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언약신학

노아 언약

호리홀리 2015. 6. 22. 19:35

 

 

노아 언약

 

여자의 후손에 의한 구원의 약속이 주어진 이후,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통해서 그의 후손들에게서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아담 안에서 여자에게서 나는 아담의 모든 후손은 죄 아래서 사단을 추종하여 그의 왕국을 이루는 사단의 후손 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셔서 사단의 후손과 적대하는 여자의 후손 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성경은 그에 대한 기록을 창세기 3장 20-21절에서 아담이 그 아내 이름을 하와라 이름 지음으로써 그녀가 온 인류의 어머니가 될 것과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시는 것에서 해주시고 있다. 성경은 그에 따라서 4장에서부터 5장에 이르기까지 죄 아래에 있는 사단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되는 두 부류의 사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4장은 아담의 자손인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등장한다. 아담은 가인을 낳고는 ?하나님께서 돌봐주셔서 내가 사내아이를 얻었다?라고 하여서 이름을 ‘얻음’이라는 뜻을 지닌 가인이라고 지었다. 아담이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은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담은 그 아들에게서 창세기 3장 15절에 말씀하신 '후손'인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아담의 기대는 산산이 무너져버린다. 가인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만한 의를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가인에게서 오히려 슬픔을 겪는다.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이기 때문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게서 나는 모든 인류에게서 보게 되는 ‘죄의 힘’을 말해준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대담히 살해하는 살인죄를 저지른다. 그러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다. 그 죄는 감추어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여실히 드러나는데도 결코 회개하지를 않는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고 하였다. 가인의 마음에서 우리는 전적 타락한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봅니다. 완전 부패한, 그래서 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죄성을 띤 마음이 타락한 죄인인 인간의 마음이다.

가인에게서 보는 죄는 그가 제사를 드리지 않은 데 있지 않다. 그는 제사를 드렸으며 이는 그 동생 아벨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인이 아벨처럼 짐승으로 제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해준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아벨이 하나님께 가인이 드린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제물을 드린 것은,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린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벨과 그의 제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심으로 증명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믿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대체적으로는, 가인이 ‘피 있는 제사’를 드리지 않은 데서 그 대답을 찾으려고 한다. 아벨은 짐승을 제물로 삼아 피 있는 제사를 드렸으나, 가인은 곡식을 제물로 삼아 피 없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인의 이러한 처신은 그가 ‘속죄의 은혜’에 대한 아무런 믿음 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당시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었기 때문에 수확한 곡식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가축을 치는 목자였기 때문에 양이 낳은 새끼 중에서 첫 번째 것을 잡아 제물로 드린 것으로, 이들이 제물 삼은 것의 차이에 의해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서 피 있는 제사와 피 없는 제사를 드린 것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분석하면,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것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린 것은 ‘믿음’ 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심으로 그가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의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증명해 주셨다.

이렇게 아벨의 ‘믿음’이 말해지고 있는 것이 아벨이 드린 제사였다. 그러면 아벨에게 있은 믿음 그 믿음이란 것은 무엇인가? 이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약속에 근거하여서 말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 15절에서 범죄하여 타락한 아담에게 구원의 약속이 주어짐 속에서 그 후손인 가인과 함께 아벨의 제사가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인과 아벨은 다 같이 아담의 후손이다. 즉, 첫 사람 아담 안에서 죄인 된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주신 구원의 약속을 실천해 나가신다. 그리고 구원의 약속이 주어지는 ‘여자의 후손’의 선택으로 아벨이 등장한다. 여자의 후손인 그는 사단의 후손과 적대 관계에 있게 되는데, 그것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믿음’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오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이는 가인에게서만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동생인 아벨에게서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 전에 택정하신 아벨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은혜를 입히셨다. 이 은혜는 아담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육은 육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죄성의 아담에게서는 그 후손에게 역시 죄성만 전해진다. 이것이 원죄의 전가설이다. 그러한 아담의 후손인 아벨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은혜는 그의 조상인 아담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즉, 혈과 육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죄인 된 사람인 아담과 상관없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경건한 자를 아담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약속하셨다. 이 여자의 후손은 아담의 몸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정에 따라서 아담과 상관없는 여자의 몸을 통해서 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 모두가 다 아담의 후손이나, 아벨은 하나님의 택정하심을 입은 자로 오는 ‘여자의 후손’이다. 하나님은 그를 창세기 3장 15절의 구원의 약속인 ‘의’ 속에 두시고서 그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이끌어 가신다. 그래서 그를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게 하시는 것으로 가인과의 제사 속에서 그가 ‘믿음으로’ 있은 것에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리는 일이 있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의 의는 창세기 3장 15절의 구원의 약속과 상관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 그에 대한 이해와 그 믿음 속에서 제물을 바쳐 제사를 드린 것이다. 창세기 4장 4장에서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라는 제물에 대한 설명도 아무런 뜻 없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닐 것이며, 이는 필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바라보아 의존하게 하시는 것으로서의 계시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즉, 아벨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의존하여서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말씀에 따르는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아벨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의한 ‘여자의 후손’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가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 실현되는 것을 보여준다. 아담의 후손인 가인과 아벨은 어렸을 때부터 필시 그 부친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과 함께 그들이 참여하고 또한 드릴 제사 생활을 배웠을 것이다. 가르침과 직접 제사에 참여하는 것에서 말이다. 그것의 중심은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언약에 관한 내용이다.

