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1장,기가막힌 일을 당했을 때

호리홀리 2016. 2. 23. 15:18

욥의 고향은

(1)하란(Haran; 11:31; 37:12), (2)에돔(Edom;32:3), (3)에돔에서부터 시리아까지 포함하는 지역 등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어느 것도 정설(定說)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추측컨대 이 명칭은 남으로는 에돔(36:28), 그리고 북으로는 아람 땅(10:23;22:21)을 포함하는 요단 동편의 광대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 같다.

 

 순전하고에 해당하는 형용사 '''완성하다'(31:40), '끝내다'(왕상 6:22), '소진하다'(47:15; 37:21)등을 뜻하는 동사 '타맘'에서 유래하여 '온전한','정직한' 등의 의미를 갖는다. 본서에서 특히 이 말은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의 완전성을 의미할 때 주로 쓰였다(8:20;9:20-22). 대부분의 영역 성경이 이것을 '허물이 없는'(NIV, RSV, blameless)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정직하여 - '야솰'은 그 어근상 '곧다', '평탄하다','곧은 길을 행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이 말 역시 바로 앞에 나온 원어 ''과 유사하게 도덕적 완전성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욥이 영적으로 뿐 아니라 실제적 생활에 있어서도 무흠하게 살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자더라 - 본절 전반부가 견실한 도덕가로서의 욥을 묘사한 부분이라면 이 구절은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욥의 자세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지역에서, 그것도 계시가 충족히 발전되지 않은 시대(족장 시대 초기)에 욥이 생존했음을 감안해 볼 때 이러한 신앙은 실로 위대한 것으로 찬탄받을 만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의인'으로 거듭 인정하셨다(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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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에서 욥의 의로움을 소개한 후 곧 바로 본절에서 욥의 자녀 수를 기술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욥의 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임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고대 히브리인들은 많은 자녀를 하나님이 주시는 큰 축복 중의 하나로 여겼다(33:5;127:3).

 

 한편 일곱, - 의 숫자는 실제 욥의 자녀 수를 나타내는 1차적 목적 이외에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이 숫자의 비율은 욥의 양과 약대의 수(3), 솔로몬의 아내와 처(왕상 11:3)의 수에도 적용되어 나타난 바, 곧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을 상징한다. 특히 일곱 자녀, 그중에서도 일곱 아들을 갖는 것은 최고의 축복을 가리킨다(4:15).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후 욥이 받은 자녀의 수도 아들 '일곱'과 딸 ''(42:13)이었는데, 이 비율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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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 사람 - 성경에서 이 용어는 (1)아람인(29:1), (2)모압, 암몬, 에돔인(11:14), (3)아멜렉, 미디안인(6:3;7:8)등을 가리킬 때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욥의 고향이 요단 동편에 위치한 '우스'(1)임을 근거해 볼 때, 아마 이 단어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본 동쪽 지역, 곧 요단 동쪽 지역에 거주한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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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각 자기의 집에서 - 이로 미루어 보건대 욥의 일곱 아들들은 결혼하여 분가(分家)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 히브리 사회에 있어서 유력한 가문의 아들은 미혼인 상태에서도 자기 가옥을 소유하기도 했으며(25:5,6; 10:4; 삼하 13:7;14:24,31),결혼할 경우에는 더욱 그리하였다(삼하 13:8,20).

 

 그 누이 셋도 청하여 - 아마 이들은 미혼인 상태로 욥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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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잔치 날이 지나면...불러다가 - 욥의 아들들은 자신과 그 형제들의 연이은 생일 잔치(4)로 말미암아 신앙적 해이 상태에 빠졌을지 모른다. 따라서 욥은 이와 같은 적절한 시기에 그들을 성결케 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제고(提高)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불미한 일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의도했던 것이다.

 

 번제를 드렸으니 -욥이 직접 제의를 관장하는 본문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생존 연대는 일단 모세 법령 반포 이전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모세 율법에는 제사장만이 제의를 행했던 것이다(15:9, 10). 한편 이방인으로서 이와 비슷한 제사 행위를 한자로는 발람을 들 수 있다(23:1, 14, 29).

