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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칼빈의 언약적 성경해석과 세대주의 비평

호리홀리 2014. 12. 17. 22:27

 부록/칼빈의 언약적 성경해석과 세대주의 비평

 

          ‘피터 릴백’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대학원 총장

 


 

요한 칼빈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에 우리는 개신교 종교개혁과 개혁 신학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친 제네바 개혁자의 업적을 되새긴다. 이것은 특히 언약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서 발견된다.

 


 

언약에 관한 칼빈의 독특한 접근 방법은 그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 성경의 기록들을 해석하고 그들의 조화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언약에 관한 견해 안에서, 크리스천의 생활과 성례전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전개하는 한 체계를 발견한다. 우리는 칼빈의 언약신학과 언약적 성경해석에 관한 연구를 할 것이다.

 


 

1.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의 차이점들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왕국을 하나님의 구약 백성에게 주려고 가져왔으나 그들이 그를 거부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한쪽에 제쳐 놓임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은 전혀 다른 세대, 즉 교회 시대를 개시하셨다. 이 시대는 일종의 '중대한 삽입'(great parenthesis)이다. 교회의 세대는 이스라엘과 율법의 구약 세대 후에 나타난 은혜의 시대이다"고 한다.

 


 

세대주의적 신학은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것이 이스라엘에 의하여 거부당했기 때문에 그 대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다고 한다. 교회가 들림을 받은 후에야 이스라엘을 위한 왕국이 임할 것이다. 따라서 세대주의의 입장에는 미래에 성취될 이 왕국은 요한계시록 20장에 언급된 것과 같은 문자적 천년왕국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세대주의의 근본 개념은 세 가지이다: ① 하나님의 백성은 둘이다. ② 교회와 이스라엘은 구분되어야 한다. ③ 하나님의 왕국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며 본질적으로 미래적이다.

 


 

언약신학은 이 세 가지 논점에 대하여 전혀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언약신학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우선 첫째로,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백성은 오로지 하나뿐이라고 가르친다. 이 하나의 백성은 내적으로 오실 메시야를 고대하던 백성과 그가 이미 오셨으며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뒤돌아보는 백성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는 유일하고 동일한 메시아의 백성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이다. 이와 같이 교회나 구약 성도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단일 백성의 부분이다.

 


 

이런 까닭에 언약신학에서 그 왕국은 전적으로 미래적이지 않다. 그 왕국은 이미 이곳에 도래하였으나 앞으로 더 훌륭한 것이 도래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리고 아직 아니'(already and not yet)이다. 언약신학은 이미 활동하고 있는 한 왕국이 있으며, 또한 한 왕국은 보다 큰 영광 가운데 도래할 것이다. 이 현재와 미래의 왕국이 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졌는데 그들은 메시아의 초림을 고대하던 자들과 또한 이미 오신 그가 이미 오신 것과 재림하실 것을 기대하며 되돌아보는 자들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이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은 두개의 다른 체계이면서 성경을 읽는 두개의 다른 방식이다.

 


 

루터가 5개 조항을 발표한지 오직 17년이 지난 1534년에 헨리 불링거(Henry Bullinger)가 언약에 관한 첫 번째 논문인 '유일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 또는 언약에 관하여'(Of the one and Eternal Testament or Covenant of God)을 저술하였다. 불링거는 종교개혁의 초기에 활동했던 스위스 개혁자였다. 개혁파 신학자들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 근거하여 성경을 직접 주해하는 연구방법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성경 이해에서 언약이 차지하는 중심적 역할을 재발견하였다.

 


 

불링거와 그의 앞서 활동했던 쯔빙글리(Zwingli)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사상은 언약이란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언약신학은 초대 교회의 어거스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상일 뿐 아니라 개혁파 전통이 지닌 신학의 중요한 통찰중 하나이다. 개혁파 전통의 다른 표현인 장로교 전통과 사상을 같이 하는 자들은 언약적 가르침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즉각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쯔빙글리와 불링거를 따라 언약신학을 강조하였으며, 그들과 같이 성경의 신학 이해와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의 중대한 통일성을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사상임을 수용하였다.

 


 

2. 언약의 공식에서 발견되는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칼빈의 강조점

 


 

언약신학은 어떤 독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첫째로, 언약을 설명하는 어떤 공식이 있다. 칼빈에 의하면 그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이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만날 수 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자면 창세기 17장, 레위기 26장, 예레미야 32장, 에스겔 36장, 고린도후서 6장, 히브리서 8장, 그리고 계시록 21장이다. 이 언약의 공식은 구약에서 시작되어 신약으로 진행된 후에 성경적 계시 안에서 천국으로 진척된다.

