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4장,욥,너의 믿음과 소망으로 돌아오라

호리홀리 2016. 2. 26. 10:45

욥의 탄식에 대해 좀 참아주고 기다려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은 침묵하고계시지만 욥의 말을 다 듣고 계셨다. 그리고 받으셨다.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그것에 대해 응답하고자 했다. 욥의 세 친구들 중에 엘리바스가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그가 그들 가운데 최연장자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Pope, 박윤선). 한편 엘리바스의 변론은 방법상에 있어서 매우 세련되어 있으며 내용상에 있어서는 보편 타당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또한 그는 5:27에까지 진행되는 긴변론 중에서 욥을 정면으로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편 타당한 진리(=징벌, =보응)를 너무 도식적으로 고집한 나머지 욥의 특수한 상황(의인=징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이미 욥의 주장을 정중히 반박하고 있는 셈이다.한편 이하 전개되는 엘리바스의 변론은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서언(2)->(2) 훈계(exhotation;3-6)->(3)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7-11)->(4) 하나님의 계시(진리의 계시, 12-21)->(3) 인간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5:1-16)->(2) 훈계(exhortation;5:17-26)->(1) 결어(5:27). 이렇게 볼때 (4)를 축으로 하여 4장과 5장은 동일 주제를 반복하는 대칭 구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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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원문에는 본절에 조건을 나타내는 'if'(만일 ...한다면)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if'를 첨가하여 본절을 '조건절'로 해석한다. , '만일 ...한다면 ...하지 않겠느냐'(KJV, NIV, RSV). 개역 성경 역시 이러한 번역을 따르고 있는데 전후 문맥상 이 표현이 자연스럽다 하겠다. 한편 본문 전체를 알기 쉽게 번역하면 '누가 자네에게 말을 건네려 한다면 자네는 귀찮게 여기겠지.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일세'(공동 번역)로 된다. , 친구의 불행을 보고 권면, 위로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심경을 솔직히 토로한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1)욥이 자신의 말을 불쾌히 여기지 말 것과, (2) 욥에 대한 자신의 우정을 확인하여 이하 전개될 내용을 부드럽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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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엘리바스는 과거에 욥이 행한 선행과 업적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의 변론의 서두를 시작한다. 특히 이 인정 속에는 욥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 빠진 사람들을 보살피고 가르친 것에 대한 칭찬이 주조를 이룬다. 이처럼 엘리바스가 욥의 긍정적 측면을 먼저 부각시킨 것은 현재 고난에 빠진 욥을 위로하고자 하는 이유에서이기도 하겠지만 현재 욥에게 닥친 재난이 범죄의 결과임을 은근히 암시하려는 의도에서이기도 하다. 한편 3절 전반절과 4절 전반절 그리고 3절 후반절과 4절 후반절은 각각 대칭을 이룬다(Hartley).

 

 교훈하였고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사르타'는 완료형으로서 욥이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육(訓育)하여 왔음을 가리킨다. 특히 이 단어의 원형 '아사르'는 회초리를 들거나 벌을 주어 올바른 길로 인도한 행위를 묘사할 때 쓰였는 바(4:36;2:10;16:7;94:12). 이는 욥이 죄인된 이웃을 경책하여 선한 길로 강하게 이끌었음을 시사해 준다. , 욥은 이웃에 대해 무관심과 자기 위주의 독단적 신앙생활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 성경에서 ''은 종종 '능력'(4:24), '보호'(89:13), '도움'(7:9;8:18)등을 상징한다. 따라서 '손이 늘어진 자'는 용기를 잃고 낙담한 자를 비유한다. 영역 성경은 이를 '연약한 손'(KJV, NIV, RSV,weak(feeble) hands)으로 번역했다. 이는 또 정신적 육체적으로 허약한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12:12). 이렇듯 신체의 일부분의 특징을 예로 들어 그 사람의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으로는 '간담이 녹았다'(두려워하다', '절망하다'의 뜻, 2:9,24;14:8), '얼굴을 돌리다'('싫어하다'의 뜻. 31:17;대하 30:9;10:11;13:1;88:14), '목이 곧다'('거만하다'의 뜻, 대하 36:13;17:23;19:15;29:1)등이 있는데 이는 히브리 시문학의 특징적인 기교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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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넘어져 가는 자 - '넘어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 '가솰''비틀거리다', '빼앗기다', '쇠하다', '파멸되다' 등의 뜻을 가진다. 그런데 성경상에서 이용어는 주로 (1)하나님의 징계로 멸망해 가는 사람(26:37; 9:3;16:18; 11:14), (2) 발을 잘못 디뎌 엎어지는 사람(28:13)등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1)의 뜻으로 쓰였다. 이는 결국 욥이 죄를 짓고 멸망해 가는 사람들을 권고하여 생명의 길로 돌이켰다는 뜻이다.

