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예레미야서(구속사)

예레미야13장,5개의 행위메세지

호리홀리 2016. 3. 30. 12:59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 여호야김의 후계자이며 아들인 여고냐(B.C. 598)의 통치하에 전달된 말씀으로 여겨진다. 그는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그 즈음에 갈대아인 장군들은 예루살렘 근처에 이르러서 진을 치고 있었던 것 같다.(왕하 24:8-11). 그러나 예루살렘 포위 공격은 느부갓네살이 그 주력군을 이끌고 왔을 때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는 유다인들이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했던 것이며, 썩은 띠를 허리에 두르는 상징적 행위로써 그들에게 임할 파국이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Clar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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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 ''란 일반인들의 허리띠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특히 제사장들이 에봇 위에 두르던 띠를 가리키는 듯하다(28:8). 이 띠는 에봇, 흉패, 관과 함께 거룩과 영화로움을 상징했다(28:40-43).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사장 나라가 유다를 상징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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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 여호와께로부터 주어지는 두 번째 지침이 하달되었다. 한편, 1-11절까지는 본장에 들어 있는 다섯 개의 경고들 중의 첫 번째 것으로서, 비유적 행위에 의한 메시지로 전달된다(R.K. Harr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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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번째 지침의 정확한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브라데'로 번역된 히브리어 '페라트'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와 동일한 단어가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아나돗에서 북동쪽으로 약 250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유브라데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였다(46:2;2:14;15:18;1:7;11:24;왕하23:29;24:7). 이처럼 이 말이 유브라데 강을 의미하면서 수없이 많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수세대에 걸쳐 많은 주석가들은 예레미야가 왕복 500마일 정도 되는 거리를 두 번에 걸쳐 여행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4, 6절 참조). 첫 번째 여행은 아나돗 사람들의 음모를 피해 석 달 동안 은거 했을 때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두 번째 여행은 내버린 그 띠를 되찾으러 갈 때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하나님이 그토록 먼 거리를 왕래하게 하셨던 것은 아마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한 경고를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Clarke). 한편 어떤 학자는 '페트라'를 아나돗 북동쪽 4마일에 위치한 '와디 파라'(Wadi Farah) 혹은 '에브랏'(베들레헴, Hitzig) 등으로 보거나, 아예 본문의 내용을 우화나 알레고리로 해석하기도 한다(Graf, Rudolph). 그러나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그다지 풍부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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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세 번째 명령과 예레미야의 실행에 관한 내용이다. 물가에 숨겨둔 천이 썩었다는 것은 처음 숨기던 때와 그것을 찾으러 갔던 때 어간에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을 말한다. 아무튼 유브라데의 진흙이 그 ''를 썩게 만들었고 그래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은 어떤 특별한 상징을 나타낸다. 이는 유다인들의 현상황이 어떠한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가리킨다. 아울러 이는 유다인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썩은 띠처럼 비참하게 연명해 가야 할 것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겠다(Clarke, Delitz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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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의 말씀이 - 유다인들의 치욕스럽고 비참한 상태에 대한 말씀이 계속 이어진다. 그들은 바위 틈에서 썩어짐과 같은 유배지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Ca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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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의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 '교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온'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교만'이나 '오만'의 뜻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탁월함'이란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고대 역본들중 70인역(LXX)이나 벌게이트역(Vulgate), 그리고 시리아역(Syriac Version) 등은 전자로 번역하였고, 아람어 탈굼역(Targum)''이라고 번역하여 후자의 의미를 취하고 있다. 이 단어를 개역 성경처럼 번역할 경우에는, 하나님이 유다의 교만을 징벌하신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반면에, 이를 '', '영광', '탁월함' 등의 긍정적 의미로 번역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으나(60:15) 그들은 스스로 패망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의미가 강조된다(Blayney, Calvin, Hors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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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 예레미야는 앞에서도 유다가 애굽이나 앗수르를 의존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2:18). 이처럼 유다는 주변 열강들의 틈새에 끼여 때로는 이쪽을 또 때로는 저쪽을 의뢰하면서, 정녕 의뢰해야 할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신앙을 저버리는 형태를 거듭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외세 의존 정책은 이방 신들이 국내로 유입되어 들어와서 악하고 부패한 영향력을 끼치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것이며, 하나님 백성의 부패와 타락을 더욱 확장시켰다. 아마 선지자는 이런 사실을 본절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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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과 10절에 대해서 어떤 주석가들은 앞의 행동화된 비유를 입증하고자 하는 후대의 편집자 해설이라고 본다. 그러나 어떤 부분의 배경상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단정한다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것으로 종종 판명되며 설령 앞의 내용이 포로기에 대한 언급이라고 하더라도 이 구절이 포로기 작품임을 나타내는 단서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살던 고대 근동 전역에는 이미 이 같은 파국적 사건의 가능성이 잘 알려져 있었고, 더구나 전지하신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굳이 후대의 기술(記述)로 볼 이유가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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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는 말은 그 당시 유행하던 속담이었던 것같다(Thompson).