 


 

언약의 공식이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들이 되리라" 가 아닌 점에 유의하라. 그것은 단수로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이다. 그것은 구약으로부터 신약과 천국까지 진행되면서 하나님과 관계한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을 잘 드러낸다.

 


 

또한 그것은 언약은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시어 인간과 맺은 관계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나"란 단어에서 발견된다. 언약의 공식은 "우리 협상을 해보자" 내지는 "우리 흥정을 해보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되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단독사역론, 일방적 구원, 주권적 은혜, 또는 칼빈주의라고 부르는데 하나님께서 첫 걸음을 행하기는 특징이 있다. 그가 열심을 다해 우리를 찾으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자를 찾아 구원을 주시려 이 땅에 오셨다(눅 17;10).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행동하시며 그의 주도권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된다.

 


 

다음의 세 본문 예레미야 31;31, 창세기 15장과 17장을 숙고해보라. 베들레헴의 제롬은 히브리서와 헬라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불가타'라고 불리는 번역본을 만들었는데, 지금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식 번역본이다.

 


 

제롬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의 이스라엘에 관한 책들(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과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의 책들(마태복음부터 계시록까지)이 각각 구분되기를 원했다. 그는 첫 부분을 구약, 둘째 부분을 신약이라고 불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예레미야 31장을 활용하였는데 그곳에 "나는 이스라엘 집과 새 언약을 맺을 것이다"라고 기록이 있다.

 


 

제롬은 '베리트'라는 히브리 단어를 라틴어로 '테스터멘툼'으로 번역하였다. 이 단어는 언약 또는 계약을 의미하는데 유언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베리트'란  무엇을 "자른다"는 뜻이며, 이로써 언약은 희생을 통해 제정되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다. 또한 제롬 후에도 우리는 줄곧 구약과 신약을 두고 성경의 정경을 크게 둘로 나누는 것으로 언급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 31장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우리에게 '구약과 신약' 대신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고 불러야 할 것을 시사한다. 이 사실은 우리가 언약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여기서의 중요한 요점은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언약이므로 언약 사상은 성경 전체의 체계화를 거들어 준다는 것이다.

 


 

3. 성경 해석을 위한 칼빈의 언약적 경구: 언약은 언제나 본질에서 동일하지만, 경륜에서는 그것이 구별된다

 


 

성경의 구약과 신약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서 여기에 담겨져 있는 모든 내용이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으로 깨달으며 읽을 수 있는 방법을 같이 고찰해 보도록 하자. 그러면 어떻게 구약과 신약이 하나로 이뤄지게 할 수 있을까?

 


 

칼빈이 언약의 공식을 강조하는 것과 아울러 그가 성경의 구원역사 이해를 위하여 그가 제시하는 하나의 기본적인 해석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언약은 언제나 본질에서 동일하지만, 경륜에서는 그것이 구별 된다"이다.

 


 

본질이란 무언가가 실제로 어떤 것인가를 의미한다. 경륜이란 어떻게 특정인이 무엇인가를 어떻게 통치하는 가에 대한 이해를 가리킨다. 언약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동일한데 그것은 자기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이다. 그러나 언약은 다르게 실행되어지는데 구약에서는 제사에 의하였듯이 신약에서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를 통해 실천된다.

 


 

우리가 칼빈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성경의 본질은 언제나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역이다. 그러나 메시야께서 무엇을 하셔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 방식은 구약으로부터 신약으로 가면서 바뀐다. 구약에는 피의 제사가 있었으며, 또한 대제사장과 성막 또는 성전이 있었다. 신약 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없다. 이런 것들이 현재는 다르게 실행되어진다.

 


 

그런 까닭에 구약 시대에는 은혜의 언약이 동물 제사, 관례들과, 음식에 관한 법, 그리고 대제사장 등으로 실행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메시야를 세상에 오도록 하는데 사용된 비계와도 같다. 현재는 그가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구원 사역을 다르게 실행하시는데 더구나 구약의 언약에 대한 경륜은 끝났다. 그러므로 그것의 가시적 기호와 습관들은 제거되었다. 

