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예레미야서(구속사)

예레미야44장,돌이키지않는 백성들

호리홀리 2016. 4. 4. 16:35

 애굽의 여러 지방에 유다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믹돌'이란 곳은 출애굽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나온 곳으로 언급되며(14:2 ; 33:7) 29:1030:6에는 이곳이 애굽 북부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믹돌의 뜻은 ''인데 이것은 아마 셈계 언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애굽 사람들이 이를 빌어 사용한 것 같다(Nicholson). ''은 그 당시 애굽의 수도로서 지금의 카이로 부근에 있었으며 멤피스라고도 불리었다. 그리고 '바드로스'란 곳은 애굽의 나일 강 상류 지방을 가리킨다(Bright). 아무튼 여기서는 다바네스의 유다인 공동체들도 심판 아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이곳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으나, 엘레판틴이란 곳에도 한 유다인 공동체가 있었음은 잘 알려진 바이다. 이곳은 애굽 남쪽 나일 강 상류의 섬이었으며, 이곳에는 수많은 파피루스 문헌들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따르면 B.C. 526년 페르시아 군대가 애굽을 정복하기 이전까지는 그들이 그곳에서 무사히 살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들이 언제 그곳으로 이주해 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은 B.C. 7세기 후반이나 또는 6세기 초에 이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 --> 

 보라 오늘날 그것들이 황무지가 되었고 - 하나님이 선택하사 구별하신 거룩한 성읍마저 아끼지 않고 황폐하게 만드셨다면, 애굽의 성읍들은 말할 것도 없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애굽으로 도피해 간 유다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내용인 것이다(Calvin). 미스바로부터 애굽에 이주해 온 이들은 예루살렘에 임한 재앙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눈으로 목격했엇다. 그 당시 애굽에 이미 살고 있던 유다인들은 단지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 정도만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의 그 아름답고 고귀하던 성과 모든 성읍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되고 만 것이다.

) --> 

 그들이...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분향하여 섬겨서 - 히브리어 '케테르'AV, RV, RSV 등 영역 성경들은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분향하다'(burn incense)로 번역하고 있다. 이 말이 이 같은 뜻으로 자주 쓰이고 있긴 하지만, 동물의 기름을 번제로 태워드리는 제사와 관련해서 쓰이기도 한다(1:9, 17 ; 3:11, 16 ; 삼상 2:16). 본절에서 선지자는 유다 멸망의 근본 원인이 바로 우상 숭배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애굽으로 도피한 자들 역시 우상 숭배로 파멸에 직면하고 말 것에 대한 간접적 경고로 이해된다.

) --> 

 내가 나의 모든 종...부지런히 보내어 - '부지런히 보내어'( 하쉬켐 웨솰로아흐)에 대한 문자적 번역은 '일찍 일어 나서 보냈다'이다. 이 말은 본서의 산문체 단락에서 수차례 등장하였다(7:25 ; 25:4 ; 26:5 ; 29:19 ; 35:15). 여호와의 보내심을 받은 이들 선지자들의 임무는 모세의 후계자 입장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선언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권고하고 견책하여서 여호와의 율법에 순종케 하고, 여호와와 그의 언약에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들은 일종의 언약의 수호자들이었으며, 그들의 말을 거부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과 그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과 같았다.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파괴되고 황폐해져 쓸모없는 곳이 되어 버린 이유도 여호와의 말씀을 제마음대로 취급하고 거부했기 때문이었다(Thompson).

) --> 

과거 유다 백성의 죄악과 이에 따른 심판을 회고한 예레미야는 다시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애굽의 유다 사람들에게 동일한 경고를 발한다. 우상 숭배는 자신 뿐만아니라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를 멸절시킬 정도로 그 파급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7:1-26 ; 삼하 24:1-15 참조). 한편 7절 초반부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고 있지 않은 히브리어 '웨아타'란 말이 쓰이고 있는데, 그 의미는 '그리고 이제'란 뜻이다. 이 말은 구약에서 번번히 쓰이고 있는 접속사인데, 주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낼 때 쓰이곤 하였다(19:5 ; 4:1 ; 24:14 ; 삼상 8:9 ).따라서 본절부터 10절까지는 예레미야 메시지의 소결론부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상 숭배는 예루살렘과 유다 멸망에서도 그러했듯이 전공동체의 파멸로 인도될 위험이 있었다.

) --> 

 세계 열방 중에서 저주와 모욕거리가 되고자 하느냐 - 이들은 마치 그들의 목적이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악을 행하고 있었다(Bright).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유다에 임한 심판을 근거로 해서 이들 난민들에게 거기서 교훈을 받고 우상숭배에서 돌이킬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 --> 

11절부터 14절까지는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게 심판을 선고하는 내용으로서 42:17, 18과 유사하다.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려는 이들의 완고한 결심은 여호와의 뜻과는 정면으로 충돌하게 될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승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기 때문이다(Bright).

) --> 

 애굽 땅에 우거하기로 고집하고 그리로 들어간 - 1절에 언급된 바 있는 다양한 무리의 유다인들이 여기서는 모두 '유다의 남은 자'로 통합되어 지칭되고 있다. '우거하기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구르''(손님으로서)거주하다', '움추리다' 또는 '두려워하다'는 뜻으로서, 낯선 애굽 땅에서 눈치를 보며 전전 긍긍하는 모습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 내용은 40-44장의 주된 주제와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는 B.C. 586년의 예루살렘 함락 직후에 유다 땅에 남게 된 사람들의 역사와 운명을 묘사하는데, 배도와 불순종 그리고 기어코 애굽으로 도망가는 행위등으로 인해서 그들은 여호와의 미래의 약속에서 배제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제는 유다에서나 또는 애굽의 공동체에서나 부흥과 갱신의 희망은 없게 되는 것이다. 미래의 회복은 바벨론에 붙잡혀가 있는 포로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Nicholson).