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다 알고 있는 뻔한 소리를 한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을 보다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 70인역(LXX)'그러므로 이르기를''그들이 너에게 이른다 할지라도'라고 읽고 있다. , 그들의 대답은 조소 섞인 투로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라고 말할 것은 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술취한 사람이 흥청거리면서 내뱉는 농담 같은 대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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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잔뜩 취하게 하고 - 클라크(Clarke)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 '너희들은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은 상징적인 말이다. 너희들과 왕 그리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이들 병들로 대표되고 있다. 그리고 포도주는 너희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분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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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 하나님의 영광이 일단 유다에게서 떠난 이상, 이제 이 백성은 아무 쓸모가 없는 빈 항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선택하사 은혜를 주셨던 것이며, 따라서 그들 스스로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해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특권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제 무책임한 이 백성이 여호와의 은혜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들은 불순종과 방종, 또 교만과 배도로 인하여 운명의 날을 맞게 된다. 결국 그들의 멸망은 갈대아인들의 주도 면밀한 침략 계획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야기시킨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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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는 들을지어다 - 수세기에 걸쳐 선지자들에 의해 전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였던 이 교만하고 잘난 체하는 백성에게 다시 한번 순종할 것을 호소한다(Nicho lson). 본절에는 두 동사, '듣다'( 솨마)'귀를 기울이다'( 아잔)란 동사가 대칭적인 위치에 놓여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서부터 27절까지는 두 가지 비유에 이어 임박한 심판에 관한 세 가지 경고를 싣고 있다. 그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15-17절은 하나님께 대한 교만과 자만심을 버릴 것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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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의 강도가 점차적으로 심해져가는 묘사를 통해 유다의 멸망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나아가는 사실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여기서 '흑암'은 재앙의 전조적인 현상임과 아울러, 유다 백성의 죄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어둠과 빛의 대립은 성경 전체를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양상인데, 이러한 대립 속에서 어둠은 다음 세 가지 측면을 내포한다. (1) 중생하지 않은 자에게 내재한 자연적 어둠(4:18). (2) 의도적으로 빛을 거부하는 고의적 어둠(3:19, 20). (3) 완고한 죄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징벌로서의 어둠(Fei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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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통곡하리라 - 신약 성경은 교만을 인생의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죄성(罪性)들과 나란히 기술하고 있다(7:22). 그리고 이것은 또한 온유나 겸손과 정반대된다(4:6;벧전5:5:). 바울에게 있어서 교만이란 타락한 이교 사회에서 오염되는 전형적인 산물로 여겨졌으며, 예레미야가 지적하는 것도 바로 이런 관점이다(R.K. Harrison). 한편, 클라크(Clarke)는 본절을 '너희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구제책이 없다. 그리고 파멸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이제 나에게는 너희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은밀히 슬퍼하고 곡하는 것 외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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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왕과 왕후에게 고하기를 - 이는 여고냐와 그의 모친을 말하는 것으로서, 여고냐는 어려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모친의 섭정을 받았던 것 같다(Clarke). 그녀가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그의 어린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유다의 왕후란 것이 공식적인 직책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왕후 역시 왕관을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왕상 2:19에 의하면 왕좌 곁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Nicholson). 한편 본절의 역사적 정황에 관해서는 왕하 24:8-12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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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방의 성읍들이 봉쇄되고 - 남방이란 원어로 '네게브'인데 유다 남쪽의 메마른 넓은 광야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Nicholson). 원어의 원래 뜻은 '건조하다'인데, 그 위치는 가사-브엘세바에 이르는 도상에 있었고 시내 반도 고원으로 이어진다. 이곳의 성읍들은 침략자들을 피해 유입해 들어오는 피난민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차단될 것이다(R.K. Harrison). 반면에 클라크(Clarke)는 이를 유다의 남쪽까지 갈대아인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어 말 그대로 끝에서 끝까지 파괴될 것을 말한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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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에서부터 27절까지는 유다의 처벌이 그들의 죄에 대한 완고한 성향에 따르는 불가피한 결과일 것임을 최종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내용이다.

 

 네 아름다운 양떼는 어디 있느냐 - 이 말씀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전달되고 있다. '거기 살던 수많은 부유한 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양떼들이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슬프게도 그들은 바벨론 군대 앞에서 쫓겨나 포로로 잡혀 가버린 것이 아닌가 ?'(Clar 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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