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언약신학

13장.언약의 완성

호리홀리 2014. 12. 17. 22:24

   13장.언약의 완성


 

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히12:24)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기위하여 정하셨던 것은 그 아들을 중보자로 지정하신 것이다. 중보자의 직책을 수행하기위해서 인간으로 오셨고 세례를 받으셨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 받으셨다.(마28:18)

 


 

우리가 새 언약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자신을 기탄없이 하나님께 내어줌으로(고후8:5) 신실하게 이 언약을 지키면 인자하신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며 승리하게 하신다.

 


 

첫째,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선지자직을 가지셨다.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전하는 선지자의 직책이다.

 

둘째,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속죄와 중재의 직책을 가지신 대제사장으로 지정되신다.

 

히2:17절에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대속하려 하심이라’ 죄없으신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죄인 되었으므로 그 백성은 그리스도안에서 의인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셋째,중보자 그리스도는 시온의 왕으로 오셨다. 다윗언약의 성취로 오신 그리스도는 하나님나라의 왕으로서 통치권을 가지신다.

 


 

2,갈라디아서 4장 21-31절의 두 언약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두 어머니, 두 산, 두 언약이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이것이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갈4:22-24)

 


 

사라와 하갈은 두 언약의 대표로 비유된다. 곧 시내산언약과 그리스도언약이다.  23절은 ‘계집 종에게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5절에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이다’  여기의 시내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시내산언약을 의미한다. 26절‘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여기의 예루살렘도 지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언약의 상징 곧 다윗언약에서의 시온과 같은 의미이다. 어머니라는 표현도 종의 반대말로 사용된다. 곧 사라를 열국의 어미로 칭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언약을 가르킨다.

 


 

시내언약은 ‘육체를 따라났고‘ 이 말은 다른 이방으로부터 차단하기위하여 율법아래 엄격한 ’먹고 마시는 것과 육체적 예법‘이 기록되었다. 시내산 언약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 까지만 유효한 것이다.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이삭이 오기까지 아브라함의 권리자였던 것 같이, 종은 자유자가 오기까지 그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54장이 메시야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갈디아서4장에서 보여준다.  사54:1절의 ’잉태치 못한 자‘는 사라를 가르키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갈4:29절을 보면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한 것같이 유대교의 율법이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이다. 31절이 최종결론이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이것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인 ‘자유하는 자’이며 신15:17절의 ‘귀뚫은 종’에 근거한다.

 


 


 

3.‘베리트’와 ’디아데케‘

 


 

구약의 ‘베리트’는 신약에서 같은 뜻인 ‘신테게’로 번역되었으나 ‘디아데케로 번역된 곳이 33군데나 된다.(마26:28,막14:24,눅1:72,22:20...)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경에서도 즉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도 ’베리트‘를 ’디아데케‘로 번역하고 있다. 언약관계가 아닌 유언으로서의 언약은 후손들이 반듯이 지켜야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야곱의 유언,모세의 유언은 언약이라기보다 유언의 관점에서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유언은 그대로 되었다는 점에서 언약인 것이다. 모세의 모압언약이나 여호수아의 세겜2차언약도 유언형식으로 되어있다.

 

신약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관해서 ‘디아데케’를 더 강조하고 있다.

 


 

4.디아데케와 에팡겔리아

 


 

히브리어 성경에서 단지 '뻬리트(언약으로만 번역)' 단어 하나로 사용되던 것이 헬라어성경에 이르러서는 '디아데케'와 '에팡겔리아'로 구분되고 있어서, 히브리어 성경의 '언약'이라 번역된 모든 곳에서, 이것이 디아데케 개념인지 아니면 에팡겔리아 개념인지를 분별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 신학에서는 '디아데케(언약)' 개념에 대해서는 '행위언약'이라 표현했고, '에팡겔리아(약속)' 개념에 대해서는 '은혜언약'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문제는 이러한 표현법이 성경적 사고에는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언약' 곧 디아데케라는 말은 '성취'개념과는 어울릴 수 없는 오직 '옛' 언약과 '새' 언약 이라는 말과 같이 신구의 '更新' 개념을 수반한다. 다시 말해 '팔라이아스(old)'와 '카이네스(new)'의 갱신을 수반하는 개념이 바로 '디아데케'이나,

 


 

이루다, 달성하다 등의 '성취'개념을 수반하는 말은 '에팡겔리아' 곧 개역성경이 '약속'이라 번역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니까 언약갱신, 약속성취인 것이다.

