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예레미야서(구속사)

예레미야28장,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

호리홀리 2016. 4. 1. 10:22

B.C. 593. 10절에서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 걸린 멍에를 빼앗아 꺾었던 것으로 보아 그 멍에는 여전히 예레미야의 목에 걸려 있었던 것 같다. 하나냐는 베냐민 땅 기브온 출신이었는 데 기브온이란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9.6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서 오늘날의 엘-(el-Jib)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최근에 이 고대 유적지가 발굴되었는데, 이곳은 수많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결부되어 있던 곳이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속이고 파멸을 모면한 바 있으며(9:1-15), 다윗 시대에는 사울의 군사와 다윗의 부하 사이에 대결의 장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삼하 2:12-17). 또한 이곳에서 요압은 아마사를 살해한 바 있다(삼하 20:8-10). '하나냐'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자비하시다'이다. 비록 하나냐가 잘못된 신앙을 가졌긴 하였으나 이 이름은 유다가 곧 회복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이 사람에게는 어울리는 이름이었다(Thompson). 그는 자칭 선지자로서 자신이 여호와와 교통하고 있고 또 그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성역 도시인(21:17) 기브온 출신인 것으로 보아서 그는 제사장이었을 것이다(Clarke).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사용했던 비유를 사용하여 예레미야의 예언과 반대되는 예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B.C. 597년에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을 고국으로 속히 돌려보내실 것이며 또한 바벨론인들에 의해 빼앗겼던 성전 기구들을 복수시켜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3, 4). 하나냐는 여기서보는 바와 같이 27장에 언급되어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표본이 되고 있는 것이다(Nichol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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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로부터 임한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하나냐의 예언 내용은 두 해가 되기 전에 바벨론의 멍에가 꺾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유적 표현은 예레미야가 그때까지 계속해서 걸고 있었던 그 멍에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하나냐는 그 결과 성전의 신성한 기구들과 물건들이 왕을 위히한 포로민들과 함께 다시 복귀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간 왕은 여고니야 곧 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내용의 희망사항은 그 당시 백성들 중에 일부가 아직도 그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참고로 바벨론 성문에서 발견된 문헌 중 바벨론의 기름 수납 영수증을 보면 여호야긴이 유다의 왕으로 언급되고 있다(Thompson). 한편, 하나냐는 두해가 차기 전이라고 말했는데 바벨론이 멸망되기는 커녕 두 해가 되기 전에 하나냐 자신이 죽게 될 것이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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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예레미야가... -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은 본장에서 예레미야와 하나냐란 말이 언급될 때마다 시종 일관되게 선지자란 말을 붙이고 있다. 그러나 70인역은 이를 오히려 일관되게 생략하고 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이 두사람의 이름 앞에다 계속 반복해서 선지자란 말을 붙이는 것이 불필요하고 어색한 듯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해서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가 여호와의 이름을 빌어 서로 대치하고 반박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B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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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 하나냐의 거짓 신탁에 대한 예레미야의 이같은 반응과 응답이 단순히 빈정거리고 풍자적인 것이었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예레미야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냐의 예언 내용대로 되기를 진정으로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예언이 사실이 아니란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한편 '하옵소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사''준비하다', '시행하더', '성취하다' 등의 뜻을 내포하는 바, 애초부터 작정된 계획을 따라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심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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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너는...이 말을 들으라 -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고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음을 밝힌다. 이는 곧 하나냐와 같은 자의 축복예언은 백성들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달콤한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뜻을 암시한다(Ca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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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예언하였느니라 - 선지자 하나냐와 선지자 예레미야가 맞서고 있는 이 당시에는 참선지자가 누구이고 또 거짓 선지자가 누구인지를 알기가 힘들었다. 두사람 모두 여호와의 이름을 빌어 말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말만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일 만한 가시적인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외형상으로는 이 둘 중에 누가 참선지자인지 식별해낼 방법이 없다 하더라도, 더 깊이 내려가서 살펴보면 그들 사이에는 분명하고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즉 한 사람은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했었던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그러하지 못하였다(23:18, 22). 또한 한사람은 여호와의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에 민감한 반응을 느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아전 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하나님의 뜻을 곡해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이 백성의 거룩하고 겸손한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의 특권만 내세우고 그 특권이 왜 있는가 하는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였다. 이런 엄청난 잘못은 소위 경건하고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범하여 왔던 비극이었다. 그들은 바로 이 하나냐와 같이 자신들의 신앙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혼동해버리곤하였다. 진정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참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 예레미야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성이다(Nicholson). 