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예레미야서(구속사)

예레미야19장,오지병의 비유

호리홀리 2016. 4. 1. 09:38

가서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사고 - '오지병'이란 목이 좁고 오짓물을 발라서 구어 만든 것으로서 윤이 나는 병이다. 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박부크'는 목이 좁은 오지병에서 물이 쏟아져 나올 때 들리는 소리에 착안한 말인 듯하다. 한편, 일단 구어진 오지병은 부분적으로 고칠 수 없기 때문에 토기장이가 마음에 들지 않게 구어진 것은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유의 병이 고고학 발굴에서 나타났는데, 그것은 종류에 따라 높이가 약 10-25cm 정도되었다.

 

 백성의 어른들 - 백성들을 대표할 수 있는 지도자급 장로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증인으로 동반되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탄압받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런 막강한 위치에 있던 자들을 설득시켜 자기와 동행하게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아마 그들은 예레미야에게서 어떤 책잡을 만한 것을 찾고자 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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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 예레미야의 행동화된 예언이 진행되는 무대에 관한 언급이다. 고대 예루살렘의 하시드 문이란 곳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위치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면 이 이름은 그 일대의 토기장이들의 작업장이 있는 데서 연유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 문 근처에다 깨어진 토기들을 내버렸을 것이다. 힌놈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 아래에 가파른 지역에 있었으며,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소로 쓰였다. 그렇다면 하시드 문 역시 예루살렘 남쪽에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10, 11절에 묘사되어 있는 상징적 행위를 연출하는 데는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탈굼역(Targum)은 이 하시드 문을 본문(2:13;3:13, 14)과 동일시하였다. 만약 이하시드 문이 이미 잘 알려져 있던 곳이라고 한다면, 이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란 말은 부가적으로 쓰여진 것임에 분명하다. 어떤 주석가들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란 말을 편집 과정상 추가된 설명 어구라고 보기도 하나 히브리 저자들은 이처럼 부가적으로 덧붙이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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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 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 여기서부터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시작되고 있다. 그 대상은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이다.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고하는 공개적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청중은 예레미가 데리고 간 어른들과 제사장들 뿐이었다(1).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직접적이고 그 실제적인 청중은 작은 그룹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민족 전체를 두고 하였던 것이 보통이었다. 복수로 언급된 '유다 왕들'이란 표현 역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유다 통치자들을 전체적으로 보고 하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예레미야는 살아생전에 모두 네 명의 왕들이 다스리는 시대에 살았다. 현문맥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칭의 보다 완전한 형태들 중의 하나인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이름을 사용하며 다가올 재앙으로 인해서 귀가 진동할 것임을 지적하였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 이 표현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엄청난 재난을 당했을 때 백성들의 반응을 묘사했던 표현이다(삼상 3:11;왕하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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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알을 위하여 불살라 드렸나니 - 이 백성은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것들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과의 절대적 언약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8장에는 에스겔이 본 환상이 묘사되고 있는데, B.C. 597년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갈 당시 유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여러 형태의 이방 종교의 종교 의식이 언급되어 있다. 이 구절의 중요한 내용인 인간을 제물로 잡아 바치는 제사는 중동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특히 베니게(폐니키아)와 가나안 지역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런 악한 풍습은 이스라엘에서는처음부터 금지되었지만(22:1-19 참조), 아하스(왕하 16:3)나 므낫세(왕하 21:6) 당시에 이스라엘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왕하 23:10에는 요시야 당시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행해졌던 인신 제사가 철폐되는 기사가 언급되어 있다. 아마도 이런 악습이 여호야김 시대에 되살아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주권에 대한 거부였으며, 여호와를 정면에서 모욕하는 행위였다. 자기들의 연약의 주를 거부한 방자한 행위에 대한 결과는 언약의 저주 조항의 발동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Thomp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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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을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는 날이 - 3-9절의 내용이 오지병을 깨뜨리는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으나, 이는 극적인 문맥 전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리라 본다. 예레미야를 따라갔던 몇몇 청중들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오지병이 분명히 어떤 상징적인 행위 예언의 일부일 것으로 예측하면서 과연 그 오지병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 궁금했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예레미야가 이 백성과 이 성의 멸망을 언급하면서 이 오지병을 깨뜨린 것은 대단히 극적인 효과를 주었을 것이다(10, 11절 참조). 한편, 이곳의 '도벳'이란 말은 '불의 장소', '불이 타오르는 곳'이란 뜻을 가진 아람어인 '테파트''타파'란 말에서 유래되었던 것 같다.또한 이 '도벳'의 자음을 변경시키면, '치욕', '수치'란 뜻의 '보셋'( 보쉐트)이란 말이 된다. 아무튼 그 어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제사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이는 힌놈 골짜기에 있었던 이교 사당을 지칭하는 듯 하며, 이곳이 살육의 처소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에서 임박한 심판의 처절함이 시사되기에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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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계(謀計)를 무효케 하며 - 여호와의 분노는 여기서 더욱 상세히 설명된다. '모계'로 번역된 원어 '에차''계획', '방책'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생존을 위해서 노력하며 애쓰는 모든 계획과 자구책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다 무너뜨리실 것이다. 또한 '무효케하다'로 번역된 원어 '바카크''비우다', '실패하다', '공허하게 하다'는 뜻으로서 용기나 오지병의 뜻으로 번역된 '박부크'란 명사와 언어 유희적 관계에 있는 동사이다(Thompson).

 그 오지병을 깨뜨리고 - 이제 오지병을 깨뜨릴 적절한 때가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곳의 내용을 앞의 구절들과 독립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항아리를 깨뜨려서 어떤 질병을 쫓는다거나 또는 어떤 조약을 어긴 자들에 대한 저주를 불러온다거나 하였던 앗수르인, 헷인, 아람인들의 주술적 행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여기서는 그러한 주술적 의미는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는 이 항아리를 깨뜨리는 것이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신탁의 말씀과 똑같은 상징적 행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선포와 같은 것으로 볼 수있겠다. 예레미야에게는 선포된 말씀과 상징화된 행위가 같이 수반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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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번 깨뜨리면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 항아리를 깨뜨린 이 사건은 여기서 예루살렘과 유다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비록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이들은 대단히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서 예레미야의 말과 행동을 널리 퍼뜨려 문제시할 수 있는 자들이었으며, 그에게 적절한 처벌을 가할수도 있었다. 아무튼, 오지병을 깨뜨린 것은 백성과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상징이었다. 이것은 또한 토기장이가 용기가 깨뜨리는 이야기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 쓸모없다고 인정된 병이 산산조각나고 말았는데, 이것이 한번 깨어지고 나면 그것을 다시 붙일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예레미야가 다른 곳에서 심판이후의 희망에 대해 언급한 바있긴 하지만(24:4-7;31:31-33;32:13-15) 그의 행위는 가장 참혹한 용어로 전달된 심판선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