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예레미야서(구속사)

예레미야서3장,돌아오라

호리홀리 2016. 3. 30. 04:02

요시야의 개혁이 무르익어 갈 때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됨과 동시에 크게 증폭된 회개 운동이 선지자의 예리한 통찰력에는 너무나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유다는 개혁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여호와로부터 등을 돌렸던 것이며,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예레미야는 이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재혼한 경우 첫 남편과 다시 결합하지 못한다는 율법의 금지 조항(24:1-4)을 내세워 유다의 잘못을 징책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받겠느냐 - 70인역은 이 부분을 '그 여자가 그에게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라고 번역하고 있는 반면 맛소라 사본에는 '그가 그녀에게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24:4'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前夫)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란 내용에 비추어 맛소라 사본의 기록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 -->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이 땅을 더럽혔도다 - 유다 민족의 배도에 대해서는 높은 산 어디에서나 그 증거를 목도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이처럼 산 위로 올라간 것은 신들과 더 가까이 접촉할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우상 숭배의 부도덕한 의식에 빠져드는 모습을 사막의 아랍인 대상을 이 숲 속에 숨어 약탈하려는 행동으로 비유하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보다 직접적으로는 음행할 기회를 기다리고 앉아 있는 창녀의 모습과 닮은 것이었다(38:14; 7:12-15). 예레미야는 이같은 더러운 범죄 행위를 가리켜 땅을 오염시켰다고 지적한다(thompson, Clar-ke, Codvia).

) --> 

 단 비가 그쳐졌고...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 뻔뻔스러운 얼굴을 한 창녀의 전형적인 모습과 그 행위에 대한 처벌로서 가뭄이 든 것을 말하고 있다. 단 비는 10.11월에 내리는 이른 비를 말하는 것으로서 토지 경작의 준비에 필요하였으며 늦은 비는 3,4월에 내리는 비였다. 그 이후 여름 기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다. 여기서 저자는 그의 사역 초기에 있었던 팔레스틴 지역의 가뭄을 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 --> 

 나의 아버지여...소시의 애호자시오니 - 이스라엘은 수십 년간 하나님을 무시하다가 가뭄이 닥쳐오자 비로소 옛날의 행복했던 시절에 사용했던 다정한 말로 여호와께 호소한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애호자'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의 원어 '알루프'는 흔히 '친구'라고 번역되며 때로는 '길들여진 짐승', '황소', '남편', '가장'등의 다양한 의미로도 쓰였다. 아마 예레미야는 대단한 주의를 기울여 이단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말속에는 여호와의 자비를 악용한 이스라엘이 마치 응석과 고집만 늘어난 아이처럼 제멋대로 가증스러운 길로 나아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Thompson).

) --> 

 노를 한 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두시겠나이까 - 이스라엘의 얄팍한 신앙의 일면이 엿보인다. 즉 그들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와 항의만 하면 자기들의 무수한 악행을 눈감아 주시고 재빨리 구원해 주실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번지르르하게 말만 할 뿐 악행을 그치지 않고 있다.

) --> 

 노를 한 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두시겠나이까 - 이스라엘의 얄팍한 신앙의 일면이 엿보인다. 즉 그들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와 항의만 하면 자기들의 무수한 악행을 눈감아 주시고 재빨리 구원해 주실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번지르르하게 말만 할 뿐 악행을 그치지 않고 있다.

) --> 

 오히려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 이 구절에는 이스라엘이 이방 제사 의식에 깊이 중독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로 인해 몇가지 시련을 당하고 난 후 여호와께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한편 남유다는 이스라엘의 범죄와 멸망에 넋을 잃고 흥미 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유다의 반응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 --> 

 내가 그를 내어 쫓고 - 여기에는 B.C.723년에 사마리아 성이 앗수르 군대에 의해 함락되는 역사적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왕하17:1-6). 그러나 사마리아 멸망 전에도 이미 북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의 침공에 시달렸다(왕하15:19). 디글랏 빌레셀 3(B.C.745-727) 당시의 앗수르군은 이스라엘 대부분의 도시들을 정복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왕하15:29). 이는 북이스라엘의 배도에 대한 값비싼 대가였다. 그러나 유다는 언약을 어진 이스라엘의 심판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에 빠져든 것이다.

