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예레미야서(구속사)

예레미야11장,언약파기

호리홀리 2016. 3. 30. 12:50

11장부터 12:17까지는 언약의 요구조건에 충실하라는 경고의 말씀을 담고 있는 단락으로서, 이 단락의 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첫 번째 견해는 느부갓네살이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무찌르기 얼마 전인 여호야김 시대에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고, 두 번째 견해는 B.C.622년 요시야 당시 힐기야에 의해 율법책이 발견된 후의 것으로서 종교 개혁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왕하 22,23). 일반적으로는 후자의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요시야의 개혁 운동에는 모세의 율법과 전통으로 돌아가라는 촉구와 함께 이교도의 제사 형식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대하 34장에 따르면, 율법책의 발견에 앞서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지역 신당에서는 가나안 종교 의식이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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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말'이란 것은 시내 산에서 체결되었던 언약을 말하는 것으로서(5:2) 하나님은 그들의 일치된 예배와 순종의 대가로서, 민족 초기 단계에 있었던 그들에게 물질적, 영적 필요품들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소유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할 근거는 이러한 조건들을 수납하고 성실히 이행하는 데 있었다(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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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약의 규정 조항들은 무시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내려지도록 촉구된다. 3절은 모세가 선포했던 것을 다시 부각시킨 내용이다(Ca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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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구약의 거의 대부분의 용례에서 순종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전반절의 '쇠풀무'란 말은 그들의 비참했던 노예 생활을 상징하는 말로 그 문자적 의미는 쇠를 녹이는 용광로나 화덕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노예 생활하던 그들을 주권적 권능으로 이끌어 내셨다. 따라서 그들의 불신앙은 참으로 심각한 것이며, 배은 망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른 방법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이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며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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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 예레미야는 언약 관계의 핵심이 순종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 다음, '아멘'이라는 익숙한 말을 사용하여 그 당시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에 대한 동의의 핵심을 다시 요약해서 지적한다. 물론 이 '아멘'이란 말은, 비록 언급이 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3절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27:15-26).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충실히 지킨 반면에(6:3;11:9;26:9), 정작 언약에 따른 축복에 모든 존재를 의존하고 있는 그 백성은 그들의 의무를 등한히하여 왔었다(Harr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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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준행하라 - 하나님의 언약에는 축복이 있는 만큼, 저주 조항 역시 있다는 점을 모든 백성들이 다 알고, 그들의 의무가 무엇이며, 또 그들이 받아 누릴 특권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야 했다(Clar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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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 본절과 8절은 70인역(LXX)에는 누락되어 있고, 다만 '그들이 순종치 아니하였다'란 어구만 있다. 여호와를 대신하여 전달하고 있는 이 예레미야의 요구 사항은 앞에서도 지적되었다시피 순종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 다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광범위하게 제시한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과거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당시에도 순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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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언약의 모든 말로 응하게 하였느니라 - 사람의 깊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있어서는 온 마음과 정성을 수반하지 않은 채 외적인 형태만을 갖춘 그런 순종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배도를 통해 시내 산 언약 규정을 파괴하였었기 때문에 이미 실제적으로 저주 조항의 가동이 시작된 것이다. 오직 진정한 영적 회심만이 소멸되어가는 언약 규정을 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나, 이런 조건이 충족될 수가 없었으므로 이제 선지자는 재앙의 도래 외에는 달리 선포할 것이 없었다(Harr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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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 여기서 '반역'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케쉐르'는 다양하게 번역되어 '폭동', '반항' 등으로도 쓰인다. 이 말은 원래 숨겨진 음모에 의해 야기된 폭동을 가리킬 때 쓰이는데, 여기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거스리는 모든 완악한 행사들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쓰였다. 특히 우상숭배는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명백한 거부였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언약 의무 조항에 대한 극단적인 파괴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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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 '부르짖다'는 뜻으로 쓰인 '자아크'는 단순히 외치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맹렬하게 울부짖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터져 나오는 절규와도 같다 하겠다(Calvin). 하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을 부르면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50:15). 