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예레미야서(구속사)

예레미야14장,언약기도

호리홀리 2016. 3. 31. 20:41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 예레미야는 자신을 자기 백성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대변자로 나서서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는 민족의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죄악을 고백하면서 구원해줄 것을 요청한다(Thompson).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이름은 종종 그 이름을 가진 이의 본질적 의미는 '당신은 하나님이시기에 그 이름에 맞도록 우리를 위하여 구원하소서'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J. Bright). 한편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그의 명성과 명예가 위태롭다고 생각하거나, 여호와께서 이 반역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가하는 것이 그의 이름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시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축복 조항들이 가동되게 하셨던 것과 같이 언약 파기로 인한 저주 조항들의 가동을 허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여기서 비록 저주받아 마땅한 백성이지만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자하는 간절한 소원을 피력하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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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 주께서는 이 백성의 유일한 희망의 대상이라는 호소이다(Clarke).

 유숙하는 행인같이 하시나이까 - 예레미야는 여기서 여호와께 어찌하여 이 곤궁한 때에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손처럼 이 땅에 관심을 갖지 않으신지를 묻고 있다. '행인'이라 하는 것은 밤중에 잠시 투숙하였다가 날이 밝는 대로 급히 떠나가야 하는 여행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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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 여호와의 이름에 호소하는 내용이 다시금 반복된다. 예레미야 당시 유다에 절실히 요구되었던 사안은 갈대아인의 진군에 의한 임박한 재난으로부터의 실질적인 구원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땅에 영원히 관심이 없는, 하룻밤 유숙하는 나그네처럼 멀리 계신다. 하나님과 백성들 간의 괴리를 자초한 측은 바로 백성들이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주권을 거부하였으며 또 그의 계명을 순종치 않았던 이런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의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로우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같은 소외의 감정은 오직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였던 것이며, 설령 그들이 이론적으로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는 자는 오직 그와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는 자들에게로 국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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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 '어그러진'에 해당하는 '누아''흔들리다', '방황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을 의뢰하지도 순종하지도 않고 헛된 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변덕스러움을 지적하신 내용이다. 그러한 방황과 변덕의 구체적인 예는 그들이 이방 열국이나 이방의 우상들을 의지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위기가 닥쳐올수록 이 백성은 사 30:15의 말씀처럼 잠잠하고 여호와를 신뢰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었으나 정반대로 행동하였다(Ca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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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말라 - 7:16;11:14에 이어 중보 기도 금지 명령이 다시금 주어졌다. 백성들을 중재하는 일은 선지자들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였다(삼상 7:8). 그러나 당시 유다의 죄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징벌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12절에 가서는 그들에게 임할 재앙이 보다 상세히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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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 형식에 치우친 종교 제사의 무익함이 재강조되고 있다. 순종이 결여된 '금식', '번제', '소제' 등은 여호와께 수납되어질 수 없다. 그리고 '', '기근', '염병' 등의 세 항목은 전쟁 때에 언제나 수반되는 것들이었으며, 구약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5:12;14:15 ;29:18;삼하 24:13 ). 이러한 재난들은 B.C. 586년 예루살렘 파괴 때 적나라하게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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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크(Clarke)는 본절을 다음과 같이 의역하여 의미 전달을 명확히 해보고자 하였다 : ', 여호와여. 그들은 참으로 지나치게 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아서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처벌을 완화해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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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 여호와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밝히신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설교했었지만 그들이 설교한 것은 모두 거짓이었고 아무런 가치없는 복술, 혹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에 불과했다. 예레미야와 같은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사이의 구별은 그 말씀의 성취가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Thomp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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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 여호와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신적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런 자들은 제일 먼저 '''기근'의 심판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쉽게 현혹되었던 불충한 백성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며,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주의를 두다가 묻어줄 자도 없는 상황에서 예루살렘 거리에 내동댕이쳐질 것이다(16). 