아담은 가인과 아벨을 낳고 하는 가운데서 '여자의 후손'이 육체의 후손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 오는 은혜인 것을 점차 깨달아 갔다. 그러한 사실은 그가 두 번째 아들을 낳고서는 그 이름을 '아벨'이라고 부른 데서 잘 알 수 있다. 아벨이란 이름의 뜻은 ‘무’(無), 그러니까 ‘헛되다’ 이다. 이를 통해서 아담은 '여자의 후손'을 거시적(巨視的)이고도 원시적(遠視的)으로 보다 새롭게 인식하였음을 볼 수 있다. 아담은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며 소원을 갖는 기원제(祈願祭)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는데 대한 감사제(感謝祭)를 드리며, 그 믿음을 아들들에게 계승시켜 갔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거론되고 있는 문맥 전후에서 충분히 인지(認知)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임을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보여준다. 그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아벨의 믿음이 말해지고 있다. 그가 어떻게 ‘믿음으로’ 살음으로써 사단의 후손과 대적하는 삶을 살았는지, 곧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죄에 대하여 싸우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드린 아벨의 제사인 것이다. 


구속사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아벨의 죽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라고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한다’ 라고 말하여 가인에 의해서 죽은 아벨에게서 우리는 지금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벨은 비록 죽었으나 그 후에도 그를 믿음으로 살게 한 그 믿음은 여전히 말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이것은 아벨 이후의 ‘여자의 후손’에게서 본다. 하나님은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셋을 주신다. 아담은 130세 되던 해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고 지었다. 아담이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하여서이다. 아담은 아벨이 죽은 후 아내 하와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씨’를 본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아벨을 잃은 슬픔 중에서 다시 아들을 얻고서 그 아이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 것이다. 그것은 아벨 대신에 주신 아들에게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자에 대한 위로와 소망을 계속해서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이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그에 대한 믿음 속에 있게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셋의 출생과 관련해서 주목할만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던 날 하나님의 형상 곧 그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는 그 이름을 ‘사람’이라 저어 부르셨는데(창5:1-2), 아담이 아들인 셋을 낳을 때는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창5:3)이라고 하고 있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한 죄인된 아담 안에서 낳은 모든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사람이 아닌, 아담의 형상 곧, 단지 흙에서 나온 형상, 그러니까 흙에서 나온 몸으로서의 육의 사람의 형상인 것이다. 하나님이 떠나고 죄의 지배 아래 있어 사망이 왕노릇하는 사람에게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없이 다만 죄인 된 아담의 형상인 육으로서의 형상만 남아 있다.

그러한 아담에게서 하나님께서는 셋을 주셨고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지어 불렀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의 은혜를 입히셨다. 여기서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것은 그 이전에는 여호와란 존재를 알지 못했고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데 에노스 때에 와서야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의 비로소는 접두사 'upon'이란 단어가 쓰여졌다. 이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데,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근거하여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셋과 그의 계열인 에노스, 곧 셋 계열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그들 자신에 의하여 계시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세상 나라 사람들 앞에서 셋과 그 후손인 에노스는 "우리들의 생명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담대히 말하며 사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보인 하나님의 의는 여자의 후손이 뱀(사단)의 머리를 깨뜨려 부수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그와 같이 경건함을 가지고 살아갔으며, 이는 노아의 홍수 시대에 이를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자들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사실에서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알게 해주시고 있다. 이 사실을 보아야 한다.