 

 배반하였을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라크'는 원래 '축복하다'(bless), '찬양하다', '경배하다'이나 완곡 어법(euphemism)으로는 정반대의 뜻인 '저주하다'로도 쓰인다. 본서 기자는 서두 부분에서 '하나님에 대한 저주'의 모티브(motif)를 여러 번 등장시킴으로써(1:1;2:5,9) 각 개인과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사랑에서 기인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방편에서인가? 이러한 질문은 누구에게나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J.E. Hartley).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 '이것이 욥의 규칙적인(일관된) 관례였더라'(NIV,RSV, continually)라고 번역될 수 있으나 원문상 '그의 모든 날(동안) '(all hisdays) '일생의'(lifelong)란 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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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아들들 - 천사들을 가리킨다(NIV, LB, the angels). 구약에서 천사는 '여호와의 사자'(16:11; 22:23: 대상 21:16-22), '신들의 아들'(3:25) 등 다양한 명칭으로 언급되었다.

 

 사단도...왔는지라 - 몇몇 학자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사단이 하나님의 아들(천사)과 동등한 수준의 권리를 지닌 것처럼 주장한다(Driver & Gray, Pope, Gordis). , 사단도 소위 하나님의 천상 회의의 한 구성원이었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사단은 타락후 하나님으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한 불의한 천사로서(28:15-19) 사실상 그러한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가운데'(among)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전치사 ''는 그 용례상 불의의 '침입자'(intruder)를 언급하는 구절에 자주 쓰였다(14:28). 따라서 사단은 수종드는 천사처럼 하나님의 보좌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4:6-11;19:4) 단지 욥을 참소하기 위해 그곳에 몰래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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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에 두루 돌아...왔나이다 - 일견(一見)본 구절에서 사단은 하나님의 파송을 받아 세상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처럼 비추어질 수 있다. 그러나 본절은 안정이 없고 분요(紛擾)하며 목적없이 배회하는 사단의 상태를 문학적 기법으로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13:25).한편 베드로는 사단을 가리켜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고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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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종 - ''이란 용어는 문자적 의미로서 '노예'를 의미할 수도 있었으나 여기서는 오히려 존경과 명예의 칭호로 쓰였다(Anderson). 특히 '내 종'이라는 용어는 욥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존재임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14:31;14:24 ;20:3).

 

 이와 같이...없느니라 - 욥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노아(6:9), 모세(34:10). 아벨(23:35)에 대한 것과 흡사하다. 실로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죄중에 빠졌으나(5:12) 구속사의 각 단계마다 출중한 의인을 찾아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42:1).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들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선행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본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욥이 전적으로 무흠했다든가, 아니면 절대적 의를 소유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다만 당시의 조악(粗惡)한 환경하에서 그가 누구보다도 영적, 도의적으로 신실하게 살려고 진력한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기뻐하시며 '의인'으로 인정하신다(6:9;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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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까닭 없이...경외하리이까 - 이는 욥의 신앙이 반대 급부적 내지는 인과론적 원리에 근거해 있다는 사단의 참소이다. 다시 말하자면 욥이 하나님께로 받은 바 기존의 물질적, 영적 축복에 근거하여 신앙을 가졌다는 주장이다. 이를 좀더 확대 해석하자면 인간이 종교를 갖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모종의 유익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와 상통한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욥의 시련에서 분명히 입증되듯(3), 그의 믿음은 단순히 '주고받는'(give and take)식의 타산적 신앙이 아니라 초월자에 대한 전적인 신뢰였다(12:1-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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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울 - 비나 바람, 그리고 맹수로부터 가축(또는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운 가시울타리(thorny hedge)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을 상징한다(5:5;2:6). 당시 욥의 거주 지역에서 목축업이 주로 성행하였고(3), 따라서 맹수의 침입으로부터 가축을 보호하기 위한 '산울'이 긴요히 필요했을 것이다. 사단은 이러한 환경적 배경을 이용하여 욥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설득력 있게 전개시키고 있다.