그러나 당시 유다인들은 이미 회개의 가능성마저 없는 상태였고,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불러 보았자 그것은 진정한 회개에서 나온 것이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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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 백성들이 곤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듣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가 이제 그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백성들을 위한 기도에 대한 이 같은 금지령은 7:16;14:11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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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이 행음하였으므로 -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예디드)로 묘사하고 있는 이런 내용은 12:7에서도 보이며, 또한 사 5:1에도 등장한다. 본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혼인 관계에다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처럼 극진하신 대우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은 여호와를 버리고 영적 간음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다 집의 악을 인하여 재앙을 선언하였느니라 -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심으셨던 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며, 또한 그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신 이도 그분이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구절에는 '재앙'''에 해당하는 원어가 모두 '라아'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란 뜻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일어나는 '재앙'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는, 이른바 언어 유희(wordplay)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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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그들의 죄악을 꾸짖고 또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언한다는 이유로 그의 생명을 해()할 음모를 꾸몄다. 하나님은 이런 음모를 비밀스러운 경고를 통해 그에게 알려주셨던 것이며, 그 결과 예레미야는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Clarke). 한편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예들은 솔로몬시대부터 계속 아나돗에 살아왔었다(왕상2:26). 솔로몬 왕위 계승시에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탓으로 솔로몬에 의해 추방, 낙향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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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알지 못하였나이다 - 아나돗 사람들은 마치 그 주인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동물과 같은 행동을 하였다. 그들은 예레미야('나무')를 처치함으로써 그 입에서 선포되어지는 예언의 말씀('과실')을 단절시키고자 계획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레미야가 화()를 면하게는 되었다 하더라도 사회적,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고향 마을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 배경상 크나큰 낙담에 빠지게 할 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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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의로 판단하시며 여호와여 - 무죄한 자의 누명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탄원의 기도는 시편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주제이다(17:1-9). 그리고 적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가해 달라고 하는 것 역시 시편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부르짖음이다(17:13,Nicholson).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정당하게 판단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의 동기도 검토하신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엄청난 이 문제, 즉 자기 고향 전체가 그와 맞서고 있는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오직 하나님을 향해 중재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 이 같은 보복에 대한 요구는 이스라엘의 압제당하던 자들이 하나님께 호소할 때 쓰던 다소 일반적인 표현이었다(17:13,14;99:8;149:7;34:8;35:4 등 참조).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들이 압제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할 때 그는 오직 하나님께 원정(寃情)을 호소할 뿐이었던 것이다. '원정'( 리브)이란 말은 구약의 여러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법적인 소송 절차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도 법적 소송의 의미를 담고 있다(12: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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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 그들이 이처럼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 이유에 대해서 해리슨(Harrison)은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개혁 운동에 찬동하고 나선 때문이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톰슨(Thompson)은 이보다는 예레미야가 유다의 모든 종교와 사회 생활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본다. 아마 요시야나 예레미아의 대적들이나 일반 백성들은 모두 그 당시의 종교 생활에 어떤 위험한 요소가 있을 만큼 그렇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과거나 현재나 할 것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실패했다고 하는 예레미야의 강도 높은 비난은 아나돗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죄악을 선언한 예레미야는 그를 출생시킨 마을의 명예를 매우 손상시킨 자로 여겨졌던 것이며, 이런 사람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생각되었을 기능성이 높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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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종을 해하려는 이런 악한 음모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반응은 단호하게 주어진다. 하나님은 남는 자가 없을 정도로 철저한 살육이 임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한편 아나돗 사람들로부터의 위협은 그것으로 그치지않고 수차례나 더 계속되었다(20:1-3;38:6,13).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도와주시리라는 확약만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한편 아나돗에 대한 심판 예언은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 당시에 성취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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