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로마서연구

로마서14:5-12 ,주를 위하여

호리홀리 2015. 1. 26. 18:00

롬14:5-12

 


 

1. 주님을 섬기는 일의 동기(5~9)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이유를 가지고 지성적인 이해로 자신의 양심을 청종하고  양심이 깨우침을 받고 그 양심의 소리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6절에서 또 다른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①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무엇인지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문제에 있어서 관용과 이해를 보이는 더 높은 동기가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이 주제들 모두의 관계는 다 주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② 우리가 어떤 방식을 결정하는 정신은 어떤 의미에서 그 결정 자체보다 더 중요한데, 사도는 여기서 이것을 순전히 지성적인 차원에서만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물론 우리는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는 말아야 합니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어느 한 결정에 이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 앞에 옳은 것을 행하고 있다는 사고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요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③ 어느 날을 특별한 날로 여기는 것도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며, 고기를 먹거나, 먹지 않는 문제 또한 “주님을 위하여” 하는 일이 될 때에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❶ 고기를 먹는 문제에 있어서 그것이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라 할지라도 우상은 전혀 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상상으로 고안해낸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에 그 사람은 자유롭게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❷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약한 형제를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그 형제가 행하는 것을 지켜보고 알라는 것입니다. ❸ 또 그 고기를 먹는 자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있다는 매우 훌륭한 증거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❹ 마찬가지로 약한 형제가 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❺ 그러나 서로에게 자신이 행하는 일에 대하여 그와 같이 행하지 않음으로 감사하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행위입니다. ❻ 서로의 행하는 바가 자신과 같지 않을 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그가 행하는 일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❼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고 싶은 완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주를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신앙의 상태에서 최선의 선택으로 고기를 먹든지, 채소를 먹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④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이 말씀은 어떤 한 사람, 어떤 한 그리스도인도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목적을 섬기지 말아야 하며,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거나 자기 자신의 이해를 따라 살거나 자기 자신의 성향을 따라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❶ 그리스도인은 항상 주님과의 관계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❷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이익이나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거나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❸ 우리는 죽는 것까지도 주님께 지배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자살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삶의 근본입니다.

 

[예화 : 휫필드는 천상의 마음을 가진 젊은이로 25세 때에 하나님 사랑의 기이한 나타남을 체험하고 하나님과 비상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열심히 설교했고, 자신의 힘 이상으로 이 일을 했지만 그것을 즐겼고 그 일에 흠뻑 빠져 있기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테넨트 가문의 식구들과 휫필드가 함께 식사를 했는데, 거기서 자기의 황홀경에 빠져 자기는 즉시 하늘에 가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에게 가장 큰 바람이라고 말했을 때 나이 많은 윌리암은 그에게 “젊은이 그대의 임무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지 그대가 언제 죽을지에 대해 관심 두는 것이 아닐세, 그 일에 대해 흥미를 가져서는 안 돼요. 그저 주님을 섬기고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파하며 이 특권을 누리는 일을 계속하면 되는 거요. 다른 문제들은 온전히 주님께 맡겨야 해요. 무슨 권리로 ‘내가 거기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거요. 주님께서 그대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어떻게 압니까? 무슨 권세로 자신의 소원을 주님의 마음과 생각 속에 집어넣는단 말이요?”라고 날카롭게 질책했다고 합니다.]

 

⑤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주님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❶ 정확히 같은 것이 죽음에도 적용이 됩니다. ❷ 죽음도 “유익”입니다. ❸만일 내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❹ 만일 죽는다면 그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더 좋은 것”입니다. ❺ 그러니 내가 살아 있다면 그것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내가 죽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❻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입니다. ❼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가 되십니다.

 


 

2. 주님의 주 되심(9)

 

① 14장의 주제는 고기를 먹는 것이 옳은가, 어떤 특별한 절기들을 지키는 것이 옳으냐의 매우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지만 바울은 6절에서 그 논증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 사실상 문제되는 것은 동기와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❶ 우리의 행동이 주를 위한 것인가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❷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대한 가장 높고 깊은 교리들 중 하나는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② 9절에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 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하는데 “이를 위하여”라는 말은 “이 목적을 위하여” 또는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❶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결과로 당신의 백성들의 주가 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❷ 그 백성들이 살아 있거나 죽거나 간에 상관이 없이 주님은 언제나 그 백성들의 주가 되십니다. ❸ 주님께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결정하실 뿐만 아니라 극들을 인도하시고 모든 일 속에서 그들을 주장하십니다. ❹ 그것은 우리 주님의 영원한 권위입니다.(마28:18)

 