이 사실은 가인의 계열에게서 보는 ‘뱀(사단)의 후손’의 삶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것에서 더욱더 잘 나타난다. 아벨을 죽인 가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형벌의 내용은 그가 더 이상 땅에서 혜택을 입지 못하고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죽인 아벨의 피를 땅이 입을 벌려 받아들인 까닭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의로운 아벨을 죽인 피 값이 가인이 농사짓는 땅에게로 돌아가고 결국 그 저주가 가인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땅이 더 이상 가인에게 곡식을 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인은 땅에서 농사를 지어도 아무런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음의 심판 아래 있는 자의 고통스런 불행을 경험하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탄뿐이다. 뿐만 아니라 가인은 이 땅에서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쉴 곳 없는 가인의 처지는 안식을 잃어버린 자의 모습이다.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고서는 그 벌이 너무 크고 무거워 견딜 수 없다고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이 땅에서 쫓아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정처 없이 헤매게 한다면 필시 자기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기를 죽이려 들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하나님은 결코 가인을 헤치는 자가 없을 것이며, 만일 누군가가 가인을 죽이려는 사람이 있을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곱 배나 무거운 벌을 내리겠다고 다짐시켜 주었다. 그리고 나서 가인이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의 몸에 표를 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하나님의 앞을 떠나 에덴 동편에 이르러 '유리함'의 뜻을 지닌 놋 땅에 거주하고 살았다.

놋 땅에 거한 가인은 그곳에서 아들을 낳고 그 세력을 펼쳐갔다. 그러나 그 가인의 후손들에게서도 계속되는 죄의 무서운 힘을 보게 된다. 가인의 후손은 세상 나라 문화의 중흥을 꾀한다. 가인의 아들인 에녹은 성읍을 건설하며 위용을 떨쳤고, 이후 이랏-므후야옐-므드사엘에 이어지는 라멕은 두 여인에게 장가들어 육체의 쾌락을 꾀하는 정욕적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싸우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 손자인 야발은 목축업에 성공하여 그 이름을 후세에 남겼고, 그 아우인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연주하는 음악가의 조상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야발의 이복 형제인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는데 그는 쇠나 놋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대장장이였으며, 이로부터 문화의 발전은 급상승하게 된다. 기계 발명은 세상 문화의 전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온 것이 세상 문화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무기의 발달로 이어져 서로 간에 죽이는 일을 예사롭게 여기는 죄의 극치를 보게 된다. 라멕이 노래한 것을 보면 그는 두 아내를 거느리는 자였고,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고 헤치는 일을 예사롭게 하며 즐긴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그는 가인과 자기를 견주어 말하기도 하였다. 가인을 죽이면 그 대신 일곱 명을 죽여 그 앙갚음을 하겠다고 하였지만 라멕 자신을 죽인다면 일흔 일곱 명을 죽이는 앙갚음을 하겠다고 말이다. 그가 얼마나 포악한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가인의 계열에서는 죄의 문화가 중흥하며 그 세력이 확장되어 갔다. 하나님이 없는 자의 문화가 이렇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자가 살아가는 세상 나라는 죄가 득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인의 계열이 보여주는 것은 땅이 그 입을 열어 가인이 죽인 의로운 자의 피 값을 저주로 찾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땅에서 얻는 것이 아무리 크고 위대하며 문화의 중흥을 꾀하는 것일지라도 전혀 복이 되지를 못하고 저주가 되니 죄 값은 사망일뿐이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열의 사람에게서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란 것의 성취인 ‘죽었더라’가 인생의 결국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런 세상 나라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한 여자의 후손을 아벨 이후에 다시 아담에게 주셨다. 셋이 그인데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진 경건성은 그 아들 에노스에게로 이어진다. 이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당시 하나님이 없이 사는 세상 나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생명의 주가 여호와 하나님이신 사실을 담대히 말하며 사는 믿음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보인 하나님의 의는 여자의 후손이 뱀(사단)의 머리를 깨뜨려 부수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하나님은 뱀(사단)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의 사이에 있게 되는 적의(敵意)와 그에 따른 싸움을 이런 식으로 세상 역사 앞에서 펼쳐 나가셨다. 이런 그들은 비록 죽음이 그들을 삼킨바 됨으로써 ‘향수하고 죽었더라’에 있게 되지만, 그래서 가인과 그 후손에게서 보는 대로 죄 값인 죽음을 당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녹)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않더라”(창5:24)고 말한 바와 같이 에녹에게서 보는 대로 뱀(사단)의 후손과 적대 관계에 있어 죄와 싸워나가는 ‘여자의 후손’은 뱀(사단)의 머리를 부순 ‘여자의 후손’인 메시야에 의해서 그들의 생명이 죽음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로 옮겨져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 

