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성지순례

제3차 성지순례 2부

호리홀리 2019. 12. 19. 09:26

4일차/조식 후 요르단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갈릴리 아래에 있는 벧산으로 향했다. 길보아산 전투에서 사울을 죽인 블레셋이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매달았던 곳이다(삼상31:10).길보아 산에서 벧산까지는 15K 이다.벧산은 해발 520M 이며 산위에 세워진 성벽이었다. 므깃도에서 이스르엘 평야를 내려오면 오늘 날도 국경이지만 당시 므깃도와 함께 교통의 요지였다. 이집트 18,19왕조 때 이곳을 통치했던 유적들이 남아있다. 신약시대에는 데가볼리 ,10개 헬라도시 중  북쪽에 있는 제라쉬와 더불어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이며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있다. 국경 통과 후 


첫번째 장소인 제라쉬에 도착했다. 제라쉬는 데가볼리의 10개 헬라식 도시 중에 가장 규모가 컸다.가이사랴와 이곳 두군데만 전차경기장이 있었고 로마의 황제 하드리안이 이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하드리안 황제의 문이 있다.왕의 대로, 다메섹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자 성경의 거라사지역 이었다. 비잔틴시대(주후 324~640)에는 교회가 16개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주후 490년에 세워진 교회는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큰 규모였다.높이 20미터나 되는 기둥 수십개가 늘어선 교회의 위용,그 옆에도 또 다른 교회, 그 옆의 교회,예배를 귀하게 여겼던 제라쉬 사람들이었다.


로마제국의 가장  아름다운, 폼페이에 버금가는 큰 유적지로서 그대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분지였고 모래에 파묻혀 보존이 잘 되었기 때문이었다.원형극장은 가이샤라보다 더 컷고 도시의 규모에 놀라움을 금 할 수 없었다. 모든 로마의 도시가 그러하듯 입구에서 계단으로 올라가면 제일 먼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제우스 신전이다.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원형극장등 로마제국의 도시 중에 가장 보존이 잘 된 곳이 제라쉬였다. 예수님은 거라사지경 입구에 있었던 귀신들린자의 치유를 통해서 이곳에 복음을 전하셨다.


두번째 장소인 미다바에 도착했다.미다바교회 역시 비잔틴시대에 세워졌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모자이크양식의 지도가 잘 보존되고 있었다. 그 지도는 요르단에서 부터 이스라엘 전 지역이 망라되었다.일부가 유실되기도 했으나 보존된 지도를 통해서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사해로 흘러가는 고기가 갑자기 짠물에 방향을 트는  그림,요단강 유속이 빨라서 줄을 양쪽에 걸고 배를 당기는 모습부터 예루살렘을 확대한 그림,,그 속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대부분의 유적이 비잔틴 시대의 유적인 것은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인이 된 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해 기독교를 공고히 하게 된다..그의 모친 헬레나는 믿음이 돈독하여 노쇄함에도 불구하고 직접 성지로가서 수많은 유물을 발굴하고 교회들를 세우게 된다.


세번째 장소인 느보산은 출애굽 마지막 기착지이다. 모세는 여기서 가나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죽음을 맞아들였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가나안, 멀리 여리고가 보이고 눈 앞에 펼쳐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순종하는 모세의 심정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 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종의 사람 모세,모세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압언약(신명기)을 체결한다.


모압언약의 절정 부분인 신27장12절 이하,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니, 12번 저주를 선포했다,12지파를 상징하듯,백성들은 골짜기가 떠나갈 정도로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모세는 조용히 느보산 골짜기로 내려갔고 그것을 지켜보는 백성들,모세는 자신의 시신을 남기지 않았다. 후에 백성들이 우상숭배 할 것에 대한 염려였을 것이다


.산 정상에는 모세의 지팡이와 구리뱀의 형상이 있다. 놀라운 것은 구리광산의 유적지 "부논"이 페트라 북쪽 25K에 위치해 있다.,모세는 이곳에서 구리를 얻었을 것이다.모세가 놋뱀을 쳐든 아라바광야의 부논에 지금도 50여개의 구리광산의 유적이 남겨져 있다.당시의 구리는 각종 무기와 여인의 거울,장신구등으로 사용되었고 금보다 더 큰 가치가 있었다한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요르단이라는 나라의 이름은 요단강=요르단강,에서 따왔고 암만은 성경의 암몬이다. 암몬의 수도는 랍바성이며 여기에 다윗이 우리야를 죽게한 유적이 남아있다.


5일차/새벽출발이었다. 오늘은 가장 힘든 코스인 페트라로 가는 여정이다. 왕의 대로를 따라 4시간이 걸리는 먼거리였다. 


첫번째 장소인 아르논 골짜기에 잠시 멈췄다.아르논은" 큰소리로 떨어지는 물"이란 뜻이며 중동의 그랜드 캐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랜드 캐년을 마주한 나로서는 아담한 모습이었다. 골짜기를 흐르는 강의 길이는 72키로나 되며,이 골짜기를 지나기 위해 나오미는 두 자부와 함께 걸어갔다. 오르바는 골짜기를 지나지 못하고 동족에게로 돌아갔으나 룻은 끝까지 시 어머니를 따라 이 험한 골짜기를 넘어 베들레헴으로 갔다.

우리 앞에도 아르논 골짜기가 놓여있을 때 과연 나의 선택은 어떨까?  나오미가 가르친 언약,오르바는 언약을 버렸다. 그러나 언약백성이 된 이방여인 룻은 보아스를 만나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것이다. 우리도 언약백성임을 잊지말고 끝까지 주를 따르는 언약백성으로 살아야겠다.