 

 소유물 - 주로 토지나 부동산 등을 뜻하는 '아훗자'(, 23:4)와는 달리 대부분 '가축'(flocks and herds)으로 옮긴 NIV번역이 보다 정확하다 하겠다.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 욥의 재산 증가에 대한 수사학적 표현이다. 여기서' 널리게 하다'에 해당하는 동사 '파라츠'는 어떤 일이 돌발적으로 '발생하다'의 뜻으로서 야곱의 갑작스런 재산증가를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다(3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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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절에서 반대 급부적인 신앙 논리를 주장한 사단이 본절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궤계를 토로한다. , 그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욥의 재산과 자녀를 빼앗도록 간청한다. 사단은 욥의 신앙이 다분히 현실 기복적인 토대에 근거하여 있음을 확신하고 물질적 축복이 상실되면 욥의 신앙 또한 궤멸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논리는 축복=신앙, 고난=비신앙(저주)이라는 이분법적 단순 논리에 기초해 있다. , 그는 인간을 다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지나치게 단순화 평면화시켰으며, 조악한 현실의 정황을 초월하여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을 주요 특성으로 하는 신앙의 특성을 간과하고 현상적 측면만을 보았던 것이다.

 

 치소서 - '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는 어떤 대상을 파괴하거나상처를 입힐 의도로 타격을 가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주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급격한 징벌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32:25,32;12:23;28:7; 대하14:12). 본서에서는 욥의 자녀의 집을 무너뜨리는 대풍과 연관되어 사용되기도 했다(19).

 

 정녕 - '기필코', '반드시'라는 뜻으로 사단의 교만함과 어리석음이 동시에 표출되어 있다. , 그는 하나님의 재앙에 대한 욥의 반응을 미리 단정짓는 영적 교만함을 보였으나, 결국 그의 예상이 빗나감으로써 우매함을 스스로 자인하는 셈이 되었다. 이렇듯 사단은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식의 지레 짐작으로 교만함을 보이나(28:11-15)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물어 버리신다.

 

 대면하여 -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의 얼굴을 향하여'(KJV, RSV, to thy face)로서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표현이다. 문학적 표현법에 비추어 볼 때 '얼굴'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46:30; 25:23). 특히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의 영광과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성경에 자주 언급된다(10:28;6:25). 따라서 본절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모독적인 행위의 하나를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

 

 욕하리이다 - 히브리어 '바라크''저주하다'(KJV,RSV,NIV, curse),'모욕하다'의 뜻이다. 사단은 욥이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예견과는 달리 욥은 지난(至難)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저주하는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음으로써(20-22; 2:3, 10) 사단의 계략에 빠져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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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은 사단의 활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해 준다. (1)사단의 능력의 제한성 : 사단은 철저히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다(삼상 16:14; 삼하 24:1; 대상 21:1; 고전 5:5; 고후 12:7; 2:14). 본절에서도 사단이 독자적으로 욥을 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허락이 있은 후에 그 활동을 하는바,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독자적 능력을 가지지 못했음을 반증해 준다. (2)활동(역할)의 제한성 : 사단의 활동은 하나님의 명령의 범위 안에서만 행해진다. 욥에 대한 1차 시험에서 사단은 다만 욥의 자녀와 재산에만 관련되 재앙을 내렸을 뿐 그의 육체는 건드릴 수 없었다. 2차시험에도 그는 욥의 육체에 관련된 질병을 주었을 뿐 생명을 해하지는 못했다(2:5,6).이는 결국 사단이 성도를 미혹하여 시험에 빠뜨릴 수는 있으되(5:3;고전 7:5), 그를 하나님의 장중에서 분리하여 멸망시킬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고후12:7).

 

 네 손에 붙이노라 - 이는 어떤 사람이 특정한 대상을 자기 주관대로 처리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9:2;14:20; 3:3; 대하 24:24). 사단은 욥을 시험할 수 있는 허락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것이다.그러나 그의 시험은 욥의 몸(육체)에는 적용되지 않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행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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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 아마 이날은 욥의 장남(長男)의 생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4절에서 보듯, 욥의 자녀들은 각기 자기 생일이면 그 형제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장남의 특권과 중요성이 남달랐던 고대 사회의 관습을 염두에 둘 때(27:1-4;35:17;43:33) 아마 이 날에 욥의 모든 자녀들이 참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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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 - 욥의 수하에 속해 있었던 종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15절에서 보듯, 그는 스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나머지 종들과 같이 일터에 있었으며, 또한 욥을 '주인'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욥에게 2, 3, 4차 재앙의 소식을 전해준 '사자'와 동일인인지는 확실치 않다(16-18).