노아 언약 

하나님께서 노아와 관계하신 사건의 기록에서 ‘언약’이라는 명백한 용어가 창세기 6장 18절에서 맨 처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언약은 단순히 노아 한 개인의 차원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계시 방편이다. 노아 언약은 하나님께서 앞서 언약하신 창조 언약, 아담 언약, 그리고 ‘여자의 후손’에 의한 구원의 약속에서 계시해 주시고 있는 데 따른 연결고리에 의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보존’이다.

하나님은 노아 언약을 통해서 앞으로 주실 아브라함 언약을 펼쳐나가신다. 노아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항상 악할 뿐이므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이을 자를 하나님은 구원하시고 그에게 생명의 보존을 언약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계획을 준비해 나가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계시된 구원 언약의 필요 불가결한 서론이 된다 할 수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노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후손들은 그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이 ‘항상 악할 뿐’으로서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다. 사람들이 불어나기 시작하면서 땅 위 곳곳에 퍼져나가 살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다”(창6:12). 그래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못된 악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노아 시대에서의 아담의 후손들의 악함은 이전의 사람들과는 차이 나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이전에는 뱀의 후손으로 대변되는 가인의 계열에서의 두드러진 악한 죄성의 발휘와 여자의 후손으로 대변되는 셋의 계열에서의 하나님의 의가 대조적으로 다루어져온 반면에, 노아 시대에서는 인류의 죄를 총체적 관점에서 고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특별히 셋의 계열인 하나님의 아들들과 가인의 계열인 사람의 딸들의 통혼의 계기가 당시 죄의 관영을 급속히 부추긴 사실을 우회적으로 시사한다(창6:1-3). 이후 성경역사 속에서 ‘죄의 관영’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함을 도처에서 지적한다(창15:16; 18:20-21, 눅17:26-30). 이런 원리에 근거하여서 신약의 기자는 죄의 값은 사망이요(롬5:12; 6:23), 그 결국은 종말론적 심판임을 경고한다(히9:27) 따라서 노아 시대에 내린 온 세상을 멸망시키는 홍수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을 통해서 사실은 죄를 고발하고 정죄하며 심판하시는 성격의 것으로 장차 있게 될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을 예표한다.

한편, 창세기 저자가 말해주고자 하는 노아 홍수의 본질적인 성격은 노아를 포함해 여덟 식구가 당시 모든 인류가 물 심판을 당한 것에서 구원 받는 것에서 이들의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해준다(창6:8). 노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특성은 그의 의로움에서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특이성에서 나타났다. 노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특이성은 구원 언약 속에서 계속 나타나는 주제로 사도 바울에 의해 강조된 것처럼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의 경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선물로서 오게 되는데(엡2:1-2; 8-10 참조), 이는 여자의 후손 언약 속에 암시된 구속의 원리에 근거한다. 이는 인류의 초기역사 때부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시행되는 주권적인 선택의 섭리역사가 시행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노아와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창6:18). 하나님께서 ‘내 언약’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이 언약의 세우심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과 그 계획이 항상 악할 뿐으로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을 드러내시는 홍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에서 하신다. 그리고 그 언약의 내용은 땅 위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모두 쓸어버림으로써 모든 것이 다 죽고 말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노아와는 언약을 맺어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며느리는 구원하여 주실 것이므로 노아가 지은 배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또한 살아 숨쉬는 것은 무엇이든 암수 한 쌍씩 배 안으로 들어가게 하여서 목숨을 보전케 하시겠다고 하였다.