땅에 묻히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는 것은 가장 비참한 결말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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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눈이 밤낮으로 - 본문의 1인칭 주어인 ''는 예레미야를 가리키다. 여기서 선지자는 반대 감정 병존 상태(ambivalence)인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파멸 선고를 받은 백성들의 대표자인 입장에서는 가슴이 녹아 내리는 듯한 비애감을, 아울러 그 백성을 징벌하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큰 아픔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D.R. Jones). 한편 '파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베르'는 단순한 부상(wound, NIV) 정도 이상을 의미하는 말로서, '분쇄', '파멸', '파괴' 등의 뜻인 바, 개역 성경의 번역이 정확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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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 가는 곳곳마다 끔찍하고 무서운 광경이다. 상처입은 자, 죽어가는 자, 기아에 허덕이는 자, 살해당한 자들뿐이다. 죽은 자를 묻어 줄 자도 없으며, 죽어가는 자를 위로해줄 자도 없다. 구원과 희망이 될 만한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다 땅에 두루 다니며 - 선지자나 제사장들도 그 성읍들을 떠나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다닌다(Clarke). 블레이니(Blayney) 박사는 이 어구를 '그들은 돈벌이를 위해 물건을 싸들고 다니는 행상들처럼 거짓 교리나 잘못된 예언을 퍼뜨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라고 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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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절과 13절에 이어 또다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가 나오고 있다. 22절까지 이어지는 이 기도는 아브라함과 (18:23-33) 모세의(32:11-13) 중재의 탄원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내용은 하나님의 응답이 점차 강렬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점차 움츠러들고 있다는 점이다. '버리지 마옵소서'(9)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때문임을 참작하여 주십시오'(13), 그리고 '버림받아 마땅하지만 주의 언약을 생각하사 용서해주십시오'(21)라고 전개되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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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우리의 악과 인정하나이다 - '우리 조상의 죄악'이란 말 속에는 여러 세대에 걸쳐 지금까지 축적된 민족 공동의 죄가 포함된다. 선지자는 지금 이 백성을 대신해서 그리고 자신과 백성을 동일시하여 죄악을 고백하였다. 그렇지만 선지자의 고백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이다(Clarke). 이처럼 당대의 죄악뿐 아니라 조상들의 죄악을 인식하는 것은 전형적인 애가의 형식을 반영한다(26:40;79:8,9; 106:6, D.R. Jones) 약속의 땅에 대한 언약이 언약 당사자와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듯이(18:1-8). 그것을 상실하게끔 만든 죄악과 거기에 대한 책임 또한 양자에게 속하는 것이다(3:24;7:26 ;11:10;16:12,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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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이름을 위하여 미워하지 마옵소서 - 이 백성의 곤경에 대한 묘사와 자비를 구하는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열방은 여호와를 유다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도우심이 없으면 그의 신용과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말것이라는 호소이다(Thompson).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에 의해 오해와 목욕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백성의 죄악을 철저히 징계하신다.

 

 주의 영광의 위 - '당신의 영광스러운 보좌'란 뜻이다(J. Bright). 여호와는 성전 안 보좌에 앉아 계신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 보좌가 유다 민족의 안전에 대한 보증인 격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적 실체가 결여된 채 형식적 종교 행사만 치르어지는 성전은 이미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없었다(24:2 참조).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 '언약'은 출 24:7, 8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언약을 파기한 것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절하였으며, 우상에게 자신의 몸을 바쳤던 것이다. 언약의 한 당사자가 이를 파기한 이상, 상대방은 이제 언약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이제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Clar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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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 예상되는 심각한 기근 상황과 관련되는 호소인 듯하다.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사 비를 주시는 것은 참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인 것이다(Clarke).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 이 어구는 '우리는 주께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라고도 번역된다(J. Bright). 따라서 하나님께서 돌봐 주시기를 거부한다면 철저히 망하고 말 것이라는 애절한 탄원이다. 그러나 이 백성이 여호와의 사랑과 은혜를 인정하면서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기다린다고 해도 이제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허황되고 속이 빈 호소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뿐이었다(Thomp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