 


 

4. 그리스도가 성경의 핵심이신 한편, 언약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언약의 실체에 대하여 언급하는 다른 방법은 언약의 공식으로 요약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경륜이 시간이 흘러 변화가 되어도 항상 성령의 핵심으로 남아 있었다. 다른 경륜 가운데서도 변화되지 않는 실체의 이중 강조를 설명하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교 교인의 관점에서 신약 시대에 우리는 믿는 자의 자녀에게 세례를 베푼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의 믿는 자의 자녀들이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할례와 세례는 아주 다른 경륜이지만 그 실체는 매우 동일하다. 둘 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사실을 밝힌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성례전은 그가 오신 후에 비해서 다르게 시행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이나 동물의 피를 흘리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구속적 희생을 가리켰는데, 이런 방법으로만 이 세상의 죄를 진정으로 없애실 수 있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고 그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제사의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

 


 

마찬가지로 유월절은 주의 만찬이 되었다. 이 변화는 필요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더 이상 피 흘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유월절 양을 잡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모두 이루셨다. 유월절은 언제나 언약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켜왔다.

 


 

언약의 차이점은 그것의 형태에 있다. 언약의 연속성은 유월절 양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로 인하여 자기 백성을 향한 진노를 거두셨으며 또한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그 피를 우리 마음의 중심에 놓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계속하여 유월절의 빵과 잔을 기념한다.

 


 

5. 성례들의 이해를 통한 칼빈의 언약의 집합적 특성

 


 

마지막으로 세대주의자들이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그리고 언약신학의 입장에서 다르게 보는 성례들에 대한 몇 가지 관찰들을 제공하려고 한다. 이 방대한 토픽은 성찬, 세례 그리고 유아세례 관점에서 성례들의 특성, 의미 그리고 실행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를 간단히 언급하기 위하여 언약신학은 성례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전체 공동체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세대주의는 성례들을 좀더 개인적인 의미로 경향이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

 


 

세대주의의 개인주의적인 경향은 세상을 점점 험악해져 갈 것이라는 신념과 병행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한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바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자 개인이 천국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개인적 구원의 즐거운 소망을 축소시킴이 없이 언약신학은 여호수아와 함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길 것이다"고 단언한다.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의 집합적 특성을 인식하고 있다. 구약으로부터 세대사이에 표현된 언약공식 "나는 너희의 하나님과 너희 이후 너희 자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의 천대에 이르기까지" 이 구약 약속들이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효력이 있는 것에 근거하여 칼빈과 언약신학은 특별히 유아세례에 표현된 대로 언약의 집합적 특성을 단언하였다.

 


 

칼빈은 유대인들과 함께 언약이 새 언약 시대에로 계속된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나 다름없다고 역설한다. 칼빈에게 있어 그러한 부인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넓히는 것보다 좁히는 것을 내포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직도 진리의 분명한 지식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참으로 언약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은 오늘날에도 옛날에 유대 백성에게 못하지 않게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이 사역은 그 때에 유대인들에게 연관되었던 것과 못하지 않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연관되어 있다.

 


 

아마 우리가 그의 오심에 의하여 그리스도 아버지의 은혜를 경감하거나 삭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러나 이것은 저주받을 신성모독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자녀들 역시 그들이 그의 언약의 상속자들로 되어 있고 그리고 경건치 못한 자들의 자녀들로부터 구별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씨라고 불려졌다.

 


 

동일한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도 거룩하다고 고려되어 진다. 그리고 비록 한편만 믿는 부모에게서 출생하였다할지라도, 사도의 증거에 의하여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의 불결한 씨와 다르다. 이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직후 외적 성례에 의하여 유아들에게도 검인하라고 명령하셨음으로,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증거하지 않고 검인하지 않는 무슨 핑계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구약의 자녀나 신약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동일한 언약적 약속에 의하여 거룩한 씨이다. 따라서 유아세례는 할례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 칼빈은 구약의 언약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새 언약 시대의 믿는 자들을 단지 예시한다는 핑계를 받아드리지 않는다. 이것은 그렇게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은 기독교인 믿는 자와 그들의 자녀들 역시 포함하기 때문이다.

