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강해

20과. 새 하늘과 새 땅 성경본문: 계시록 21장: 1절 ~ 27절

호리홀리 2014. 12. 17. 13:19

   20과. 새 하늘과 새 땅


  성경본문: 계시록 21장: 1절 ~ 27절


  21장 1절 보겠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사도요한이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이중결론 중에 마지막 결론의 시작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무엇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해석은 두 개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해석은 지구가 공중 분해되고 천지가 다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해석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지구는 그대로 다 있고 하나님께서 짐승의 표 받은 자만 다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새 창조로 해석합니다. 첫 번째 해석을 믿든 두 번째 해석을 믿든 그것은 자유입니다. 어떤 것으로 믿어도 상관없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도 재림장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4절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강림(降臨) 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물을 때. 

  6절에 보면, 노아의 홍수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세상은 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7절에 보면, 종말 때에는 불로 심판한다는 말을 합니다.

  10절에 보면,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올 것이고,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體質)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체질(體質)은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말합니다.

  12절에도 보면,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집니다.

  13절에 보면,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베드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렇게 위의 본문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천지는 소멸되는 것으로 비중을 둘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16장 18절에 보면 번개, 음성들, 뇌성, 큰 지진이 계속 두 번 반복됩니다. 큰 지진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큰 지진입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고 20절에 보면 각 섬이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습니다. 이 현상은 지구 전체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일어나는 지진 현상입니다. 그리고 21절에 보면 중수가 70Kg이나 되는 우박이 내립니다. 우주가 다 소멸되었다면 이런 현상은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절 한 구절 더 보면,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요한계시록 21장 1절로 돌아가서 보면, 하늘도 없어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이정도 보았으면 우주가 다 소멸되는 것으로 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지구는 그대로 보존하시고 새로운 시작으로 믿겠습니까? 자,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런데 계시록 21장 2절 끝부분에도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열리는데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실제로 열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혼인 잔치가 열리는 것같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하는 것입니까? 실제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자들이 제일 아름다울 때가 언제일까요? 신부화장 할 때입니다. 마치 어린 양의 혼인 잔치 같은 최상의 모습을 예수님 재림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21장 2절을 보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나옵니다. 옛 날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고 없어졌습니다. A.D.70년에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여기 ‘새 예루살렘’은 천국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지금 ‘새 예루살렘’이 공중에서 내려오고 있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표현입니까? 아니면 상징적인 표현입니까?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히 있지만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천국은 분명히 있고 우리가 그것을 믿지만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오는 것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입니다. 모든 이단은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천국이 금은보석으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을까요? 상징일까요?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도요한이 그것을 최상으로 표현한 것이지 천국의 실제가 그것이 아닙니다.

  사도요한이 눈에 본 것을 표현한 것이지 실제로 우주가 공중 분해되고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다 없어지는 것으로 믿어도 관계없습니다. 또 그렇게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를 보면 노아의 홍수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물 심판과 불 심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을 더 강조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더 강조할까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더 강조합니다. 노아의 홍수도 하나님의 심판이 초점이 아니라 노아의 가족들을 구원하시는 것에 더 비중을 두어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를 통해서 지구를 멸하실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범죄한 인간, 즉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들만 멸절시키고 그대로 다시 시작하는 갱신의 차원이지 지구를 없애는 것이 아니듯이 계시록도 성경은 그렇게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를 굳이 없앨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노아가 눈으로 본 그대로 다 없어졌지만, 그러나 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물이 빠졌던 것같이 사도요한도 눈으로 볼 때는 다 없어진 것같이 보이지만 그것이 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도요한이 눈으로 본 부분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10가지 재앙과 마지막 계시록의 재앙들은 일맥상통(一脈相通)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우주가 다 소멸되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는 놓아두고 재앙들을 통해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을 믿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두 가지를 소개하는 것은 마지막 부분에서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 나가기 위해서입니다. 계시록 21장 10절 보겠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새 예루살렘 천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실제로 높은 산으로 올라간 것입니까? 상징적인 것입니까? 상징적인 것입니다. 다 없어졌는데 높은 산이 어디 있겠어요. 사도요한이 본 모든 것들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실제 용이 튀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용 같은 모습을 한 사단의 실체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21장 2절 보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이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신부화장 한 것같이 최상의 모습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묘사한 것입니다. 3절 보겠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이제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단어는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4절 보겠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십니다. 우리 가운데 육신적으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회복시키시는 장면을 계속 보여줍니다. 5절 보겠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6절 보겠습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전 장들을 보면 식수가 다 오염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회복이 또 22장으로 넘어가서는 에덴의 회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로 다 쓸어버렸던 것을 회복시키듯 본 장은 하나님이 하나 씩 하나 씩 다 회복시키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1장은 1절~8절까지가 첫 번째 결론인데, 그 결론은 7~8절에서 이야기 합니다. 먼저 7절에서 결론을 이야기 합니다. 천국, 즉 새 예루살렘은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유업으로 얻을 자가 누구입니까? 이기는 자가 유업으로 얻습니다. 서론에 이야기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이야기에서 계속 이기는 자를 결론으로 끌어낸 것입니다. 어떤 시험도 환란도 아픔도 고통도 끝까지 이기는 자가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습니다.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8절 보겠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대조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둘째 사망에 참예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거짓말하는 자들’은 윤리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황제 우상숭배 할 때 거짓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12절부터 보면 계속 숫자들이 12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12는 완전수라고 했습니다. 실제적인 수가 아니라 계속 완전수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16절 보겠습니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새 예루살렘의 길이를 척량하니 12,000 스다디온이라 하고 있습니다. 12,000 스다디온은 1,500마일입니다. 한반도의 15배 정도의 크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적인 천국의 사이즈가 아니라 12의 완전수를 가리키는 모습입니다. 완전을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17절 보겠습니다.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높이가 144규빗은 12× 12입니다. 천국이 완전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8절부터 보석 하나 하나의 색깔을 두고 해석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바로 최상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2절 보겠습니다.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다는 말은 성 안에 성전이 없다는 뜻입니다. 초기에는 이 말씀이 그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왜냐하면 A.D.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된 이후 그들이 꿈꾸고 있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은 성전의 회복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건축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전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라 하셨는데 이제는 성전시대가 지나간 것이며 예배를 강조하는 계시록의 내용대로  성 안의 성전은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모습과 예배당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3절 보겠습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다는 말은 해와 달이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해와 달의 비췸이 쓸데없을 만큼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가 그렇게 비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7절 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두 번째 최종 결론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누가 들어가는가? ‘오직, 결코’ 라는 강력한 부정사를 쓰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만 들어갑니다. 우리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을까요? 안되었을까요? 기록되었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