 


 

디아데케와 에팡겔리아라는 말이 모두 사용되고 있는 엡2:12에서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는 말씀에서 '약속의 언약' 곧 '톤 디아데콘 테스 에팡겔리아스'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여러분들은 이방인들이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는 외인이다'라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런데 또 다른 곳에서 바울은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롬9:4)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디아데카이'(언약들)와 '에팡겔리아이'(약속들)가 있다는 곳에서 역시 이 두 말이 각각 나타나고 있다. 같은 말이라면 각각 쓰일리 없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 말로는 言約과 約束이 별반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성경의 디아데케와 에팡겔리아라는 전혀 다른 말이다. 종교개혁 직후 코체이우스라는 신학자에게 시작된 '언약신학'이 지금까지 중요한 신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두 개념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다.

 


 

존 브라이트가 쓴 'promise and covenant'라는 책에서 '디아데케'를 개역성경은 言約이라 번역하지만 영어로는 'covenant'로, 우리 개역성경의 에팡겔리아는 'promise'로 번역하고 있는데 따른 것이다.

 


 

'디아데케'와 관련하여 누가복음 1장 72-75의 말씀 곧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는 의미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5.언약체결식과 성찬

 


 

신약시대의 성찬식은 구약의 언약체결식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늘날의 성찬식은 언약갱신 체결식이다. 언약을 갱신하는 체결식인 것이다. 예수께서 이를 지정하시면서 이는 언약의 피 곧 피언약이라 하셨다. 단순한 최후의 만찬이 아닌 것이다.

 


 

시내산언약체결식부터 보여주는 제의적절차는 번제와 화목제이다. 이후 언약체결식은  이 두가지 제의적절차가 동반된다. 이러한 언약체결식은 결혼식으로 묘사된다. 화목제물은 일종의 피로연인 것이다. 이것은 성찬식과 정신을 같이 하는 피언약인 동시에 언약공동체로서의 교제도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번제는 모두 태워서 하나님께 올리는 수직적인 것이라면 화목제는 언약공동체가 먹고 마시는 수평적인 것이다. 성찬역시 하나님과의 언약체결식이라는 수직적의미와 공동체가 교제하는 수평적의미도 같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식을 할 때에는 언약갱신체결식을 강조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생각하여 언약을 지키며 공동체와의 교제를 통해서 언약공동체임을 확인하고 그리스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하겠다. 그런데 오늘날의 성찬은 점점 의식화되고 형식화 되며 간소화하고 있다.

 

번제와 화목제의 제의적절차와 오늘의 성찬이 다른 것은 성찬은 번제,화목제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예수그리스도의 피흘림이다. 나를위해죽으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와의 언약체결식인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재림도 선포된다는 것이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6.할례와세례

 


 

이제 우리는 언약의 표지인 할례와 세례를 비교해 볼려고 한다.

 

‘베리트’(언약)라는 말은 동사 ‘카라트’(자르다)에서 왔다. 언약을 맺다는 말은 언약을 자르다는 말이다. 잘라서 피를 뿌리는 피언약은 생명의 언약인 동시에 죽음의 언약이기도하다. 지키면 생명이지만 어기면 죽음인 것이다. 예레미야는 언약파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언약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이 ‘두 조각난 송아지 사이로 지나갔다.’라고 죽음을 상기시킨다.(렘34:18) 그러므로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은 잘라지는 것이다. ‘그들의 사체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다.‘(렘34:20)

 


 

창17장에서 언약에 대한 표시로 하나님은 할례를 요구하셨다. 할례는 생식기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 곧 언약의 표지인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 세례는 단순히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언약백성이 되는 표지로서의 영적할례인 것이다. 할례는 언약의 표지일 뿐이지만 세례는 언약의 표지와 함께 죄씻음도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가 구원의 표지는 아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베드로의 최초의 복음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41)

 


 


 


 


 

7.율법과 복음

 


 

율법                           복음

 

인간의 행위 요구              하나님의 요구

 

엑스레이                       치료

 

죄 깨닫음                      구원

 

정죄                           격려,위로

 


 

8.율법과언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