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언약신학

아브라함언약

호리홀리 2015. 6. 22. 20:09

 아브라함의 언약을 담고 있는 창세기 15장에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을 이루는 ‘믿음’과 ‘언약’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창세기 15:6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정의하며(롬4:3; 갈:3:6),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15:18; 17:4)은 이후, 모세의 중보를 통하여 맺어진 시내 산 언약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출19-24). 따라서 창세기 15장과 뒤 따라 나오는 17장은 신구약 성경의 핵심을 이루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과 그의 백성들의 책임을 아름답게 조화시켜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하)에는 세 가지 말씀이 담겨 있다. 
 (1) ‘두려워 말라’는 가장 중요한 언약문구이다.     

 (2) ‘나는 너의 방패요’와 ‘나는 너의 상급’이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자기 소개 형식으로 주어지고 있다. ‘방패’는 바로 앞 장의 이야기와 이 장을 밀접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앞에서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miggen)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하였다(창14:20). 이제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의 축복을 아브람에게 확증해 주신다. 즉, “이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내가 너를 방패처럼 보호해 줄 것이다.” 언약백성을 보호하신다는 보호의 약속이다. 
 (3)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은 소돔 왕이 주는 상급을 거절하였고, 오직 그의 동맹군들 만이 ‘분깃’을 취하였다(14:24). 여기에서 ‘분깃’은 ‘용병의 급료’이다(Kaiser, 사40:10; 62:11; 겔29:19).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지극히 큰 분깃’이 되시겠다고 약속해 주신다. 오직 하나님 만이 아브람에게 참된 분깃이 되신다(창17:8; 신10:21).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는 진술은 몇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무슨 ‘상급’을 주시려고 하는가? 14장의 전쟁이 아직도 위협으로 남아 있는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아브람이 하나님에게 말한 것이 기록된다(2절). 이 때까지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순종하였다. 15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질문을 던진다. 사실 아브라함은 이 장에서 너무 많은 문제를 던지고 있기 때문에 그가 참으로 ‘믿음 가운데 있는지’ 혹은 ‘그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지 않는지’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창세기의 저자는 그의 흔들림이 없는 신앙을 강조해 주고 있다(15:6).
        (1)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2절). " 씨"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은 아브람의 두려움을 잘 드러낸다. 사라의 불임은 이미 언급되었고, 하나님은 앞에서 아브람에게 세 번이나 큰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12:2, 7; 13:16). 그러나 아직까지 그에게는 ‘자식이 없다’ (레 20:20-32; 렘 22:30). 여기에서 ‘무자하다’는 ‘자식 없이 가다’(halak `ariri)인데, 즉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라는 뜻이다(시39:13).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위기감을 표명하고 있다.
        (2)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 입니다"는 이 구절은 아주 어렵다. ‘다메섹’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14장에서 아브라함이 다메섹 근처에서 승리한 것과 연결시키며, 14장의 사건과 15장 사건 배후에 있는 주제를 묶어준다. 15장은 아브라함이 다메섹의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택된 ‘후손’에 대해 믿음을 갖는 것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강조한다(사 7:4-9).
        (3)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않았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3절).
        다메섹 엘리에셀이 아브람의 유업을 받게 되는 것은 누지(Nuzi)의 관습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되고 있다(올브라잇, 고든, 스파이저). 이 곳에서는 만약에 한 가장이 아들이 없이 죽을 때, 그가 입양한 아들이 상속한다는 관습이 있었다. 따라서, 만약 아브람이 후손이 없이 죽는다면, 엘리에셀이 그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죽기 전에 아들이 태어난다면, 아들이 입양한 아들의 상속권을 되찾게 된다.
        아브라함의 질문은 이 장의 중심 문제에 대한 배경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약속 이행을 늦추고 계신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같은 문제를 직면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된 축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직전에 놓여있다. 약속이 무(無)로 돌아가는 위기에 처하였다(렘25:11). 그러나 예레미야가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궁극적 축복을 약속한다. 이방 땅에서의 포로 기간은 제한이 있다(렘25:12). 다니엘은 바로 이 약속을 기다린다(9:2). 이와 같이 창세기 15장은 조상에게 준 약속을 기다리는 청중들에게 말해준다. 그들은 ‘주를 기다리는 자들’(사 40:31)이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이다(합 2:4).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약속이 이루어지길 기다려야 했다(히 11:13; 벧후 3:4, 9).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4절).  