한편 예레미야 이전의 선지자들이라고 함은 요엘, 아모스, 호세아, 미가, 스바냐, 나훔, 하박국 등의 선지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며, 이들의 메시지는 대부분 이 부패한 민족에 대한 회개의 촉구와 심판 선언에 관한 것이었다(Clar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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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 시간이 지나면 하나냐의 낙관적인 청사진이 거짓이고 예레미야가 제시한 청사진이 옳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부인할 수 없는 기준은 그의 예언 성취 여부에 달려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순종과 거룩한 행실을 요구하고 계심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특권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그것은 그들이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였다(Thompson). '진실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세우다', '확고하게 하다'는 뜻인 '아만'에서 유래한 말로서, '확실함', '진리', '진실로' 등으로 번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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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지자 하나냐가...멍에를 취하여 꺾고 - 하나냐는 여태까지 예레미야의 예언을 말로써 반박하고 있었으나 이제와서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는 멍에를 벗겨내고 그것을 꺾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반박하고 나섰다. 즉 하나냐의 행위는 단지 예레미야 예언에 대한 모독과 멸시의 표현이었다기보다는 예레미야와 정반대되는 예언과 또 정반대되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무력하게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Clarke,Nichol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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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두 해가 차기 전에...꺾어 버리리라 - 25:11, 29:10에는 70년간 유다가 바벨론의 지배하에 있게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냐는 이를 정면으로 공박하기 위해 자신도 2년이라는 구체적인 기간까지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그 예언의 성취를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백성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칠게 행동하였다. 어쨌든 그의 예언은 그 당시로서는 반바벨론 동맹과 반역을 꾀하고 있었던 자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자기 길을 가니라 -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심판 예언을 계속 선포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단순히 그곳을 피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본절에서는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 그가 아무런 변명도 없이 자리를 뜬 이유에 대해 혹자는 하나냐의 동조자들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혹은 하나냐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보다는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장래의 구체적 사건을 통해 예레미야 자신의 메시지의 진실성을 입증해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Fei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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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냐의 대립된 예언에 대한 예레미야의 반응은 없었으며, 그냥 침묵 속에서 자기 길을 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족이 바벨론인들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임을 다시 선언하러 돌아온다. 바벨론으로부터의 종속이 고통스럽고 힘들 것이라는 내용이 이제는 보다 더 강조되어 표현된다. 즉 여태까지는 나무로 된 멍에를 상징으로 사용했으나 그것이 이제는 쇠로된 멍에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Nicholson). 하나냐가 나무 멍에를 꺾은 사건 이후 오래지 않아 여호와께로부터 응답이 왔다. 참선지자는 몽상가나 공상가가 아니다. 그는 재치가 넘치는 정치평론가도 아니며, 더군다나 자신 스스로의 생각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닌 것이다. 그의 말은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것이었으며 전에 그가 전했던 것과 내용이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사용되는 어휘가 더 강경해졌다는 것뿐이다. 하나냐가 나무로 된 상징적 기구를 꺾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꺾여지지 않는 쇠 멍에가 주어진 것이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공박하고자 했던 하나냐의 상징적인 행동은 더 강한 멍에의 등장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B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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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 14절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지만 예레미야는 쇠 멍에를 목에 걸고 꺾어진 그의 나무 멍에에 의한 상징적 행위를 다시 시작했을 것이다(Nicholson). 결국 하나냐의 방해 행위는 하나님의 계획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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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냐여 들으라...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하나냐의 거짓 예언을 선호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예레미야의 이런 단호한 선포는 대단히 담대한 용기를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Clarke). 예레미야는 여기서 하나냐가 거짓 선지자임을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단죄한다. 하나냐는 백성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도록 하였으며 여호와의 뜻과 계획에 정 반대되는 입장에 서서 반역을 범하였다. 29장에는 바벨론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동일한 단죄와 비난의 내용이 있는 것을 볼 수있다(29:32, Thomp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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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리 - 여호와는 하나냐를 예언하라고 보내지 않았으나 그는 여호와의 보내심을 빙자하였다. 따라서 여호와는 그를 죽음으로 보내실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예언하는 것은 죽을 죄를 짓는 것과 같다. 이는 신 18:20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예레미야의 대적들이 예레미야를 향해 거짓예언을 이유로 해서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26장등). 그러나 여기에와서는 하나냐에 대한 심판과 처벌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직접 집행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Bright). 하나님은 그를 끊어버리실 것이며, 이 예언은 2년 내도 아닌 바로 금년 내로 성취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사건이 있은지 두 달만에 그는 죽었다(Clarke). 13:5에는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는 자를 죽이라고 명하고 있다. 본절의 '패역'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라'는 신 13:5'배반'과 같은 용어이다.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저주가 두 달 후에 하나냐에게 발생하였다.(왕하 1:17;7:19, 20;8:10-15 참조). 그러나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어떤 것이든지간에 그 사건은 분명히 예레미야가 참선지자란 사실을 입증하는 데 일조(一助)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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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해 칠 월에 죽었더라 - 1절에 따르면 예레미야의 하나냐에 대한 저주 예언이 5월에 전달되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두 달만에 일어난 것이다. 하나냐는 2년 내로 유다가 회복되리라고 예언했으나 자신은 두 달 내로 죽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선지자의 말을 성취시킨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레미야의 다른 예언들도 진정한 하나님의 예언임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