 


 

"자녀"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 그들은 이 차이점이 발견 한다: 그의 씨로부터 그들의 기원을 갖는 자들은 구약 하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의 믿음으로 시작하는 자들은 그의 이름에 의해 불러진다. 그들은 할례를 통하여 언약의 교제로 접목되어진 육체적으로 유아는 신약의 영적 유아를 예시되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죽지 않은 생명으로 중생되어진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 속에서 우리는 진리의 희미한 불꽃튀김을 본다. 그러나 이러한 변덕스런 영들은 마땅히 앞으로 좀더 나아가야 곳에서 무엇이든지 먼저 손에 잡히는 대로 붙잡고 그리고 완고하게 마땅히 다른 것과 함께 비교하여야 할 곳에서 한 말에 달라붙어 엄한 죄를 짓고 있다.

 


 

우리는 따라서 반듯이 더 나은 목표를 겨냥해야 한다.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바로 그 분명한 성경의 인도하심에 지도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가 그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 받게 될 후손을 가질 것과  동시에 여호와가 그의 하나님과 그 자손들의 하나님이 이 될 것을 약속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복의 저자로 영접하는 자는 모두 이 약속 상속자들이고 그리고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려진다.

 


 

칼빈의 요점은 이 반론에 진리의 한 요소가 있지만 이것이 모든 두드러진 성경적 자료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손이 믿음에 의한 미래 아브라함 자손들을 예시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손에게 하신 약속을 제거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가 그의 하나님과 그 자손들의 하나님이 될 것을 보증하셨다.

 

칼빈의 반응은 이거냐 저거냐가 아니라 둘 다 이다. 세례의 실행에 함의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약속의 상속자들이다. 더욱 믿음에 의해 그의 자손 된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의한 아브라함 자손들 역시 약속에 완전한 참여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도 지금 그의 가족의 일원들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새 언약시대 안에서 적용하는 것을 계속한다.

 


 

유아세례에 대한 칼빈의 논증에 비판은 언약의 유일한 표증은 할례인데 그것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언약은 그 표증이 폐기되었음으로 그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칼빈의 대꾸는 표증의 변경이 언약을 변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오래 전에 폐기된 할례가 아닌 다른 상징에 의해 그의 언약을 확증하는 것을 명령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나를 대항하여 반대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에 대하여 준비된 대답이 있다. 구약시대에는 그의 언약을 확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할례를 제정하셨다. 그러나 할례가 폐기된 후에는 그의 언약을 확증하기 위한 동일한 이유(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가 아직도 유효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항상 부지런히 무엇이 둘에게 보편적이고 그리고 무엇이 우리에게 떨어졌는가를 살펴야 한다. 언약은 보편적이고 그리고 그것을 확증하는 이유도 보편적이다. 다만 확증하는 방법이 다르다. 그들에게는 할례이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세례로 대치되었다. 만일 할례에 대한 대치가 없다면, 그렇다면 칼빈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가시키기보다는 실제로 모호하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점에서 만일 유대인들이 그들의 후손의 구원 보증되는 증거가 우리에게서 제거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의 은헤를 더욱 모호하게 하는 영향을 가질 것이고 그리고 전에 유대인들에 했던 것보다 우리에게 적게 입증될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무한하신 선하심이 더욱 선명하게 자유스럽게 지구 위에 부어지고 어느 때보다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지는 이 때에 그리스도를 심하게 비방함이 없이 이것을 말할 수 없다.

 


 

칼빈의 언약적 해석학을 따르는 신약시대 언약 신학자들로, 우리는 구약시대에 백성이 그들에 주신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들의 집합적 특성을 이해했던 것처럼 언약 공동체의 집합적 특성과 함께 우리의 성례적 삶에 관심을 기우려야 할 것이다. 이 언약적 약속들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전 가정과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인격적으로 집합적으로 장성해 가는 중요성을 포함하고 있다.

 

결론

 


 

아직도 추구해야 할 칼빈의 언약적 사상과 관계된 몇 개의 영역이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이 성경 해석과 그리스도 안의 구원의 유익, 그리고 기독 윤리와 교회의 성례전의 삶을 구약으로부터 신약까지의 구원 역사에서 시종일관 드러난 하나님의 유일하며 영원한 은혜의 언약의 중요한 표현으로 여겼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려 한다. 비록 칼빈은 세대주의 자체와 마주칠지는 않았지만, 언약에 관한 그의 이해는 세대주의의 기본적인 명제들을 직접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언약의 은혜를 누리는 신약 시대, 칼빈 탄생 500주년도 포함되어 있는 이 시대에, 언약을 성경적, 언약을 신학적 수고의 중심적인 원리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자. 칼빈은 시편 25:10에서 주석한 것처럼 자신을 분명히 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언약 안에서 견뎌낸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일 것이라고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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