        주님은 아주 분명하게 대답하신다. "그 사람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 사실을 인각시켜주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신다.’ 때는 밤이었다. 하늘에는 마치 은하수의 별들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속으로 씨름하고 있는 ‘내향적인 아브람’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을 바라보고, 찬란하게 빛나는 별을 보게하시면서,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으리라”고 말씀하여 주신다. 이 표현은 창세기 14:22에 있는 아브라함 자신의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상급에 대한 희망이 ‘하늘과 땅의 창조주’에 있다고 소돔 왕에게 말하였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이 말을 이어 받으시면서, “만약에 내가 하늘에 있는 저 수많은 별들을 만들었다면, 너의 후손도 그만큼 많이 만들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별 같이 많을 것이다”라는 약속은 오경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난다(이삭, 22:17; 26:4; 모세, 출 32:13. 신명기 1:10; 28:62; 민수기 24:17).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는 저자의 주석이다. 아브람은 침묵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의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을 뒷받침 해 준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만약 이 말이 없었다면, 그의 반응에 대한 해석이 모호해 진다. 특히 8절에서의 그의 질문은 그의 의문을 표현한 것 같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저자는 “아브람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계산과 판단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음을 믿었다”라고 평가한다.
        구약성경에서 ‘그가 믿었다’는 “어떤 사람을 의지한다. 상대방의 메시지에 대해 신임하고, 그것이 진실이고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Jepsen, TDOT 1:308).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적극적인 뜻으로 나오는 경우가 드물며, 대부분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사용된다. 왜냐하면, 위기 상황에서 믿음과 불신이 구별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사 7:9; 시 78:22, 32).  
        ‘의’(tsedaqa, tsadiq)라는 단어는 오경에서 의는 대부분 인간의 활동에 적용된다(창18:19; 신24:13; 창 6:9; 7:1; 18:23ff, 28; 20:4; 출9:27; 23:7f; 신 4:8; 16:19; 25:1). 그래서 외밍(Oeming)은 이 용어가 하나님에게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그러나 신 4:8; 32:4에서는 하나님에게 적용된다). 창세기 18장에서는 ‘의인’이 ‘악인’과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을 함께 멸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기도한다. 아비멜렉도 같은 입장을 갖고 있다(창20:4). 노아는 의롭기 때문에 홍수에서 건짐을 받았다(6:9; 7:1). 법의 본문에서는 의인은 재판관에 의해 무죄로 판정된 자이다(신 25:1). 일반적으로 ‘의’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른 행동’으로 정의된다(겔 18:5).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신다 (신 32:4; 시 7:9, 11). 그러나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의를 행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믿음이 올바른 행동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직 구약성경 중에서 오직 여기에서만 믿음이 의로 여겨지고 있다.
       

         요약하자면, 아브람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정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을 때, 그것을 믿었다. 이 믿음을 하나님은 법적으로 ‘의로운 행동’으로 여겨주신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이신칭의의 기본 개념이다.
        

15:6은 7절에서 나타날 내용에 대한 배경이다. 하나님은 이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려고 한다. 이후의 이야기에서 아브람과 그의 후손의 미래가 제시된다(15:7-21). ‘언약’이나 ‘순종’이 그를 의롭다고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으로 그는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그가 의롭다함을 받은 후,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들어간다. 15장 여기에  ‘믿음’이 나타나는 것은 중요하다. 저자는 중요한 순간에 ‘믿음’을 다룬다.