 

 소는 밭을 갈고...풀을 먹는데 - 유목 생활의 전형적인 평화로움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본서 기자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당시 욥의 생활상의 단면을 암시해주는 목적 이외에, 앞으로 전개될 재앙이 어떻게 욥이 향유한 이 같은 평화를 파괴시켜가는가를 극적으로 나타내려는 목적도 있었다. 한편, 소가 밭을 갈았다는 구절에 비추어 볼 때 욥은 단순히 유목 생활만을 한 것이 아니라 농경 생활도 병행하는 반유목민이었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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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바 사람 - 아마 이들은 오늘날의 이디오피아로 알려진 스바(왕상 10:1-13)로부터 이주한 남 아라비아인(south Arabians)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들의 후예들은 금, 보석, 향료 등 값비싼 물품을 교역하는 부유한 상인들로 알려졌었다(왕상 10:1-13; 72:10, 15; 60:6;6:20; 27:22; 3:8). 6:19에서도 욥은 이들을 가리켜 '행인', '무역상'(traveling merchants)으로 부르고 있다. 욥 당시 이들을 아랍 지역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1차 재앙은 3차 재앙(17)과 비슷한 일면을 지닌다. , 두 재앙 모두 인간(스바인, 갈대아인)을 통해 주어졌다. 반면, 2, 4차 재앙은 자연을 통해 주어졌다(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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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아직 말할 때에 - 이와 동일한 표현이 17, 18절에 연이어 등장한다. 따라서 욥에게 임한 1-4차 재앙은 연속적으로 발생했음을 알 수 았다. 욥의 재앙은 그것이 (1)돌연적으로('갑자기', 15, 17), (2)연속적으로('그가 아직 말할 때에', 16-18), 그리고 (3)철저하게('나만 홀로 피한 고로', 15-17,19)임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하나님의 불 - 성경에서 이것은 일반적으로 '번개불'을 가리킨다(11:1;왕상 18:38; 왕하 1:12). 그러나 여기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쏟아졌던 것과 같은 '유황과 불을 동반한 소나기'(19:24)인 것 같다. 왜냐하면 7,000이나 되는 양을 일거에 소진시키려면 단순한 번개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이러한 이적을 일으켜서 욥에게 파괴적 재앙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양과 종을 살라버렸나이다 - 원문을 직역하면'(그녀, '하나님의 불') 양을 먹어 버리고 종들을 삼켜 버렸나이다'이다. 개역 성경에는 동사가 하나밖에 없으나 원문에는 '바아르'(, '먹어 버리다', '없애다')'아칼(, '먹다', '삼키다')등 동사가 두개 나타난다. 이처럼 비슷한 뜻을 지닌 동사를 반복하여 사용한 것은 그 뜻을 강조하기 위한 히브리인들의 문학적 기법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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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대아 사람 - 이들은 B.C. 7세기경부터 티그리스 강 주변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다. 15절에 나타난 스바인들이 트랜스 요르단 북쪽에 정착한 반면, 이들은 주로 트랜스 요르단 남쪽을 전전(轉轉)하던 부랑민들이었다.

 

 세 떼를 지어 - 직역하면 '세 머리로 나누어 와서'이다. 이처럼 군사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서 어떤 대상을 공격하는 전술은 성경에 여러 번 나타난다(7:16,20;9:43-45; 삼상 11:11;13:17). 아마 여기서 갈대아인들은 3,000이나 되는 약대(3)를 한꺼번에 공격하기 곤란했을 것이므로 전략상 세 부대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향에서 공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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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물을 먹으며 -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원형 '아칼'16절에서 하나님의 불이 양과 종을 사르는 것을 묘사하는 데에도 쓰인 것으로서 '먹다', '삼키다'가 원뜻이다. 그러므로 '먹고 있었다'(KJV, RSV, wrer eating)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개역 성경은 '식물'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의역하고 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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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친 들 - 예나 지금이나 팔레스틴 지역은 대부분 황량한 사막과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욥의 거주지였던 '우스'(1) 역시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광야'(KJV,RSV, wilderness), 또는 '사막'(NIV, LB, the desert)으로 표현할 수 있다.

 

 대풍 - 단순한 태풍(windstorm)이 아니라 갑작스럽고 극렬한 회오리 바람(whirlwind) 또는 돌풍을 가리킨다. 특히 한낮의 팔레스틴 지역은 지열(地熱)이 매우 높았으므로, 이 바람은 사막의 열기를 동반한 '열풍'이라 할 만하다.

