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야김 통치 기간 중 그 어느때, 아마 그의 첫 통치 삼 년 ,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토기 파편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점에서 판단하건대, 토기는 많은 수요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토기들은 디자인이나 형태 면에서 시대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유적지에 대한 연대를 추측케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특정 시기 또한 이를 통해서 짐작할수 있는 것이다. 토기를 소재로 사용한 비유는 19장에도 기록되어 있다(Nicholson). 한편, 이 예화는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피조물인 인간을 다루심을 보여준다. 인생은 마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작품을 만들어 내는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Clarke).
) -->
'녹로로'란 말을 직역하면, '돌 두 개를 가지고'가 된다. 이것은 수직으로 된 굴대 위에 두 개의 돌로 된 바퀴가 놓여 있는 장치를 말한다. 밑의 바퀴를 발로 돌리면 위의 바퀴도 돌아가는데, 이때 토기장이는 이 윗바퀴에서 점토를 빚어 그릇을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토기장이의 바퀴는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Bright, Clarke).
) -->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 4절과 7절 이하의 보다 특정적인 적용 내용에서 유추하건대, 그 당시 바퀴 위에 있던 그 특정한 진흙이라고 하는 것은 토기장이가 만들고자 의도하였던 그릇이 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다. 다시 말하자면, 진흙의 질이 좋지 않아 그가 만들고자 하는 그 그릇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흙은 토기장이의 원래의 의도를 좌절시켜 버리고 말았으며,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야 할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토기장이이신 여호와는 지기 목적에 저항하는 이 진흙을 그에 맞게 처리하실 것이다. 이처럼 여기서는 진흙에 대한 토기장이의 주권적인 능력이 초점으로 부각되며(사 64:8;룸 9:19-24), 아울러 자신이 원했던 그릇을 만들고자 하는 토기장이의 인내 또한 간과될 수 없는 사항이다(Feinberg, Harrison).
) -->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 여호와는 인간에 대해서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위치에 있다. 이러한 절대 주권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존귀하고 부유한 위치에 있는 자들을 끌어내리기도 하시고 반대로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시기도 한다(시 113:7). 따라서 장래사에 관한 한 아무도 스스로 장담할 수가 없다(Calvin).
) -->
그 악에서 돌이키면 뜻을 돌이키겠고 - 한글 개역 성경에 똑같이 '돌이키다'로 번역된 원어는 각각, '슈브'와 '나함'이다. 본문에서 전자는 인간의 회개를, 후자는 하나님의 긍휼에 따른 돌이킴심을 각각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악'으로 번역된 말과 '재앙'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동일하게 '라' 이다.
) -->
한 국가의 흥망 성쇠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즉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무조건, 자동적으로 축복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사 시대로부터 유다왕국의 멸망 때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에빠졌을 때 하나님은 질병, 사망, 기근 등으로써 그들을 징벌하셨으며(삿2:11-15;3:7,8;6:11;왕상16:7;왕하24:9-20 등 참조), 끝내 회개치 않음으로써 유다는 패망의 비운을 맞아야 했다.
) -->
이제 - '아타'란 표현은 어떤 변론의 결말 부분을 도입할 때 종종 쓰였던 말이다(신4:1등). 문맥상 본절은 1-10절에서 진행되어 왔던 내용의 논리적 귀결점이 되고 있다.
재앙을 내리며 선하게 하라 - 유다 백성은 거듭되는 회개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그 완악한 마음이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당할일만 남겨 놓고 있었다. 그들의 패역한 생활은 언약의 저주 조항의 발동을 요청하는 그런 것이었다. 오직 근본적인 변화만이 그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것이나, 그러한 변화에의 기대는 어렵게 되었다.
) -->
그들은 패역의 길을 너무도 멀리 걸어가 버렸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토기장이에게 소용도 없는 거칠고 뻣뻣한 진흙과 같은 것이 되어 더이상 토기장이가 의도했던 고귀한 형태로 빚어질수가 없었다. 오직 심판의 과정을 통해서만 그들은 토기장이의 손에 알맞는 진흙으로 다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온갖 악한 행위와 계속 되어온 언약 파기가 어떤 결말로 인도되고 있는가 하는 슬픈 내용을 볼 수 있어야 하겠다.
) -->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 '처녀 이스라엘'이란 말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신부라고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이 그에 합당하게 순결해야 된다는 의미를 암시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남편 맞을 준비를 하는 처녀와 같이 영적 순결을 지켰어야 했지만, 이방 종교 관습에 빠져 자기 몸을 더럽히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하사 다른 어떤 민족보다 사랑스런 존재로 여기고 그들과 더불어 교제하기를 원하셨으나(호2:16참조),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배도의 길로 가버렸다. 이스라엘의 외도행각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고 열방중에서도 볼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이는2:10-13의 내용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 -->
19절,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들어보옵소서 - 예레미야의 반응은 여호와의 적극적인 개입과 돌보심을 간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모순되는 왜곡된 현실 속에서 공의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반응이다(시 5:3;10:17;17:1;55:2;61:1;66:19;86:6;142:6 참조), 그런데 앞 구절의 해석 문제를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70인역(LXX)은 18절의 끝 구문을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자'라고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의 번역과 70인역의 번역은 본문의 의미 전달에는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만약 70인역의 번역을 따를 경우, 예레미야의 대적들은 그를 치기 위한 증거를 수집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예레미야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란 다름 아니라 그의 말을 책잡기 위함인 것이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러한 상황을 여호와께 호소하고 있는 것 같다.
) -->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 예레미야의 딜레마가 대단히 깊은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동족을 멸망으로부터 구해내려는 뜨거운 열정, 바로 그것 때문에 핍박을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악으로써 선을 갚는 잔인 무도한 행태는 시35:12;109:5 등에서도 폭로된 바 있다.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 자기 백성을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에 관한 언급이다. 우리는 이 내용과 17:16에서 보여준 선지자의 항의를 함께 상고해보는 것이 좋겠다(Nicholson).
) -->
'구약 > 예레미야서(구속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리미야21장,소용없는 다라쉬 (0) | 2016.04.01 |
---|---|
예레미야19장,오지병의 비유 (0) | 2016.04.01 |
예레미야16장,세가지 행위메세지 (0) | 2016.04.01 |
예레미야14장,언약기도 (0) | 2016.03.31 |
예레미야13장,5개의 행위메세지 (0) | 2016.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