        아브라함은 먼 미래에 대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위로를 얻는다. 이 환상은 아브라함에게 보다, 독자들에게 확신을 준다. 독자들은 이 환상이 모세 시대에 이루어졌음을 안다. 따라서 환상과 그 성취는 아브람에게 주신 예언적 말씀을 확증해 준다. 그는 참 환상을 받았다. 아브람은 참된 선지자이다(신 18:22; 렘 27-29). 그는 예레미야처럼(렘 30:3 이하), 노예생활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것을 바라본다(창 15:14). 이런 빛 속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렘 30:10).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7절)는 형식은 언약 체결에 있어서 ‘서문’(prologue)을 이루어준다. 이 형식은 바로 시내 산 언약의 서문인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라"(출 20:2; 신 5:6)와 기본 형식에서 일치하고 있다. 단지 ‘애굽 땅’이 ‘갈대아 우르’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여기에서 ‘갈대아 우르’는 창세기 11:28, 31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아브람이 첫 출발을 하던 지점을 되돌아 보게하고 있다. 시내산 언약은 애굽에서의 구원을 되돌아 보는 것처럼(출 20:2), 아브라함 언약은 ‘바벨론으로부터의 구원’을 되돌아 보고 있다. 이 형식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되었을 것이다.
        이 구절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4구절 중 하나이다. 이 이름이 여기에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낸 것과 후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낸 것 사이의 연관성을 강화시켜 준다. 이것은 11-18절에 명백히 나타난다.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8절). 아브람은 그가 믿고 있는 것을 알고 싶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믿음의 표적을 구하고 있다. 그가 믿음의 확인을 구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며, 6절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삿 6:36-40; 왕하 20:8-11). 표적을 구하거나 거절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믿음의 태도로 구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 7:10-14).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9절). 하나님은 언약을 맺는 데 있어서, 여러 짐승들을 준비하게 하신다. 이 짐승들은 제사음식이라기 보다도(레 9:2, 3), 언약 체결을 위한 제물로 보아야 한다. 즉, 언약 체결에서는 짐승을 죽이는 것은 ‘언약 파기는 죽음을 내포하는’ 맹세 의식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짐승들을 그냥 죽이지 않고,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있다”(10절). 비둘기를 둘로 쪼개지 않는 것은 그것이 너무 작았기 때문일 것이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2절)에는, ‘깊은 잠’과 ‘두려움’, ‘어둠’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이제 아브람은 하나님을 두 번째 만나게 되며, 이 때 그는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깊은 잠’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직전의 상태’로 나타나기도 하며 (욥 4:13; 33:15; 단8:18; 10:9),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하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사29:10; 잠 19:15[게으름]). 여기에서는 긍정적인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이 단어는 ‘하와가 탄생하기 직전에 깊은 잠에 빠진 아담의 모습’을 상기시켜준다(창2:21-22). “그렇지만, 이 잠에서는 여인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 하다가 큰 재물을 얻고 나오는” 계시가 주어지고 있다.
        ‘두려움’(창15:12; 신32:25; 에스라3:3; 욥39:20; 41:14; 사 33:18)과 ‘캄캄함’(시82:5; 139:12; 사8:22) 역시 무서운 하나님의 강림을 준비해 주고 있다(사 29:10; 출 10:21, 22; 14:20; 15:16; 23:27; 신 4:11; 수 2:9). 이것은 출애굽과 시내 산 계시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아브람에게 임한, 캄캄함과 두려움과 뒤에 나오는 ‘타는 횃불’(창 15:12, 17)은 시내 산 신현을 말해준다(출19:18; 20:18; 신 4:11). 저자가 여기에서 시내 산 언약체결을 가져온 것은 아브람 언약과 시내 산 언약을 밀접하게 연결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행하신 것은 족장 아브람에게 행하신 것과 이어지며, 이 둘은 하나님의 크신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출애굽과 시내 산 언약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 뿐 아니라 그의 신실하심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객이 되고, 400년간 괴롭힘을 당하다가, 해방될 것을 말씀해 주신다. 여기에서 400년은 어림수로서, ‘4대’를 가리킨다(16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430년간 이집트에서 지내게 된다(출12:40-41; 행7:6; 13:20). 그 당시 한 세대는 약 100년으로 산정되었기 때문에, ‘4대, 혹은 400년’이라고 말한다. 혹은 여기의 ‘4와 400’은 상징적인 숫자로서 ‘전체성’을 뜻할 수 있다(창23:2, ‘네 도시’, 23:15, ‘400세겔). 어쨌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데에는 고난의 세월을 인내하며 잘 감당하여야 했다(창6:3; 벧후3:8-10).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이집트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출6:6; 7:4; 12:12),에서 ‘출애굽’이라는 언급이 분명해진다(15:14, ‘이끌고 나오리라,’ and after this they will go out). 이리하여, 아브라함 언약은 그 출발에 있어서, 이미 시내 산 언약을 바라보고 있다. 이 두 언약은 분리된 언약이 아니며, 밀접한 연속성 속에서 주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이 이집트인에게 종살이한 대가로 여겨질 수 있다(출12:35-39).         
