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성지순례

제1차 성지순례

호리홀리 2019. 12. 15. 12:26

1차 성지순례는 1989년 8월 여행자유화가 열렸을 때였다.그땐 그저 열정만 앞서 있었다.

항공티켓을 예약했다. 동경~방콕~아랍에밀레이트~카이로~텔 아비브행이었다.

이스라엘 호텔 예약은 킹 데이비드호텔로 했다. 출입국 수속시 필요한 연락처이며 주소지였다. 

친구가 히브리대학에 있었기에 가서 전화하기로 했다.


 그런데 김포에서 출발 할 때부터 1시간 연착한 것이 아닌가? 자리에 앉았는데  기체이상으로 다 내리게 한후, 점검하고 출발하니 한시간 이상이 연착한 것이다. 나리타에서 경유하는 항공시간을 1시간 간격으로 끊어 놨기에 그야말로 등골이 오싹했다. 

해외여행은 처음이었고 출발 할 때 부터 이번 여행을 통해서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기에 두려웠다.아니게 아니라 도착해서 보니 내가 탈 비행기는 이미 출발하고 만 것이다.


항공사 직원을 통해 들은 바는 3시간 후 프랑크프루트로 가는 항공편을 이용하겠느냐  아니면 3일 후 카이로행 항공편을 이용하겠느냐?

결국 원치 않았던  며칠간의 일본 여행을 뒤로 한 후 구사일생으로 카이로에 도착했다.


카이로에 도착 후 길게 늘어선 택시 정류장으로 가서 피라밋,스핑크스,파피루스 공장등 하루 이용료를 흥정했다. 50불로 거래한 후 큰 트렁크를 싣고 다녔다. 여기저기 구경하는 동안 하루종일 의심병이 도졌다. 저 놈이 트렁크를 가지고 도망가면 어쩌나, 차 번호도 적어놓고 이것 저것 물어 신원을 확인했으나 그게 뭔 도움이 될까? 유적지를 돌아보며 지혜를 구했다.어떻해 해야 합니까? 즉시 응답이 왔다. 맡겨라!  도망치든 말든 맡겨버려라 최악의 경우 여권과 지갑은 갖고있지 않느냐? 즉시 아멘 했다. 더이상 불안,초조가 사라졌다. 이 경험은 이후에 내 삶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


다음 날 카이로 대학에 가면 한국 유학생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그에게 시내산으로 가는 육로를 물어보자. 캠퍼스를 반나절 헤멘 끝에 한국학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제 항공편으로 텔 아비브에 들어가야만 했다. 이스라엘의 검문 검색은 세계 최악이었다. 몇번의 통관조사에서 트렁크 속에서 나온 것은 날카로운 과도,망원경,곳감,미숫가루였다.그들의 눈에는 모두가 의심스러운 품목들이었다.


두번이나 팬티 바람으로 조사한 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천신 만고 끝에 텔 아비브에 도착하니 가는 비가 내렸다.빗물과 눈물이 섞여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러나 마냥 감상에 젖어있을 수 없었다. 택시를 타고 예루살렘 킹데이빗호텔로 향했다.후에 알고보니 이스라엘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며 국가의 정상들이 묵는 호텔이란다. 얼마전 트럼프가 묵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는 하루 150불 이었다.인터넷이 없었을 때이니 그저 신문에 난 호텔,아는 호텔이 그거 뿐이었으니 말이다. 새벽 1시쯤 도착해서 숙소에 들어가니 과일바구니가 놓여있고,방,거실의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에 잠이 오질 않았다.눈을 뜨니 오전 5시였다.수많은 쿠폰,아침식사도 거른 채 구 예루살렘 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임페리얼호텔에 짐을 풀었다.하루 6달러, 화장실도 없는,수건,휴지,비누도 없는, 푹 꺼진 철재침대에 몸을 뉘였다.친구에게 전화를 했다.돌아온 답변은 급한 일로 미국으로 출국했다는 것이다. 죽었구나.그러나 어쩌랴


4일간 구 예루살렘을 이 잡듯 뒤졌다.

