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예레미야서(구속사)

예레미야25장,예레미야의 70년

호리홀리 2016. 4. 1. 10:12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 년 - 여호야김 통치 제4년은 B.C. 605년으로서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등극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물리치고(왕하 24:1, 7)그 여세를 몰아 유다까지 침입함으로써 유다는 바야흐로 포로로 잡혀가는 수난사를 맞기에 이르렀다(1:1-5). 본절에서부터 7절까지는 이러한 수난이 유다의 끝없는 불순종과 완악함으로 인해 초래되었음과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막바지에 달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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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의 십 삼 년 - 1:2에 따르면 이 해는 예레미야가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던 때로 B.C. 627년에 해당한다. '부지런히 일렀으나'의 문자적 번역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 하쉬켐) 일렀으나'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자기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그리고 진지하게 말씀을 전했음을 알 수 있다.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 그러나 그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이렇게 열심히 전파하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모습은 다른 선지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종들을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그리고 부지런히 보내셨지만 이스라엘은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Thomp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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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절,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 '북방 모든 민족'을 유다 멸망에 일조한 대적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보고 이러한 일반적인 표현과 특정인 느부갓네살이 같이 언급되는 것은 예레미야의 원래 말(북방 모든 족속)에다 구체적인 특정인(느부갓네살)의 등장을 목격한 자기 후대에 이를 첨가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Thompson). 그러나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 '북방 모든 민족'이란 다양하게 이해되는데, 이에 대한 견해로는 (1) 느부갓네살과 동맹을 맺은 민족들 (2) 바벨론 제국을 구성하는 여러 민족들 (3)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바벨론인들등이 있다 이중 문맥상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리라 본다(Feinberg). 또 느부갓네살이 '내 종'( 에베드), 즉 여호와의 종이라 지칭된 것은(27:6;43:10),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음과 그가 수행해야 할 역할이 막중하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위함이다. 이와 유사한 예로 사 44:28;45:1에는 바사 왕 고레스를 가리켜, '나의 목자',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라고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70인역(LXX)에는 느부갓네살을 가리켜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누락되어 있는데, 아마 번역자는 이교도 왕을 가리켜 그런 영예로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을수도 있다. 한편 이 ''이란 용어는 고대 근동에서는 군주와 봉신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문맥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으며, 특히 조약 문서에서는 규범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봉신은 군주를 위해 자기 군대를 바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느부갓네살은 자신도 모르게 여호와의 봉신과 같은 역할을 수행할 자로 사용되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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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 '칠십 년'이라는 기간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유다 백성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제1차 포로로 잡혀갈 때(B.C 605)로부터 고레스의 칙령으로 귀환하던 해(B.C. 537)까지의 기간 (2)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던 해(B.C. 586)로부터 성전이 재건되던 해(B.C. 516)까지의 기간(3) 예루살렘 함락 때(B.C. 586)로부터 제1차 포로 교환이 이루어진 해(B.C. 537)까지의 기간 (4) 느부갓네살의 통치가 시작되던 때(B.C. 605)로부터 바벨론이 점령당한 때(B.C. 539)까지의 기간. 이중에서 하나를 선택적으로 지적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듯이 보인다. 첫 번째의 경우는 바벨론에게 유다가 종속된 기간을 의미하는 역사적 측면에서, 그리고 두 번째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속사적 관점에서 각각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고 네 번째 견해는 12절과의 문맥적 지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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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절의 역사적 상황을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본 단락 처음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한 것은 여호와김 통치 제 사 년, 곧 느부갓네살 통치 원년, B.C. 605년이었다(1). 이 해에 애굽은 갈그미스에서 패하였으며 갈대아인들의 추격을 받아 남쪽으로 달아났다. B.C. 6058월에 느부갓네살은 자기 부친의사망 소식을 듣고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바벨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B.C. 604년 말경에 갈대아 군대는 다시 팔레스틴 평원으로 침입해 들어왔으며 아스글론을 파멸시켰다(47:5-7). 이러한 역사적 상황이 재빠르게 진행되고 있을 때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 파국이 임박했으며 70년간을 바벨론에 노예로 있게 될 것을 선포하였다(11). 그러나 여호와의 분노의 잔은 이제 이스라엘을 지나서 열방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열방들이 그 잔을 마신 후에는 바벨론에게로 그 잔이 넘어갈 것이다(26).

 

 애굽 왕 바로와 모든 잡족과 - 이는 바로느고를 가리킨다. 그는 주변 나라들을 부추켜 반바벨론 동맹을 결성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Clarke). 한편, 본절에는 바로와 함께 그의 신하들 그리고 그 방백들 또 그 백성, 그리고 애굽에 살던 잡족들이 한께 열거되고 있다. 이 잡족들이라는 것은 바로의 통치하에서 애굽에 거주하고 있는 수많은 외국인들을 말한다. 또한 본절의 우스땅은 욥의 고향이기도 하였던 곳으로서(1:1), 팔레스틴 동쪽 어디에 있었던 것 같다. 4:21에는 우스가 에돔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아스글론과 아스돗의 남은 자 - 블레셋 다섯 성읍은 아스글론, 가사, 아스돗, 가드인데, 가들를 제외하고는 모든 성읍이 다 언급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 이 즈음 가드는 이미 멸망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1:6이하 참조). 현대 고고학은 아스글론과 가사 그리고 아스돗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데 많은 업적을 남겨 놓았다. 그리스 역사가 헤도로투스(Herodotus)에 다르면 아스돗은 바로 삼메티우스 1(PharaohPsammeticus I, B.C. 663-609) 오랜 포위 공격 끝에 결국 정복되고 무너졌다고 한다. '아스돗의 남은 자'란 어구가 이 사건에 대한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B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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