③ “이를 위하여” 이 목적과 이 목표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는데, 그러니 우리 주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결과로서만 그 지위를 차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❶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 되실 뿐만 아니라 동등하게 전능하신 분입니다. ❷ 만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면, 주님께서 죽으시거나 다시 사신 일이 없었다면 사망의 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❸ 우리 주님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자원하여 자기 비하의 기간을 거치셨습니다. ❹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본질적인 부분은 주님께서 죽음에 복종하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❺ 율법 자체가 죽음을 요구하고 죽음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주님께서 율법 아래 나셨기 때문에 당분간은 죽음의 주가 아니라 죽음 아래 복종하시는 분이셨습니다. ❻ 그러나 이제 죽으시고, 또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를 사망의 속박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❼ 인류를 대적하는 원수는 사망인데(고전15:26,55~57), 그 마지막 원수를 우리 주님께서 이기신 것입니다. ❽ 우리 주님은 죽음을 이기셨고 죽음을 관통해 나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❾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였으되, 우리를 위해서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때문에 사망이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를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④ 주님께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시는 것은 마귀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❶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일이 부가적으로 따라 온 것입니다. ❷ 마귀가 사망의 권세를 가진다고 하지만 사망을 조정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때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❸ 그것은 욥기 1장에서 증거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허용하심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❹ 하나님께서 때로 마귀를 사용하사 죽음을 산출하고 초래하신다는 점이 분명해 집니다. ❺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귀를 사용하셔서 그 일을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❻ 마귀는 우리가 살거나 죽거나 결정할 어떤 고유의 권한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❼ 마귀가 가지고 있는 “사망의 세력”은 “영향력” 또는 “권위”라는 뜻으로 우리에게 사망을 가지고 왔고, 그 사망의 속박과 지배 하에 있는 입장에 처하게 만드는 자가 마귀라는 뜻입니다. ❽ 마귀가 사망의 궁극적인 주장자가 아니라, 죄의 결과로 들어오게 된 사망에 이르도록 한 자가 마귀입니다. ❾ 그런 의미에서 마귀는 이런 종류의 권위를 가진 것입니다.

 

⑤ 우리 주님은 사망과 지옥, 모든 것을 주관하는 완벽한 통제력을 갖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기셨고, 정복자이십니다.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확보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와 같이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 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3. 재판장이 아니라 형제임(10~12)

 

사도 바울은 그의 논증에서 두 가지 주요 논점을 다루고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우리 모두가 다 함께 형제들이라는 사실입니다. 14장 이전에서 그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하고, 여기서는 우리가 서로 형제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는 생명과 사망을 주관하시는 주가 되실 분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을 주관하시는 주님도 되십니다. 이 점은 당신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결과로 말미암아 된 일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는 모두 다 함께 형제들입니다.

 

①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한 백성들을 주셨는데, 그들은 한 백성들일 뿐만 아니라 형제들이요, 자녀들이요, 모두 다 연관된 자들입니다.(히2:10~13) 그리스도께서 사시되 당신의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하나 사셨습니다. 특히 당신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심으로써 우리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②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❶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육체에 속한 것들을 생각지” 않고 영적인 일들을 생각합니다. ❷ 성령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❸ 그런 다음 그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❹ 바로 그 때문에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5; 13:15)고 말합니다. ❺ 이 모든 것이 로마서 14장 바로 이 시점에서 말하는바 속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❻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견해나 판단은 다를 수 있습니다. ❼ 그러나 이 문제들에 대한 견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서로가 어떤 관계인가를 이해하는 문제인데, 우리가 함께 형제 됨을 인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③ 이런 주변의 문제들 속에서 우리는 다 함께 형제들이며 한 주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❶ 이 원리는 강한 자와 약한 자 양편에 다 적용이 됩니다. ❷ 믿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더 약한 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잘못을 더 잘 저지릅니다.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사실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❸ 그리고 믿음이 강한 자에게 형제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여 멸시하지 말라고 합니다. ❹ 서로 멸시하고 판단하는 것은 형제가 가질 마음이 아니며, 참된 형제애의 특성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고 도와주려고 결심하며, 서로 바르게 길을 인도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④ 바울은 이제 10절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❶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모든 일이 교회 생활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윤리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❷ 그리스도께서 주시니 재판장도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❸ 우리 주님께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의 결과 중 하나는 주님이 재판장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요5:20~22) ❹ 우리 모두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며, 모든 무릎이 주님 앞에 꿇게 되고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게 될 것입니다. ❺ 심판 때에 온 세상이 하나님이 재판장이심을 아뢰고 고백하게 될 것이며, 그의 심판은 거슬러 어떠한 불평의 근거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이사야45장의 논증을 완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❻ 이러한 것에 비추어 보면 우리 중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재판장 노릇을 하려는 것처럼 괴이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❼ 더군다나 특별히 형제인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⑤ 우리 주님께서 재판장이심을 역설한 후 바울은 심판의 성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❶ 심판은 우주적일 것인데, 우리 주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다 판단하실 것입니다.(요5:28~29; 행17:31) ❷ 성도들의 심판이 있을 것인데, 그 심판은 구원과 관련이 되어 있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미 그 심판을 통과했기 때문에 그것은 상급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눅12:40~48; 고전3:9~15; 고후5:9~11; 벧전4:17~18; 요일2:28) ❸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 보좌 앞에 여전히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 간에 행한 것을 직고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손실의 고통을 느끼거나 부끄러움을 알게 되는 일이 가능합니다. ❹ 그래서 최종적인 결론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❺ 그러나 교회가 권징을 시행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악명 높은 공적 범죄를 자행한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을 출교처분 했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판단권이 있습니다.(교회의 순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