 

 - 욥 당시 대부분의 거주지는 장막(tent)이었다(4:20;31:25). 일반적으로 벽돌을 사용하여 집을 지은 시기는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인 것으로 추측된다(삼하 12:31; 9:10). 그러나 여기서 욥의 자녀의 집을 '장막'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장막은 벽돌 집에 비해 무게와 크기가 비교가 안 될 정도였던 고로 아무리 일시에 무너진다 해도 일거에 여러 사람을 죽이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욥은 당시 우스 지역에서 가장 명망(名望)있고 부유한 자였던 관계로(3) 벽돌 집을 지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소년들 - 이와 같은 용어(, 나아르)1-3차 재앙에서 죽은 ''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욥의 자녀들(2)과 그 종들을 통칭하는 것 같다. 한편 본절의 재앙으로써 욥에게 임한 1단계 시련은 끝을 맺는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1) 1단계 시련은 욥 자신과는 결정적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소와 약대, 나귀와 양을 포함한 가축의 소실이나, 종의 죽음, 심지어 그 자녀들의 급작스런 죽음조차도 욥 자신의 존재 자체와는 결정적 연관이 없는 것이었다. (2)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련은 단계적 심화 과정을 거쳐 점점 더 욥 자신에게로 접근해 간다. '가축->->자녀'의 순으로 재앙이 임하는 바, 이는 상대적으로 그 중요도가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재앙이 이행되어 감을 뜻한다. 이로 말미암아 욥의 정신적 고뇌와 압박도 점점 가중되어 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같은 원리는 차후에 전개될 욥의 시련에도 연장되어 나타난다. , 2단계 시련에서 그는 먼저 자신의 육체적 질고('악창', 2:7)를 겪고 난 다음 아내의 저주(2:9)와 친구들의 변박을 차례로 경험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욥의 시련은 '외형적 시련->육체적 시련->정신적 시련'으로 점차 심화되어 갔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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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진행된 재앙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욥이 비로소 첫 번째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20절이다. 여기서 욥의 행위는 매우 사려깊고 고결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우리가 깊이 주목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극심한 환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길로 들어서지 않고 참된 신앙인으로서 지켜야 할 기품과 원칙을 자신의 행동으로써 직접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욥의 이러한 행위는 다윗(삼하12:20)과 히스기야(왕하 19:1)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이들은 공히 자신의 범죄, 곧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한 죄(삼하 11:2-5), 그리고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의지한 죄(왕하 18:13-16)를 회개한 것이었으나 욥은 직접적인 죄악을 범하지 않은상태에서 회개의 행위를 보였다. , 욥은 자신에게 덮친 일련의 재앙을 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의식했으며, 자신이 모든 면에서 정직히 행하기는 했으나(27)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의에는 결코 이르지 못한 것임을 인식했던 것이다. 실제로 욥은 본서 전반에 걸쳐서 자신이 완전한 의를 소유했노라고 고집한 적은 결코 없으며, 그 또한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였던 것이다(9:2-4). 바로 여기에 범인(凡人)으로서는 다가갈 수 없는 욥의 신앙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겉옷을 찢고 - 여기서 '겉옷'은 당시 귀족들이 입던 외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삼상 24:5). 이것을 찢는 것은 극심한 비탄을 표시하는 관습적 행위로서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다(37:34; 7:6;삼하 1:11;3:31;13:31;9:3-5 4:1 ).

 

 머리털을 밀고 - 이것 역시 갑작스런 재난에 대한 애통을 표하는 관습적 행위였다. 그런데 우가릿 신화 등 고대 문헌을 보면 이러한 행위는 당시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널리 행해진 이방 풍속이었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성경은 이것을 엄격히 금하였으나(19:27; 14:1), 구약성경에 종종 이것이 언급된 것을 볼 때(13:33;14:8)관례상 허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당시 이방인들은 종교적 제의나 극심한 슬픔을 나타낼 때 자신의 몸을 베거나 찢는 행위도 동반했는 바(19:28; 14:1), 욥이 이러한 것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이방에 속해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어느 정도 온전히 소유했다 하겠다.