한번은 망원경으로 기드론 골짜기를 살피다가 유독 오래된 건물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물어보니 압살롬 기념비라고 한다. 삼하18:9~18에 나오는 20 미터나 되는 기념비,생전에 "내 이름을 기억해 줄 아들이 없구나" 라고 탄식하며 세운 기념비이다.그러나 압살롬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다.(삼하14:27)  아들 셋은 모두 일찍 죽었을 것이다.외모 지상주의,사람의 마음을 뺏고 훔쳤던 압살롬.왕의 골짜기에 자기를 위하여 거대한 기념비를 세웠던 교만한 압살롬,그러나 다윗은 가장 사랑한 아들을 그의 기념비 옆에 묻어주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길 아들이 없다고 탄식한 압살롬,그러나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자신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죽고 예수만 남기는 삶을 살아야 겠다.


5일째 택시를 타고 여리고로 갔다. 택시 이외는 교통수단이 거의 불가능했다. 여리고는 서안지구라 유대인이 들어 갈 수 없었기에 아랍인 택시를 탔다.택시는 거래 후 탑승해야했다. 사실 이게 제일 비용이 절감되었다.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1000M 정도되는 높이라 계속 귀가 먹먹했다.가는 도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허름한 여관이 눈에 띄었다.구 여리고에 있는 여리고성은  머리만한 돌과 흙으로 된 성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시골 길을 한참 걸어 엘리사의 샘에 다 달았다.,그들은 술탄의 샘이라 써 놓았다.


삭개오의 뽕나무를 보았다.예수님 당시에 삭개오가 올라갔던 나무와 유사한 400년 된 나무였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삭개오는 이미 변화되었다.예수님의 전지성을 보고 변화된 삭개오,예수님이 십자가지시기 위해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만난 것이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토색한 것의 4배를 갚겠나이다. 그의 재산 거의 전부를 드렸던 삭개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힘을 얻었을 것인가?


다음날 일찍 감람산 어귀에 있는 가든 고든의 예수님 무덤으로 갔다. 무덤 안에 들어가 예수님이 누웠던 곳에 누우니 또 눈물이 나온다. 밖에 나오니 부슬비가 내리고 벤치에 않아 기도할 때 눈물이 앞을 가렸다.감람산으로 올라가 겟세마네동산,승천교회를 보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니 유대인의 묘지가 시야를 가린다.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다시 오실때 혹 부활 할까 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무덤을 쓴 것이다.


다음 날 중앙터미널로 가서 마사다로 가는 버스를 탔다.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니 군인들로 가득차 있었다. 미국에서 온 순례자 중,아들의 성인식을 하는 분들도 있었다.내려와서 미국에서 온 성지순례단 버스를 얻어타고 갈릴리로 향했다.갈릴리에서 1박을 하면서 밤에 호수가에 나와 엎드려 기도했다.원래 눈물이 없는 내가 ,가는 곳 마다 기도하면 눈물이 나오곤 했다.


.갈릴리에서 돌아오는 버스안에도 군인들로 가득찼다. 남녀의 군인들이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노래부르는 것이 우리네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그들은 남자 3년,여자 2년의 의무병역을 기쁘게 받아드린다.  그들은 군 생활을 통해서 또 하나의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다.그야말로 인생대학이다. 미래를 결정하는 모든 지식,기술,정신력을 군 생활을 통해 배우고 익히며 제대한 후에 벤처기업들을 창업하게 국가에서 지원한다. 


우리의 군 생활은 몸으로 때우는 것, 꺼구로 매달려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는 부정적인 군 생활과 얼마나 비교가 되는지, 나도 군 생활을 슬기롭게 했다고 생각되지만 군 생활 내내 정치권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수천년을  전쟁 중에 있는 나라  내가 나라를 지켜야 그 다음 사람들이 안전한 것 같이, 내 차례가 되어 국가와 국민을 지킬 수 있다는 적극적 자세를 보며 우리의 국가관도 달라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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