여기서 ‘언약’이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는 일은 창세기 9장 1-17절에서 이다. 이렇게 앞으로 창세기 9장에서 세울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은 창세기 6장 18절에서부터 말씀하셔서 6장에서 9장에 이르기까지에 있게 되는 홍수를 6-9장의 전체 언약에 속한 경험(covenant experience)으로 있게 하시고 있다.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기 위해서 먼저 그에게 은혜를 입히는 일을 해오셨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라고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에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한 것은 당시의 사람들의 실상과는 대조되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앞 절인 8절에서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직 악한 죄성만 보이는 타락한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에게는 그들과 대조되는 은혜를 보이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노아로 하여금 그 시대 사람들의 타락 상태로 빠지지 않게 하셨다. 노아의 이런 은혜 상태는 하나님 은혜 외에 다른 것에서 나왔다고 지적하는 것은 없다. 노아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말뜻이 죄악된 상황에 자비를 베푸는 식의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은혜’라는 단어는 용서받지 못한 죄인에게 거주 주시는 자비로운 태도를 뜻한다. 노아 시대에는 사람이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노아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음으로써 노아는 사람들이 항상 악할 뿐인 당시에 의로운 사람으로 있을 수 있었다. 노아가 의로운 사람인 것은 그에게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될만한 ‘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실로 말미암아서 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노아에게 은혜를 입히셔서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있게 하신 것은, 곧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의로움에서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하나님 계획의 특이성에 따른 것으로, 그에게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보이게 하여 그가 어떤 자인지,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세상 앞에서 증거로 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는 것으로 처음 말씀하신 것은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가득 차 그들의 끝 날이 이르렀으므로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실 것인데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창6:17),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창6:18-20)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노아를 물로 심판하는 홍수에서 구원하실 것이며, 또한 그와 함께 배에 들어가는 그의 가족들도, 그리고 동물들의 생명까지도 구원하시겠다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을 통해 전개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의해서 언약의 중보자기 될 노아를 택하사 자신의 은혜를 무한히 베푸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선택하시고 그를 의롭게 하시고 또한 전우주적인 홍수의 심판에서 그를 건져내시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고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실 그 언약 때문에 그분은 노아뿐만 아니라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의 생명까지도 보존하셨던 것이다.

홍수 이전에 노아와 세우신 언약의 내용의 특징은 땅에서 숨쉬는 모든 것을 다 물로 쓸어버려 죽일 것이나, 하나님의 언약을 받는 노아는 그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사실로 인해서 생명을 구원해주시겠다는 것이며, 또한 노아가 하나님과 언약 안에서 구원을 받는 사실로 인해서 노아와 함께 하는 그의 가족과 동물들의 생명도 구원해주시겠다고 한 것이다. 즉, 홍수 심판에서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생명들을 구원해 주겠다는데 언약의 특징이 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실행되었다. 하나님은 배에 들어가는 노아에게 그와 함께 한 모든 생명들이 먹을 양식을 배에 들여보내 저장하게 하여서 홍수가 있는 동안에, 그리고 홍수가 멈춘 후에도 땅에서 물이 다 빠져나가 육지로 나올 수 있을 때까지의 그들의 생명을 보존케 하셨다. 그리고 또한 배에 물이 전혀 스며들어오지 못하도록 배에는 역청을 발라 방수가 되게 하였으며, 배의 문은 완전하게 닫히게 하셨다. 창세기 7장 16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에서의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는 표현은 노아를 임박한 홍수 심판으로부터 철저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홍수가 있기 전에 예비케 하신 방주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동물들의 생명을 보존하심으로 있는 것으로 홍수 심판으로부터의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그 방주가 하나님에 의해 제공된 유일한 구원의 도구였다는 사실은 창세기 7장 23절에 진술되어 있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이렇게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자들만 홀로 그 전우주적인 멸망 후에 살아남을 수 있었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배에 문이 닫히자 곧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엄청난 양의 비는 홍수를 불러 일으켰다. 땅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의 양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여 땅이 터져 물을 쏟아냈다.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붓는 비와, 그리고 땅에서 쏟아내는 물은 낮과 밤 온종일에 걸쳐서 40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한 세상은 물로 잠겼다. 땅 위에 솟아 있는 높은 산봉우리까지도 물속에 잠겼으며, 계속 불어난 물로 급기야는 산봉우리 위로 물이 7미터 가량이나 넘쳤다. 여기에서 살아남은 생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던 모든 것들은 물에 잠겨 모두 죽고 만 것이다. 땅 위에 살아 움직이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가축과 들짐승 및 땅 위에 기어 다니던 길짐승도, 그리고 하늘에 날아다니던 날짐승도 모두 다 죽임을 당하였다. 무릇 뭍에서 살아 숨쉬던 것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만든 방주에 타고 있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과 동물들은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다 죽임을 당하는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살아남았다.