) --> 

 진심으로...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 이스라엘이 언약 파기로 인해 심판을 초래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다는 진심으로 여호와께로 돌이키지않고 그 흉내만 내었다. 아마 예레미야는 여기서 요시야의 개혁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B.C. 622년 이후와 관계된다. 유다는 므낫세 통치 이전 즉 사마리아 멸망 때까지는 이스라엘보다는 우상 숭배에 덜 물들어 있었다. 그 이후 유다의 종교적 타락은 급속도로 심각해졌다. 그러나 요시야의 개혁과 더불어 유다는 다소 바른길로 들어서는 듯하였으나 예레미야에게는 이것이 피상적인 것으로 보여졌다. 종교 개혁으로 말미암아 종교적 행사는 활발했을지 모르나 참된 회개는 부족했던 것이며 예레미야는 이에 환멸을 느꼈던 것이다(5:20-31; 6:16-21; 7:1-15). 이 구절의 연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율법책이 발견되기 전, 즉 요시야가 그의 개혁 운동을 강화하기 이전에 나온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보다는 종교 개혁 조치의 초기 실패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고 이 구절을 B.C.622년 이후의 내용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 -->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 히브리어 원문상으로 언어 유희가 쓰였다. 그래서 이를 살려서 번역하면 '돌아선 이스라엘아 돌아서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자기 백성이 뉘우치고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하나님의 부성애적인 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내용이다. 여호와는 자비하시고 그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신다. 한편, 여기에는 사마리아에 임한 심판이 너무 심했다거나 또는 적절치 않았다는 의미는 전혀 없다. 따라서 유다가 더 악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용서받는다는 논리도 성립되지 않는다. 여기서 지적되고 있는 핵심은 유다의 오랜 죄악에도 하나님이 참고 기다렸다면,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만 하면 어떻게 용서함을 받지 못하겠는가 하는 내용이다(Thompson, Harrison, Nicholson).

) -->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듣지 아니하였음이니라 -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으로서 세 가지 회개 사항이 지적되고 있다. '듣지'에 해당하는 '솨마'는 그냥 말씀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지적의 배경에는 순종하면 축복이요, 불순종하면 저주라는 신명기적 언약관이 자리잡고 있다(28:1,2,15). 여호와의 언약 백성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사항은 그 언약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외 다른 방식에 의해서는 언약 백성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Thompson, Harrison, Nicholson).

) -->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 '남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알''주인(남편, )이 되다'라는 뜻으로 가나안 신 바알과 음가가 같은 동사를 사용한 언어 유희인 바, 하나님만이 참된 보호자가 되실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나는'( 아노키)이란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신부로 삼아주신 것이다(2:2; 2:2).

 

 하나와 ...둘을...데려오겠고 - 이 말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 있는 것을 전제로 한 지적이다. 그런데 이것은 전체적인 귀환을 가리키지 않고 각 성읍에서 하나와 각 족속 중에서 둘을 데려오는 정도의 극히 부분적 귀환이다.이는 곧 하나님의 가장 자비로운 부르심에 응답하여 회개하는 자들이 소수에 불과할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여기서 북이스라엘 사림들의 귀환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시온'은 통일 왕국 시대에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다. 북쪽 포로들이 시온으로 돌아오면 이스라엘 전체가 다시 통합될 것이며 성소 역시 하나가 되어 정치적, 민족적 분단이 제거됨과 동시에 하나의 백성, 한 분 하나님만이 있게 되는 것이다.

) -->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주리니 - 회복 시대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가 언급되고 있다. 즉 다윗처럼(삼상13:14) 여호와의 마음에 합하는 통치자가 여호와의 뜻에 따라 백성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23:1-6; 34:23; 37:24). 한편 예레미야는 여태까지 심판을 선포하다가 여기서는 은혜 장면으로 넘어간다. 어쩌면 하나님의 심판을 엄숙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이러한 은혜로운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인기를 누리던 낙관적 선지자들은 심판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심판 이후에 도래할 은혜 역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심판이란 없었고 오직 '값싼 은혜'만 있을 뿐이었다(27:16; 28:2-4).