 

 무릎이 약한 자 - '무릎'은 신체 구조상 몸의 중심을 지탱하는 주요 부분이다. 따라서 '무릎이 약한 자'는 자기 스스로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자, 즉 신체 허약한 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말은 동시에 정신적 허약자, 곧 힘이나 담력을 상실한 자를 스스로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극빈자와 소외계층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시 109:24('약한 무릎'), 35:3('떨리는 무릎'), 7:17('물과 같은 무릎')에도 나타난다. 결국 3절을 포함하여 본절은 욥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대()사회적 관계에 있어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의로운 자였음을 입증해 준다. 참고로 욥의 대() 사회적 선행에 대한 자증(自證)적 변론은 29장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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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1) 욥의 나약함에 대한 비난 :, 욥이 자신의 현재 처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타인들에게는 격려와 용기를 주었으나(4,5)이제 자신에게 재앙이 임하자 낙담과 불신앙에 빠졌다는 뜻이다. 다시말하면 욥이 타인의 문제는 해결하였으나 자신의 문제에 해결하지 못하는 모순되 처지에 빠졌다고 은근히 비난하는 것이다. (2) 욥에 대한 격려와 권면:, 엘리바스가 욥의 지난날의 의로운 행적(3,4)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로 하여금 현재의 불행에서 일어나도록 권면, 위로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에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격려하고 교훈했듯이 너 자신도 현재의 고난에서 좌절하지 말고 일어서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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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뢰)과 소망이 그의 행위의 선함에 기초해 있다는 엘리바스의 주장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선행을 강조하는 히브리인들의 초기 신앙 관념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엘리바스가 본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의인에게는 축복을 주시되 악인에게는 징벌을 주신다는 것(권선 징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욥의 나머지 친구들 역시 이와 동일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욥 자신도 이런 생각을 지녔기 때문에 자신의 고난에 대해 너무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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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은 이하 전개될 엘리바스의 변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서 '권선 징악'의 원리를 표출하고 있다. 엘리바스의 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6:7). '죄의 삯은 사망'(6:23),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37:25,26)등 다양한 표현을 통해 그 행위에 상응하는 보응 원리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3:8). 그러나 엘리바스의 변론은 선악의 보응에 대한 보편적 원리를 욥의 고난이라는 특수한 영역에 적용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그 미숙함을 드러내고 있다. , 악이 징계받고 선이 보응받는 것이 일반적 원리이나 아벨의 예에서 보듯(4:8; 23:35) 종종 악이 득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민의 회개와(2:4), 의인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119:71) 악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고 유보하시기도 하신다. 엘리바스는 바로 이런 측면을 고려함 없이 욥의 고난을 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고로 그의 신앙은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다분히 현상적 차원에서 단순하게 이해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5:17-26에서 보듯 선악에 대한 엘리바스의 도식적 사고는 다소 유연한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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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역시 7절과 동일한 논지(論旨)로 일관하고 있다. , 심은대로 거둔다고 하는(6:7) 자연의 보편 원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 원리에 대해서 반박할 자는 아무도 없겠지만, 문제는 욥에게 닥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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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 기운 - 직역하면 ''(NIV, RSV, breath)이다. KJV'돌풍'(blast)으로 보다 생생히 번역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말씀'을 가리킨다고도 이해할 수 있겠다(박윤선).