물은 150일 동안 땅을 뒤덮고 있었으며, 150일 째 되던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산 봉우리에 걸리게 되었다. 그리고 물은 계속해서 빠져나가 노아가 601세가 되던 해 정월 초하루에는 물이 모두 빠져 마침내 땅이 말랐으며, 그해 2월 스무이렛날에는 물이 완전히 빠져 땅이 다 말랐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 하리라”(창8:16-17) 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노아는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데리고 배 밖으로 나왔다. 또한 함께 방주에 들어갔던 동물들도 각각 그 종류대로 배 밖으로 나왔다.

배 밖으로 나온 노아는 가장 먼저 여호와께 제사를 올릴 제단을 쌓고 제물로 드리기에 적합한 정결한 짐승과 새를 각 종류대로 가려내어 제물로 잡아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그 제물의 향기를 맡고 만족해하시면서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1-22)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방주에 나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노아에게 다시는 물로 홍수를 내려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땅이 있는 동안에는 씨 뿌리고 거두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에서 이어질 것임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또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 내리시며 이르시기를,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9:1-3) 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노아의 후손의 생육과 번성과 땅에 충만할 것을 말씀하시며, 또한 모든 짐승들을 양식으로 삼을 수 있게 하신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의해서 되어지고 있는 것으로 생명의 주도권이 하나님 자신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는 중에 이미 양식으로 삼고 있는 식물과 함께 짐승들을 양식으로 삼음으로써 그들의 생명이 보존되고 있는 것도, 또한 살아있는 모든 짐승들이 사람들의 양식이 됨으로써 그들의 생명이 사람들을 위하여 제공되고 있는 것도 모두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허락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짐승의 고기를 피째 먹지 못하게 하셨다. 그것은 피는 무릇 그 생명인 까닭이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이 짐승을 양식으로 허락함으로써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무릇 짐승의 생명은 피에 있는 까닭에 그 피의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이 그 피를 함부로 다루지 않게 하시는 것으로 짐승의 고기를 먹을 때는 피째 먹지 못하도록 금하셨다.

그리고 또한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될 것을 말씀하셨다. 만일 사람의 피를 흘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피값을 그에게서 찾을 것을 말씀하셨다. 짐승이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였다면 그 짐승에게서 그 피값을 찾을 것이고, 사람이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였다면 그 또한 그 피값을 그에게서 찾음으로써 사람의 피값, 곧 그 생명을 찾고야 말겠다고 하셨다. 그럼으로써 그도 반드시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침해하는 악을 행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될 이유를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 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하나님은 노아와 그에게 속한 가족들을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지은 사람’으로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한 아담으로 말미암아서 아담의 후손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아담의 형상’, 곧 ‘흙의 형상’, ‘육의 형상’으로 있게 되는데,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 있는 노아와 그에게 속한 가족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 곧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지켜 보호하시며 살펴 가시는 까닭에 그러한 사람의 피를 흘려 생명을 빼앗으면 그의 생명의 주가 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피값의 갚음이 되시겠다는 것으로 “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창9:6) 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동일한 개념이 담긴 하나님의 언약은 후에 아브라함 언약에서도 확인이 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을 약속으로 주시며, 이를 이루기 위해서 그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으로 인도하실 것인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주(主)가 되셔서 그를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이 복을 내리고 그를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이 저주하실 것이니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을 말씀하셨다(창12:1-3).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는 실질적인 언급은 창세기 9장 8-17절에서이다. 1-7절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여 나가실 것을 말씀하신 것에 이어서, 이제 10-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이들의 뒤를 이을 자손들과도 언약을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또한 노아와 그의 가족들과 함께 배 안에 있던 모든 짐승들과도 언약을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처럼 언약으로 세우심으로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약속을 확정하시고 확고히 하셨다. 이 노아 언약은 창세기 9장에 와서 세워지지만, 사실은 홍수 심판이 행해지기 전, 곧 방주에 들어가기 전인 창세기 6장 18절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노아와 세우시는 언약이 홍수 심판이 행해지기 전인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은 홍수에 의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기 전에 이미 노아와 그의 가족이 구원에 포함된 것이 언약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노아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그의 가족들의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작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사실 전우주적인 홍수에 의한 세상의 심판은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시는 것을 위해서 있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온 세상에 말해가기 위하여서 노아 시대에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심판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홍수 전에 노아에게 하신 말씀에서 드러났듯이,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기 위해 그와 그의 가족들의 생명까지 보호해주심으로써 자신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는 노아와 그의 가족 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모든 후손에게도 미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은 대(代)를 이어 당사자의 후손까지도 포함하는 계대적(繼代的)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세우시는 범주가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노아와 함께 방주 안에 들어갔던 살아 있는 모든 짐승들과 또한 땅까지도 포함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에는 사람은 물론이고 생물들과 땅까지도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심판 아래 있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마침내 구원이 완성되면 사람만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만물까지도 새롭게 되는 ‘새 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는 내용은 이미 창세기 8장 21-22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인데,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니…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표명하신 하나님의 뜻을 노아와 언약으로 세우시면서 언약화 하신다. 곧 언약의 내용으로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 언약을 통해서 사람과 생물과 그들이 사는 땅을 보존하실 것을 약속으로 주셨다. 이런 까닭에 노아 언약은 ‘생명의 보존 언약’, 또는 ‘노아의 보존언약’ 이라고 불리운다.