) --> 

회복시대의 그림이 이제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묘사되고 있는데 첫째는, 주의 백성이 '이 땅에서 번성하는 것'이요, 둘째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도 생각지도 만들지도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1차적으로 포로 귀환 후의 상황에 관한 내용으로 보기도 하지만, 예언의 복합 성취라는 관점 및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로 볼 때 메시야 시대의 상황에 관한 언급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1) 구원받은 남은 자의 증가와 번영은 메시야 시대의 특징으로 묘사되는 사항이다(23:3 참조). (2) 언약궤는 이스라엘 종교의 최고 상징이었던 바 그것이 필요없게 된다는 것은, 옛 신앙의 청산과 새로운 예배(4:23)의 시대가 열림을 암시한다. 언약궤는 B.C.586년 예루살렘 함락 당시 소실되었거나 바벨론에로 탈취되어 갔을 것인데, 52:17-23의 전리품 목록에서 빠진 것으로 보아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 -->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 16절에 이어, 선지자는 예전에 언약궤가 지녔던 의미 곧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보좌(왕하19:14,15; 80:1)로서의 의미를 예루살렘 자체가 갖게 될 것임을 예언한다. 이 또한 1차적으로는 포로 귀환 후 재건될 예루살렘 성전에 언약궤가 없지만 예루살렘이 여호와 신앙의 중심지가 될 것임을 에언한 내용이며, 더 나아가서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영적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하겠다(4:26;12:22).

) -->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이르리라 -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재통일에 대한 약속은 이미 B.C.8세기 선지자들이 선포한 바 있는 주제이다(3:5; 2:12). 이러한 재통일은 두 왕국이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가는 고난을 겪은 후에야 마침내 이루어질것이다(11:1--16; 37:15-28).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보아 후대인 포로기 이후에 삽입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용어나 사상이 예레미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23:1-8). 한편 본절의 예언은 1차적으로 포로 귀환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보다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선택하신 바 메시야의 은혜로운 통치하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11; 37; 8장 등).

) -->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 같이 - 이스라엘의 죄악이 다시 배도와 간음으로 지적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남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 사상은 19절과 동일하다. 이 백성은 재앙을 만나면 구원을 호소하지만(4), 그 순간만 모면하면 부르짖은대로 행동하지 않았다(5).

) --> 

소리가 자산 위에서 들리니 - 어떤 학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 숭배를 한탄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호소하기 위해 높은 곳에 모여있는 것으로 설명한다(Clarke). 그러나 이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의 순간을 맞아 화급하게 부르짖는 장면을 조롱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Thompson).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울부짖으면서도 바알 숭배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요시야의 개혁으로 한때 그곳에 산재해 있던 바알의 단들이 모두 파괴되었지만 이들은 실재하지 않는 신들을 그리워하며 이곳에 모여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울부짖음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이 있을리 만무한 것이다.

) -->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 이 구절은 앞 단락이 끝나고 뒷 단락이 시작되는 중간부분이다. 여기에는 죄에서 돌아오라는 여호와의 의미 심장한 부르심이 기록되어 있고 본절 하반절에서는 25절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회개 장면이 시작된다.

) --> 

 이스라엘의 구원은...여호와께 있나이다 - 이스라엘의 첫 번째 고백 장면이 묘사된다. 이 고백에는 현재 당하고 있는 그들의 곤경이 무엇 때문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여호와가 그들의 유일한 참하나님이란 고백은 그들이 근본적인 신앙으로 돌아오는 것으로서(20:2-6; 5:6-10; 6:4), 이제 여호와를 그들의 주인으로 인식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런 고백은 여호와의 언약 갱신과 다름없다. 이는 여호와의 언약 사항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 

 부끄러운 그것이 - 이는 바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죄의 고백과 더불어 여태까지 섬기던 바알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 말의 원어는'보쉐트'로서 구약 성경 곳곳에 나타난다. 사울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이스보셋이라 불렀는데(삼하2:8) 이는 틀림없이 이스바알이란 이름 대신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그는 에스바알로도 불리웠다, 대상8:33; 9:39).

 

 우리의 어렸을 때로부터 - 이는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형성되던 출애굽 사건 이후를 가리킨다. 바알을 '수치'로 여긴 회개자들은 그들 조상들로부터 시작해서 가꾸고 수고하여 온 모든 것을 이 부끄러운 것이 삼켜버렸다고 선언한다. 즉 바알 숭배로 그들이 멸망하여 양떼와 소떼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다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 -->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 본절에 서술되는 회개 장면은 순종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들의 회개의 내용은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다는 것으로서 예레미야가 거듭 지적하는 주제이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범죄했다는 자각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자각은 여호와의 주권과 언약의 요구 사항을 거부했다는 고백이 포함된다. 하나님은 시내 광야에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19:5)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마음의 회개가부족하였다. 즉 회개에 대한 외적 고백과 그들의 신체적인 행동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4:1-4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