 

 콧김 - 성경에서 '콧김'은 종종 극심한 진노를 가리킨다. 이는 어떤 사람이 노했을 때 코를 벌름거리며 그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코를 통해 나오는 것에 연유한 비유적 표현이다. 따라서 많은 영역 성경들은 이를 의역하여 '분노의 돌풍'(NIV,RSV, theblast of his anger)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본문은 신인 동형 동성론적(anthropomorphic) 표현을 사용하여 악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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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시가 문학(詩歌文學)에서 사자는 그 위용과 용맹성으로 인해 담대한 의인(28:1), 권위(30:29, 30)를 상징하기도 했으나 그 파괴적 성향으로 인해 '악인'(91:13), '죄인'(7:2;17:12;22:13;35:17;58:6) 등을 의미하기도 했다. 특히 사냥감을 입에 물고 목을 빳빳이 세운 사자의 모습은 회개할 줄 모르는 악인을 상징한다(17:12). 본절에 나타나는 사자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한편 본절의 '젊은 사자'11절에 나오는 '늙은 사자', '새끼 사자'는 모든 악인을 통칭한다. 따라서 엘리바스는 본절에서 남녀 노소 빈부 귀천을 불문하고 악인은 그 누구도 공히 심판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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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킨 것이 없어 - 사자가 그 먹이를 얻지 못한 상태(KJV,RSV,NIV,for lack ofprey)를 가리킨다. 본절에서 엘리바스는 악인이 결국 그 소득(열매)이 없으므로 인해 멸망할 것을 나타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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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는 소리 - '세미한 음성' 또는 '속삭임'(NIV,RSV,whisper)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처럼 신탁이 주어지는 전초 단계에 사람의 청각이 감지할 듯 말 듯한 세미한 음성이 주어지는 것은 '엘리야'(왕상 19:11,12), '사무엘'(삼상 3:3-9)등에게서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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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 잠들 때 - 여기서 '깊은 잠'(KJV,NIV,RSV,deep sleep)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르데마'는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2:21), 어떤 것에 압도되어 정신()이 빠진 상태(29:10), 아브라함의 잠(15:12), 사울 일행의 잠(삼상26:12)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같은 무의식 상태가 인간의 의도적 능력이나 방편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초월적 간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초월적 임재(간섭)에 의해 무의식 상태에 빠짐으로써 계시를 받을 준비를 위했던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대부분의 구약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중에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 있었다는 실례(1:2; 1:1; 1:1 )를 들어 엘리바스의 계시받는 행위가 이방 선지자 발람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 선지자 중 엘리바스와 흡사한 상태에서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이 여럿 있으며(7:1 ), 이러한 실례가 신약에서도 발견된다(사도 바울:16:9, 사도 요한:1:17)는 점에 미루어 볼 때 이 주장은 별 신빙성이 없다고 하겠다.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 단순히 '생각 중에'(KJV, Inthoughts)로 번역하는 것보다 '동요하는 중에', 또는 '불안해 하는 중에'(NIV, Amid disquieting)로 번역하는 것이 14,15절과 조화를 이룬다. 이 말은 본서에서도 이곳과 20:2등 단 두번 나타나는데 그곳에서는 '초급함이니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초월적 존재(하나님 또는 그의 사자)의 임재로 인해 인간의 심령이 크게 동요(당혹)된 상태를 의미하는데, 다니엘(8:27;10:15-17), 느부갓네살(2:1) 등에게도 이와 흡사한 현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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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 '골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쳄'''(bone), '생명', ''을 의미한다. 이 용어가 잠 3:8에서는 '골수'로 번역되었다. 성경, 특히 시가 문학에서 보면 ''는 심령의 처소 또는 그 사람의 인격과 동일시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죄로 인하여 내 뼈로 평안함이 없나이다'(38:3), '저주가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109:18),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하느니라'(17:22) 등이다. 이렇듯 히브리인들이 뼈를 인격의 실체(實體)와 동일시한것은 그것이 인간 신체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일 뿐 아니라 '마음'과 마찬가지로 지..의의 깊은 처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의 초월적 임재에 접한 엘리바스가 그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인해 온몸(전존재)에 전율을 느꼈음을 가리킨다(23:9;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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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바람'(41:16; 8:1; 7:2;41:16), '광풍'(1:19;30:15; 27:8;32:2), '생명'(3:21;8:8;12:7),'의지'(대상 5:26;대하 21:16;36:22;1:14), '기질'(10:4) 등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으나 하나님과 관련하여서는 주로 그분의 ''(26:13;33:4;11:7,25;9:20; 104:30;48:16;11:19;36:26,27),사물을 소생시키거나 진멸하는 그분의 '능력'(4:9;18:15;33:6;10:17;5:9)을 뜻한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에 대해서는 단순한 '바람'(wind), '천사'(angel), '초자연적인 숨결'(uncanny breath) 등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본절 하반절에 근거하여 이것은 인간의 몸을 오싹떨게 만드는 '찬 바람'(a cold breath of air)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Rowley).