냐고 한다면, ‘천만에요!’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할 수 있는 한 소요를 피하고, 아무래도 좋은 어떤 일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지키라고 요구하자.”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③ 이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인 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다면, 누가 그를 거부한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❶ 누구든지 믿음을 고백하며 “내가 죄인인 줄을 알고, 자신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자신의 행위는 쓸모없음을 고백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나와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만 의뢰하며, 그 사실에 대하여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믿고 의지한다.”고 말한다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받으신 것입니다. ❷ 거기에 덧붙여 그들이 기독교회에 가입하고 싶다는 뜻을 표명하고 세상의 부류를 떠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부류 속에 들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시 분명히 하나님께서 저들을 받으셨다는 증거입니다. ❸ 그런 다음에 그들의 보편적인 행실과 행동을 거기에 덧 붙여 보아야 합니다. ❹ 그들의 행실이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어떤 일들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자기들의 신앙고백과 일관성 있는 삶을 영위하고, 신약의 가르침에 따르고 있다면, 그들 또한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다고 말할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❺ 우리가 그릇될 수도 있고 오도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그릇되게 사람들을 배제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❻ 복음 적인 사람들이 계속해서 서로 나뉘며, 분열의 조건 속에 처하면서, 또 철저한 실패와 온 땅에 잊혀지기에 마땅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모두 동등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님께서 동등하게 자기들을 받으셨음을 압니다. 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신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위대한 원리들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1~4)

 

① 하인들의 행동이 어떠해야 함을 결정하는 권한과 특권은 주인이 가지고 있으니, 그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❶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상전이십니다. ❷ 우리의 서고 넘어지는 것이 다 주님께 있습니다. ❸ 주님께서 우리에게 뭘 할 것인지 지시할 권한을 갖고 계시며 우리를 판단하는 권한도 주님이 갖고 계십니다. ❹ 우리는 징계하는 권한도 바로 주님, 그 주님만이 갖고 계십니다.

 

② 주의 계명이 있을 때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주의 계명이 없을 때에는 판단을 표명하는 데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❶ 왜냐하면 주님께서 판단자이시기 때문입니다. ❷ 자신의 관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서로 정죄하지는 말라, 그런 일은 분명히 그대들의 특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영적인 탐정들이나 영적인 재판장으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❶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매우 실제적인 바로 그 위험을 다루고 계십니다. ❷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마7:1~5) ❸ 야고보는 자신을 재판장으로 세우면 자신의 기준에 따라 자신이 판단을 받으리라고 경고합니다.(약3:1~2) ❹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상전이시고, 그분만이 사람들에 대한 마지막 판단을 최종적으로 선고할 특권과 권리를 가지십니다.

 

④ 약한 형제가 두려움의 영에 지배를 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❶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약한 형제는 여러 규칙과 규례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❷ 자신을 위해서 울타리를 치는데 너무 관심을 기울이고, 실패할까 무서워 자신을 방어하느라고 율법주의자가 되는 지점까지 나아갑니다. ❸ 그로 인하여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식으로 뒤로 물러가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 진리를 부인하게 됩니다. ❹ 이 모든 것은 과민한 이해 때문입니다. ❺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거나 모세 율법이 금하는 고기들을 먹는 것은 가공할 만큼 위험한 일이며, 그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고, 그는 믿음에 있어서 파산 당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는 공포스러워하는 것입니다. ❻ 그들이 과민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림 받은 이 구원의 충만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서게 하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형제에 대해서 과민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전혀 있습니다.

 


 

5. 안식일과 주의 날(1~6)

 

이방인들이 객관적인 외적 방식으로 유대인들과 같은 율법을 갖지는 않았음에도, 같은 율법이 그들의 마음에 기록되었다고 말 할 때 도덕법의 보편성을 매우 분명하게 지적한 것입니다.(롬2:15)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도덕법을 주셨을 때, 그것은 전체 인류의 마음속에 이미 기록되었던 것을 외적 형식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사도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제가 있는데, 안식일로 어느 날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든지 주간의 첫 날을 지켜야 하는 거라는 것입니다.

 

① 행20:7에서는 “안식 후 첫날” 모였다고 되어 있고, 고전16:1~2에서는 매주일 첫 날에 모였다는 증거가 있고,  또한 계1:9~10에서 사도 요한에게 주어졌던 큰 계시가 주의 날, 주간의 첫날에 주어졌습니다.

 

②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주간의 첫날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바꾼 것은 어떤 초자연적인 조명 또는 어떤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가 어떠하다 할지라도 그 변화는 정말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③ 찬미를 드리며 송축할 위대한 날이 주간의 첫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그 첫날은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④ 첫 창조 때, 7일에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마치고 쉬셨습니다. 지금은 우리 주님께서 말하자면 새로운 창조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출발하셨고 이 “새 창조를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