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예레미야서(구속사)

예레미야31장,새언약

호리홀리 2016. 4. 1. 10:36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 여기서 '길표'란 돌무더기를 가리킨다. 이러한 돌무더기들은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분명하게 지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바벨론으로 가는 길에 이처럼 길표를 만들어 둠으로써 그것을 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것이다(Clarke). 이는 오랜 포로 생활로 인해 실의와 좌절에 빠진 자들에게 귀환의 확신을 심어주는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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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 이는 본서 전체에서도 가장 난해한 구절에 속하며, 해석도 가지 각색이다. (1)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예언한 것이다(Jerome). (2) '처녀 이스라엘'이 주께 돌아올 것을 가리킨다(Hyatt). (3) 전쟁시에 여인들이 대적들을 무찔러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이스라엘이 평화와 안정을 구가하게 되리라는 말이다(Cundall).(4) 이제까지는 주께서 이스라엘(여인)을 사랑으로 안으셨으나, 새 날이 이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설 것이라는 의미이다(Jenson). (5) 이스라엘이 강력한 힘을 자랑했던 이방 열국들을 제압하게 된다는 의미이다(Ironside). (6)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능가하는 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Calvin). 이러한 제 견해들 중 어느 하나를 단정적으로 선택하기는 힘들다. 다만 우리는 본절 내용이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새 일'이 하는 점에 근거하여,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역사를 가리킨다는 정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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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4,25절,에브라임의 귀환과 회복이 예언된 후, 여기서는 그것과 동일하게 강한 확신에 찬 어조로 유다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유다 백성이 돌아오면 그들도 엄청나게 번영할 것이다. 경건과 근면함이 함께 있을 것이다. 그때 여호와는 그들의 진정한 안식처가 될 것이며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피난처가 되실 것이다. 또 예루살렘은 의로운 성이 될 것이고 그 성전은 거룩한 곳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약하고 지친 자들이 거기서 휴식을 취하게 될 것이며, 슬픔을 당한 자는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Clar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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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깨어 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 - 본장 2절에서 시작되어 25절에서 끝나고 있는 예언이 예레미야에게 꿈으로 전달되었던 것 같다(Clarke, Feinberg, 10:9;4:1). 혹자는 이것을 꿈, 곧 그의 소망과 희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해 보기도 한다. 즉 이스라엘의 번영을 목격하게 될지 알 수는 없으나, 그때가 되면 무덤에서 깨어나서라도 그러한 번영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Dah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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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 이는 여호와께서 사람과 가축을 번성케 하실 것임을 말한다(Clarke). 공동 번역은 이를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을 사람이나 짐승 할것 없이 씨를 뿌려 농사짓듯이 불어나게 하리라'고 쉽게 번역하였는데, 결국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22:17)에 대한 확증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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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 구역에서 '새 언약'이 언급되고 있는 곳은 오직 이곳뿐이다. 비록 짧은 내용이긴 하지만 본절로부터 34절까지는 본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해당되며 구약 전체에서도 가장 심오한 부분에 해당되며 구약 전체에서도 가장 심오한 부분 중의 하나이다. 훗날 쿰란(Qumran) 공동체는 여기에 근거해서 자신들을 새 언약의 사람들로 이해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새 언약은 강력한 율법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서 모세 언약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분명 본문은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이 피언약에 대한 예언이라 할수 있다(22:20;고전 11:25;8:8-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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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언약은...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 새 언약의 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여호와 간에 시작된 언약이 제시되고 있다(19:1-24:11). 언약의 계속적인 존속 여부는 여호와를 계속적으로 주로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 곧 언약에 규정된 조항과 약속에 대한 계속적인 순종 문제에 달려 있었다(11:1-8). 이러한 율법에 순종하지 못하면 심판과 언약에 명시된 저주 조항의 가동이라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반면에 순종은 언약의 축복을 가져왔다. 그러나 모세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언약 규정 조항에 순종하는 데 언제나 실패했었음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강력한 구원의 능력으로써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 첫 번째 언약을 파기하고 말았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언약이 필요했다(Thompson, B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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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 이제 여호와는 백성들의 내적인 성품의 변화를 주실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순종할 수 있도록 할 것임을 선언하신다. 즉 여호와는 그들의 마음에 그의 율법을 기록할 것인 바 이는 곧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도의 삶에 전인적이고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을 암시한다(8:1-11). 한편 옛 언약은 돌 위, 혹은 책에 기록되었었다(24:7;31:18;4:13). 그리고 기록될 장소로서의 '마음'이란 표현은 17:1에서는 죄와 관련되어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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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 여기에는 변화가 어느 정도까지 일어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즉 제사장이나 선지자 등이 '여호와를 알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을 정도까지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적 중보(仲保)가 필요없이 작은 자에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다 여호와를 알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는 사 54:13에도 나온다. 이 말은 신약의 성도가 믿음의 선배로부터 전혀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체험적으로 교제하는 것이 외부의 지시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죄사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과 더불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신령한 은혜를 체험함으로써,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Cunliffe-Jones). 한편, 여기서 '알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깊고 친밀한 인격적 앎이라는 대단히 심오한 개념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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