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Anderson, 삼하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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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 '형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무나'는 하나님의 얼굴, 영광(12:8; 17:15)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독특한 용어이다. 따라서 본절은 엘리바스가 하나님의 얼굴(형상)을 보기는 보았으나 그것을 분변하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 엘리바스가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느냐 하는 질문에는 많은 난점이 따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순수한 ''이신 까닭에 결코 물질적 형상을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물론 모세(12:8), 다윗(17:14,15)등이 직접 대면(對面)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위엄스럽고 영광에 찬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와 동일하게 칼빈도 '하나님의 본질적 형상은 인간에게 결코 보여지지 않는다'(Bavink, Gereformeerde Dogmatier, p.179)고 하였다. 따라서 본절에 뒤이어 나오는 '오직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으니라'는 말은 엘리바스가 직접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 것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종용한 중에 목소리 -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조용함 그리고 한 목소리'(astill,small voice; 개역 성경. '세미한 소리')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NIV 번역처럼 '한 조용한 목소리'(a hushed voice)로 옮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이처럼 명사와 그것을 형용하는 형용사 대신에 두 명사를 접속사 and로 연결하여 표현하는 것. 예를 들면 '아름다운 소녀'(beautiful girl)'아름다움 그리고 소녀'(beauty and girl) 등으로 표현하는 것을 문학 기법상 이사 일의(二詞一意)라고 한다. 한편 엘리바스가 본환상은 목소리(음성)로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을 맺는다(21), 이는 엘리야가 받은 환상과 흡사하다(왕상 19: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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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 '하나님보다'에 쓰인 전치사 ''은 비교급인 '...보다', '...'의 뜻으로 보기보다 '...로부터', '...앞에서'(before)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Driver, Gray, Delitzsch). 한편 '인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노쉬''깨어지기 쉽다', '약하다', '병들다' 등을 뜻하는 동사 '아나쉬'에서 유래하여 연약한 인간,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성을 지닌 인간(KJV, NIV, RSV, mortal man)을 가리킨다(6:4; 9:28;16:27; 삼하 2:29; 대하 24:24; 2:2 ). 따라서 본절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영원한 분(90:2;102:26)이신 하나님 앞에서 절대 의로울 수 없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 그 창조하신 이 앞에 성결하겠는가'로 옮겨질 수 있다. 앞에 나온 절이 시간의 카테고리(, 인간=유일;하나님=무한(영원))에 견주어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음을 설파한 것이라면, 본절은 존재성(存在性)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의가 하나님 수준에 이를 수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 피조물인 인간이 피조의 주체요 동력인(動力因)인 하나님 앞에서 결코 성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로 본문 전체는 인간의 유한성과 부패성(죄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이 죄성은 단순히 윤리가 도덕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파악되고 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요컨대 인간은 특정한 죄악을 범해서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에 있어 초월성을 지닌 하나님과 비견될 수 없고, 또한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의 의()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다(4:13; 벧후 1:4). 한편 욥은 본문에서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 의()의 수준에 이를 수 없다든지, 아니면 인간이 전적으로 죄성을 지닌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회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그 자신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차후에 욥이 스스로 인정한 진리이기도 하다(9:2). 고로 본문의 계시는 명확한 진리이기는 하나 그 당시 욥에게 있어서는 해결책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욥의 머리속에는 왜 하필 자신에게 그토록 엄청난 환난이 닥쳤는지에 관한 의문과 탄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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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종 - 하늘에서 하난님을 수종드는 (his heavenly attendants)를 가리킨다.