        아브람은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다’(15절). 여기에서 ‘장수하다’는 ‘백발’을 뜻한다. 왜냐하면, 큰 슬픔 없이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창42:38; 44:29; 왕상2:6, 9).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주신 약속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아모리 족속의 죄가 다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열 족속’(창15:19-21)에 대한 ‘제유법’(synecdoche)으로 여겨진다(Waltke, 244).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실 때, 그의 도덕적 통치의 기준을 따라 역사하신다. 따라서 열국의 죄가 가득 찰 때까지 그들을 땅에서 몰아내지 않으실 것이다(레18:24-28; 20:23).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에도, 의인 10명이 없는 것을 먼저 확인하신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에서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은 무서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해준다. 이 영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함께하는 영상을 예시해준다. ‘구름•연기’와 ‘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출19:18; 20:5; 24:17; 34:5-7; 신4:11, 24, 33).
        그러나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시는 데’ 있다. 고대 근동 아시아의 언약 체결은 상호 동등한 관계에서 맺는 언약(parity covenant)과 주종관계에서 맺는 언약(suzerainty covenants)이라는 두 가지 형식을 갖고 있었다. 두 번째 형식의 언약 체결에서 마지막 맹세 의식은 ‘낮은 자가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감으로써’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그가 주인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을 때, 쪼갠 고기처럼 생명을 잃을 것을 상징하기 위함이었다(렘34:18-20을 보라). 주전 8세기 북부 시리아에서 별견된 앗시리아 토판에 보면, “이 머리는 양의 머리가 아니요, 마틸루(Matilu)와 [그의 아들들, 관리들, 백성들의] 머리이다”라는 글이 나온다. 아브람과의 언약에서 하나님은 대왕이며, 아브람은 봉신이지만,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심으로서,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책임지시고 이루실 것을 맹세하신다. 바로 이점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무조건적, 일방적, 은혜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15절) 말씀에 ‘언약을 세웠다’(karat berit)라는 구절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창세기 15장은 전형적인 언약체결 장면을 담고 있지 않지만(출19-24), 언약체결과 연관된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모두 담고 있다. 즉, (1) ‘언약을 세우다’는 형식(18절), (2) 자손(5절)과 땅의 약속(18-21절), (3) 제물준비(9-10절)와 맹세의식(17절), (4) 하나님의 강림(12절) 등의 핵심 요소들이 여기에 모두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본 장을 ‘아브라함 언약 체결 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은 기본적으로 약속형이다. 아브라함에게 땅의 경계를 확정하여 선물로 주신다. 이리하여 창세기 저자는 땅의 약속 주제를 다시 가져온다. 언약의 땅에 대한 지리적 경계를 묘사한다. 여기에 있는 땅의 경계는 역사적이라기 보다, 이상적인 경계로 알려져 있다. ‘나일 강’은 이집트에 있는 ‘나일 강’이라기 보다, ‘나일 강 동쪽 끝 지류’를 가리키는 것 같다(Lake Sironbis). 그렇지만, 솔로몬의 전성기 때에도, 이스라엘의 경계는 여기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다윗과 솔로몬의 황금 시대에 ‘유프라테스’까지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영향을 미쳤지만(삼하8:1), 이곳을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경계 너머에 있는 백성들을 몰아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런 점에서 여기의 경계는 ‘이상적인 경계’이며,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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