) --> 

 애굽 땅에 거하는 자들을...벌하리니 - 유다인들이 애굽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 자체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결과였으며(43:7) 더구나 그들이 애굽 땅에서 우상 숭배를 계속하고자 한 이상, 여호와는 그들을 끊어버릴 것이며 그들 모두를 벌할 것이다. 그들은 큰 자이든 작은 자이든 모두 칼과 기근을 통하여 멸망하게 될것이며, 조소거리와 모욕거리 그리고 저주의 대상이 될 것이다. '벌하다'의 뜻으로 번역된 '파카드'는 원래 '방문하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 방문하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 --> 

도피하는 자들 외에는 돌아올 자가 없으리라 - '도피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은 맛소라 사본에만 있고 70인역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NEB영역 성경은 이를 난외주로 번역하였다. 11-14, 26-28절의 엄청난 비극과 전면적인 파멸이라는 심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 문구는 후대의 필자들의 설명구가 원문에 자리잡고 있는 것일 수 있다(Nicholson, Thompson). 한편, 브라이트(Bright)는 이를 '유랑민 몇몇을 제외하고는'이라고 번역하여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히 소수의 사람들일 것이라고 설명하는가 하면, 이를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하게 될 자들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Calvin).

) --> 

15절에서 19절까지는 예레미야의 심판 선언에 대한 애굽 이주민들의 항변이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선지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본서의 특징을 보여준다. 즉 본서는 선지자의 메시지를 선포했을 때 나타난 백성들의 반응을 사실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의 영적 상태를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곁에 섰던 모든 여인에 관한 언급은 우상 숭배에 있어 여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암시한다(Feinberg, Streane). 그리고 모든 백성의 큰 무리라는 표현은 애굽으로 내려간 자들의 대부분이 우상 숭배에 빠졌음을 나타낸다. 어쩌면 그들은 예루살렘 함락을 여호와의 무능(無能)의 소치로 여기고 새로운 신()을 찾아 동분서주하였을지도 모른다.

) -->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전하는 말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완강한 거부로 나타났다. 그들의 반응은 완강한 거부로 나타났다. 그들의 신학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이들의 반응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B.C. 622년의 요시야 개혁 이후 일련의 재앙이 요시야의 전사를 필두로 해서 유다를 강타했었다(B.C. 609). 그리고 마침내는 애굽 군대가 유다를 정복하여서 유다의 여호아하스 왕이 폐위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B.C. 605년 갈그미스에서 애굽 군대를 격파한 바벨론 군대의 등장과 함께 바벨론의 유다 침공으로 인해 여호야김은 애굽의 바로느고를 섬기던 상황에서 느부갓네살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는 그런 급작스러운 변화를 겪어야 했다(왕하24:1). 그러던 중 B.C. 597년에는 제2차 바벨론의 예루살렘 침공이 있었고, B.C. 586년에는 예루살렘 함락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다랴가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불행과 재앙의 연속이 여호와께 충성을 다하지 못한 언약 위반으로 인한 저주의 발동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하늘 왕후 대한 제사와 정성이 부족했던 때문인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같다(17절이하).

) --> 

 예레미야가...모든 백성에게 일러 가로되 - 20절에서부터 끝절까지는 나름대로 한단락을 이루고 있고, 이것은 다시 두개의 소단락으로 나뉜다. 그 첫 소단락은 20-23절로서 15-19절에 묘사되고 있는 백성들의 주장에 대한 예레미야의 논박을 다루고 있고, 두 번째 소단락은 24-30절로서 애굽에 거하는 유다인들에게도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더 확장된 내용의 선언이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 소단락은 신명기의 사상과 일맥상통하고 있으며, 이에 근거해서 B.C. 586년의 유다 패망을 해석하는 내용으로 보이며, 또한 그 재앙이 백성들의 오래되고 뿌리 깊은 배도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심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해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은 애굽에 있는 그들에게도 그러한 심판이 닥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 --> 

다시는 내 이름을 일컬어서...하는 자가 없게 되리라 - 혹자는 본절을 애굽에 도피한 자들 전원을 멸절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Bewer). 그러나 14, 28절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 재앙에서도 살아 남은 자가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언약 백성의 특권을 빼앗아가실 것을 선언하고 계시는 듯하다(Streane).

) --> 

여호와께서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표징'( 오트)을 주신다. 백성들은 이것을 통해서 여호와의 말씀의 성취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 표적은 바로 '호브라'라고 하는 애굽의 왕(B.C. 589-570)이 그 대적들의 손에 넘겨지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B.C. 588년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에 반란을 일으키면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약속했던 사람이었다. 그 약속에 따라 그는 유다에 군사를 파견했었다(37:5). 예레미야는 호브라가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여진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원수의 손에 붙여진다고 말했다. B.C. 570년 그의 통치 말년에 리비아에서의 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자기 군대의 일부 무리가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아마시스란 장군이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으나 아마시스는 자신이 왕임을 선포하였으며 호브라와 함께 일부 지역을 분활 통치 하였다. 그로부터 3년 후 호브라는 처형되었다.

 

'구약 > 예레미야서(구속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43장,역 출애굽  (0) 2016.04.04
예레미야39장,함락  (0) 2016.04.04
예레미야34장,언약적저주  (0) 2016.04.04
예레미야33장,위로와 회복  (0) 2016.04.04
예레미야31장,새언약  (0) 2016.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