 

 경배하며 - 본서는 그 문학 형태상 긴 산문시(散文詩)로 분류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 선택에 있어서는 매우 간결하고 압축적이다. 그리고 문장 구성에 있어서도 불필요한 것은 가급적 배제하고 있다. 특히 주어나 목적어 등이 없어도 그 뜻이 충분히 전달될 때에는 과감히 생략하고 있다. 여기서도 '하나님'(목적어)이 생략되어 문학적 간결미를 보태고 있다(LB, before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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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그리로 돌아가올지라 - 본절은 곧 이어 나오는 구절과 아울러 본서의 핵심 주제를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욥은 단순히 인간의 출생과 죽음의 법칙을 설파하려는 것도 아니요, 자신에게 닥친 급작스런 고난을 도피하기 위해 죽음에의 갈망을 토로한 것도 아니다. 더욱이 세속적 허무주의를 나타낸 것은 더욱 아니다. 그 반대로 욥은 자신이 출생할 때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죽을 때 역시 아무런 소유물도 가져갈수 없다는 단순 명료한 사실을 들어,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할 수밖에 없는 유약한 존재임을 고백한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의 본래적 무소유(無所有)와 근원적 한계성을 지적함으로써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자족할 줄 아는 신앙 자세를 견지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전도서 기자는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못하리니'(5:15)라고 했으며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6:7)라고 가르쳤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 얼핏 보기에 이것은 운명에 대한 체념, 또한 혹독한 고난에 대한 장탄식의 한 표현처럼 들릴 수 있다. 그리고 세상사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미 결정났다는 이른바 '결정론'(determinism)적 사고의 소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욥의 신앙을 뚜렷이 밝혀주고 있다. (1) 하나님의 주권 인정 : 욥은 자신에게 임한 일련의 재앙 속에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질적 축복(2,3)을 주셨던 것처럼 그분은 그것을 빼앗아 갈 권능도 갖고 계신다. 욥은 자신의 물질적 축복과 혈육이 끊어짐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하거나 불만을 토로하기에 앞서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겸허히 인정했던 것이다. 이는 결국 욥이 인간의 생사 화복(生死化福)과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욥의 신앙은 토기(인간)가 토기장이(하나님)를 힐문할 수 없고 그에게 철저히 순복해야 한다는 성격의 가르침(29:6;45:9;18:6)이나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11:36)고 한 바울의 신앙에 비견된다 하겠다. (2) 하나님의 섭리 인정 : 욥은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단순한 자연 현상(16,19) 또는 우연의 결과로 보지 않았다. 또한 종들의 부주의로 인한 인재(人災)로도 보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스바 사람(15)과 갈대아 사람(17)들의 습격을 사전에 감시하지 못한 종들을 질책했을 것이다. 욥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은 모두 2차적 원인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앙의 궁극적 동인(動因)이 하나님임을 인식했다. 자신에게 축복을 주신자와 그것을 거두어 가는 자, 곧 불의의 재난을 주시는 자가 동일한 하나님임을 깨달았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욥의 신앙을 승화발전시키려는 계획(섭리)을 갖고 계심을 욥이 어느 정도 인식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기에 욥은 재난 중에서도 영적 평정을 잃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며(21b), 점강(漸强)되는 재앙 속에서(2:7-9) 자신의 탄생과(3:1) 하나님을 원망은 했으되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 곧 신앙을 상실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이...받으실지니이다 - 이로써 사단의 1차 시험은 실패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그는 욥이 그 소유물들을 상실하면 주를 대면하여 욕할 것이라고 공언(公言)했기 때문이다(11). 결국 사단은 욥의 신앙이 현세적 물질에 토대하여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욥은 재앙 가운데서도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자기 신앙의 현세적 물질에 토대하여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욥은재앙 가운데서도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자기 신앙의 신실성을 입증한 것이다. 요컨대 욥은 세속적 번영이나 종교적 유익(profit)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본분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12:15)는 사실을 직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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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하지 아니하고...원망하지 아니하니라 - 개역 성경에는 본절이 두 개의 대등한 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은 접속사 없이 한 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직역하면 '나쁜 행위로써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이다. 한편 여기서 '나쁜 행위'(wrongdoing)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티플라''사악함' 또는 '어리석음'으로도 번역 가능하나 특별히 여기서는 도덕적 측면에 아람어 '타팔라'('침을 뱉다')등의 동사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Marbin H. Pope). 그러므로 욥은 재앙 가운데서도 도덕적으로 책잡힐 만한 부끄럽고 파렴치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