 

 그 사자 - 이것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의 무리를 가리킨다(KJV, NIV, angels) 천사들은 인간보다 성결하여 하나님 가까이에서 수종드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믿지 않고 미련하다고 하신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완전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과 유한성을 나타내 준다. 한편 어떤 학자는 본문의 천사를 타락한 천사로 보기도 하나 그 타당성 여부는 아직도 논란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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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 집에 살며 - 이는 흙으로 만든 집에 사는 인간의 거주 상태(KJV, RSV,dwell(live)in (the) house of clay)를 묘사한 것이라기 보다는 흙처럼 연약하여 부숴지기 쉬운 인간의 육체를 가리킨다(LB, men made of dust).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는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10:9),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33:6) 등이 있다. 인간은 원래 흙으로 지음을 받았으며, 사후(死後)에 그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경적 사상에 비추어 볼 때(2:7;3:19; 고전 15:47) 이는 인간의 기원과 그 운명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탁월한 표현이다.

 

 티끌로 터를 삼고 - 인간은 흙에서 왔으며(2:7) 그 흙()에 삶의 기반을 두고 살아간다. 이는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3:17),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3:19)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잘 입증된다. 본문은 이처럼 인간의 생존 터전인 땅을 '티끌'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이 의지하는 대상(물질, 명예 등)의 허무성과 유한함을 피력하고 있다. 나아가이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없다면 불안과 허무의 상태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해 준다(22:16; 10:25).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 '하루살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 )''(,각다귀)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전자가 쓰였다. KJV는 본 구절을 이끄는 관계 대명사로 which를 사용함으로써 선행사 houses()를 수식하게 했다. 원래 좀은 의복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캄(Hakam) 같은 학자는, 여기서'이쉬'가 좀벌레와 유사하게 생긴 벌레로서 블록의 짚을 갉아 먹어 진흙 집을 무너지게만드는 것이라고 본다(Hartley). 하지만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이쉬''하루살이'로 옮겨도 무방하겠다. 성경에서 하루살이는 그 생명의 짧음과 연약성(하루살이는 조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죽는다)으로 알려졌다(51:6). 이것에 근거하여 본문은(하루살이처럼 쉽게 멸망할 수 있는) 인간의 나약함을 설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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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에서 인간의 연약성을 논증한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논증하고 있다. 특히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라는 표현은 마치 '아침에 태어났다 저녁에 죽는' 것같은 인간 생명의 덧없음과 짧음을 과장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 인간의 일생은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 순간만을 사는 찰마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짧은 인생이 어떻게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 앞에서 의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하는 반문이 본문 속에 내포되어 있다.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 이는 인간의 존재가 너무나 하찮은 고로 아무도 그의 운명을 주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이것은 인간이 아침에 태어나서 저녁에 죽을 정도로 짧은 인생을 사는 까닭에 자신의 장래 운명이가 처지를 인식할 겨를도 없이 죽음을 맛본다(KJV, RSV, they perish for ever without any regarding it)는 뜻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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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막줄 - 여기서 '장막'은 인간의 육체를 상징하며(고후 5:1,4; 벧후 1:13), 줄은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생명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장막을 지탱하고 있는 줄을 뽑을 때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6:9;38:12).

 

 지혜가 없느니라 - 17-19절에서 엘리바스는 인간 육체의 유한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한 바 있으며 여기서는 인간의 지적 도덕적 불완전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