하나님은 노아와 세운 언약에서 나타내 보이시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무지개를 표징으로 주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창9:12-17).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로 노아와 세운 언약은 노아 당대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시기에 자신의 신실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언약도 영원히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에게 속한 가족들과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모든 짐승들과 함께 영원토록 언약을 맺었다는 표징으로 구름 사이의 무지개를 삼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구름 사이의 무지개를 노아 언약의 표징(sign)으로 삼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의 무지개를 이용하여서 언약의 표징으로 삼으로써 이것을 가지고 노아와 그의 가족을, 그리고 그에게서 나는 자손들을, 또한 모든 생물들을 그들을 물에서 구원하시고 또한 생명을 보존해 가시는 하나님에게 예속시키신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신 것을 무지개를 들어서 표징으로 남기신 것은 이 세계는 홍수 전과 완전히 다른 규칙과 질서 속에 들어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고 그 규칙에 모든 생물들이 어쩔 수 없이 예속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무지개를 사용한 것도 일리가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나 지금이나 무지개는 비가 온 뒤, 날씨가 활짝 개였을 때에 나타나는 자연 현상으로 이것이 있기 전에 한바탕 비가 쏟아진 일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지개가 떴다는 말은 잠시 전의 조금 전 까지도 한바탕 비가 쏟아졌다는 것을 뜻하는데, 지금은 해가 짱짱하게 떠 있어 하늘이 맑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물 벼락이 이미 과거 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다시는 물로서는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았다"는 약속의 내용과 잘 부합된다. 그것도 이 세상 안에서의 각 사람마다의 차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갖는 과거와 현재의 차별을 표현했기에 자연물로서 표징으로 삼으신 것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이 무지개의 표징으로 노아와 세운 언약의 내용을 기억하여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을 보이신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노아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의 통일된 뜻을 계시해 주시고 있는 것은 창세 전에 작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서 창조 언약과 아담 언약 및 원시복음에서 약속으로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 의한 하나님 나라의 이룸이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구속하신다. 노아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오게 하는 그들을 물에서의 구원과 그 생명을 보존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최종 목적인 하나님 나라 사상을 상호 연합시키는 성격을 띤다. 이런 관점에서 노아 언약은 이전의 모든 언약과 동질적 상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후 노아의 생명의 보존 언약을 통해 진행되는 것에서도 동일하게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어 가는 것으로서 노아의 세 아들 중 특별히 셈의 계보를 선택적으로 선용하는 일이 있게 된다(창9:26). 그리고 셈의 셋째 아드인 아르박삿을 통해 데라와 아브라함에게까지 연결된다(창1:10; 26).

 

'신학강좌 > 언약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브라함언약  (0) 2015.06.22
창조언약  (0) 2015.06.22
아담언약  (0) 2015.06.22
부록/칼빈의 언약적 성경해석과 세대주의 비평   (0) 2014.12.17
13장.언약의 완성   (0) 2014.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