두번째 장소인 페트라에 들어섰다. 가장 오고 싶었던 곳이다. 입에 맞지 않는 아랍 음식이었으나 든든이 배를 채우고 페트라에 입성했다. 입장료가 1인당 무려 85달러 그러나 요르단 사람은 우리돈 2천원도 안된다.요르단은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이다.내륙 국가였기에 많은 땅과 항구도시 에일랏을 바꾸었다. 그런데 바꾼 땅에서 석유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요르단은 중동국가중 유일한 비산유국이 되었고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가 된것이다. 아니, 페트라 하나로 먹고사는 나라인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눈 앞에 펼쳐진 장관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로마군이 3번을 공격했으나 신출귀몰하게 위에서 나타나 화살을 쏘고 돌을 던지는 그들을 당해 낼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수로를 통해 기습작전으로 나바티안족들을 정복 할 수 있었다 한다


.와디무사에 다 달았다.모세의 계곡이란 뜻이다. 그러나 모세가 지나간 것은 아니다.모세는 신광야 가데스에서 에돔왕에게 부탁했다.민20:17절 "우리가 왕의 대로만 통과하게 하소서" 그러나 왕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모세는 형제인 에돔족속과의 싸움을 피해 거친 모압 산맥을 넘어야했고 백성들의 불평이 이어져 불뱀사건이 일아난 것이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어제 본 느보산에 도달한 것이다. 느보산 정상에는 십자가와 모세의 놋뱀을 상징하는 작품이 자리하고 있었다.모세의 기념교회도 살펴보았다.


에돔의 수도는 페트라 위쪽 45K에 있는, 왕의 대로가 내려다 보이는 마치 마사다처럼 생긴 요새인 보스라(BC 9세기~7세기의 에돔의 수도)였고 그 이후 셀라였다. 셀라는 시편에 나오는 의성어가 많으나 지명으로는 바위라는 뜻이다.70인 역에서는 셀라를 페트라로 번역했다. 에돔인은 바위산에 거하는 민족이었다. 지혜를 중시했으나 교만하고 형제인 이스라엘과 등을 지고,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때 손뼉치며 춤추었던 족속들이었다.


 유다가 망하고 교만했던 에돔은 유목민인 베드윈족들에게 멸망한다. 그들이 세운 왕국이 주전 300년경 나바티안왕국이다. 홍해의 아카바항을 통해 들어온 인도의 진귀한 물품들,2400K나 되는 인센스 로드(유향길)를 통해 들어온 유향,몰약등이 페트라를 지날 때, 그들은 막대한 통행료를 받아 부를 챙겼다. 페트라 계곡을 흐르는 양쪽 수로,한쪽은 사람이 마실 물,한쪽은 짐승이 먹는 물,사막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과 안내자,숙소,필요한 물품등을 공급받고 왕의 대로를 통해 미다바~암만~제라쉬를 거쳐 다메섹으로 향했다. 다메섹에서 터키 쪽으로 혹은 바벨론을 통해 실크로드와 연결되는 요충지가 페트라였다.


교차로의 또 하나의 길은 예멘에서 오는 유향길이었다. 이곳을 통과해서 가자로 가거나 네게브 사막을 가로질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지중해를 통해 로마와 유럽 각지로 수출되는 무역의 통로가 페트라였다.


 실크로드보다 2천년 전에 만들어진 인센스 로드,,솔로몬은 페트라를 통해 가자로 가서 지중해 연안 각국으로 무역하는 중개무역을 통해,근처의 구리광산,저장창고들을 지어 막대한 부를 챙겼다. 그전에 다윗은 염곡에서 에돔병사 1만8천을 쳐 죽이고 에돔을 정복했었다. 그리고 페트라 뿐 아니라 여러곳에 수비대를 두었다.후에 아마샤는 에돔을 원정하고 셀라 바위위에서 에돔인 1만명을 던져죽였다(왕하14:7,역대하25:11~12) 아마샤는 셀라의 이름을 욕드엘로 바꾸었다.이는 하나님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말이다.불가능한 곳을 하나님께서 정복하셨다는 고백이다.페트라를 장악한 자가 고대 근동의 강자가 될 수 있었고,왕의 대로를 장악해야 강대국이 될 수 있었기에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늘 긴장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시바여왕도 오만에서 부터 인센스 로드를 개척했고 페트라를 통해 예루살렘에 가서 솔로몬을 만난것도 무역로를 얻기 위해서 였다.유향은 진기한 향료로서 유대교,이슬람교,기독교등 모든 종교가 필요로 하는 향품이었기 때문에 그 가치는 황금보다 귀했던 것이다.


나바티안족들이 얻은 물질로 세운 페트라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그러나 로마에게 멸망한 후 페트라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무역로가 폐쇠되어 존재가치가 상실되고 유적으로 남게된 것이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도망친 후 이곳 페트라에 와서 잠시 피신했고 여기서 머물며 전도활동을 했을 것이다. 변화된 바울의 열정은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니 페트라의 아레다왕이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페트라에서 수백키로나 떨어진 다메섹까지 추격대를 보내어 바울을 죽이려했던 악 감정이 있었던 것이다(고후11:32).아마 바울은 바울서신에서 보여주듯 종말론의 심판을 외쳤을 것이고 아레다 왕은 반듯이 죽여 보복하려 했을 것이다. 


바울은 아라비아로 갈 때에도 페트라를 통해서 갔던 것이다.또는 아라비아는 넓은 지역이고 협의적으로는 페트라를 지칭 한 것이기도 하다.그렇다면 바울의 아라비아 3년은 페트라에서의 3년으로 볼 수도 있다. 사실 이것이 아레다왕과의 악연을 설명하는데 더 올바른 해석 일 수 있다. 성경과 페트라의 상관관계는 많을 것이지만 계속 연구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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