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3장,한계를 뛰어넘는 믿음

호리홀리 2015. 9. 5. 11:43

그 후에 - 욥의 친구들이 당도한 후 7일이 지난 때를 가리킨다(2:13). 이 기간 동안 욥과 그의 친구들은 공히 침묵을 지켰다. 이때 아마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과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한 듯하다.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 '생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day). '시간', ''() 등을 뜻한다. 따라서 문자적인 번역은 '(자기의) '(KJV, his day)이 된다. 그러나 종종 이 단어는 개역 성격의 번역처럼 '생일'을 의미하는 데에도 쓰였다(NIV, RSV, LB, his birth). 한편, 어떤 학자는 '생일'을 확대 해석하여 욥이 현재 당하는 비참한 '운명'(30:25)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M.H.Pope). 이러한 해석 역시 본장의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가능하다. 한편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으되,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원망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생일()에 대해 탄식을 발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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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난 날이...그러하였었더라면 - 형식상 ''(day)''(the night)이 대구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내용상 이 두 단어는 모두 욥의 출생()을 가리킨다. 엄밀히 말하자면 ''은 출생일(出生日)을 가리키고 '그 밤'은 잉태된 날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 전 후반절은 그 시제가 서로 도치되어 있다. , 히브리 원문에 따르면 전반절은 '내가 태어났다'(KJV, RSV, I was born), 후반절은 '(남아를) 밴다'(RSV, aman-child is conceived)로 되어 있다. 요컨대 전자는 과거 완료, 후자는 현재 완료로 각각 나타난다. 이것에 근거하여 본문을 문법상의 오기(誤記)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종종 현재와 과거를 도치시키거나, 과거의 사실을 현재로 묘사하는 것 등은 시문학적 표현에 있어서 자주 등장하는 기법(技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서 욥은 ''()''을 동시에 언급하여 저주하였다. 그런데 4,5절에서는 그 둘을 분리하여 ''만을 저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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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캄캄하였었더라면...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 여기서 욥은 '=생명(출생)', '어두움=죽음(낙태)'으로 동일시하는 문학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같은 실례는 '그늘', '구름'(5), '어두움'(6), '어두웠었더라면'(9)등의 단어에서도 연장되어 나타난다.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빛을 생명과 탄생의 상장으로, 어두움을 죽음으로 보아왔다. 이러한 보편 관념에 근거하여 욥은 자신이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면'하는 심경을 고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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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유암과 사망의 그늘 - 문자적으로 볼 때 여기서 '유암''어두움'(KJV, NIV,RSV, darkness), '사망의 그늘''깊은 어두움'(NIV, RSV, deep shadow(darkness))을 각각 가리키며 뒤에 나오는 '구름',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등과 더불어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의 세력을 상징한다.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 - 이것에 대해서는 (1) 흑사병(32:24), (2) 대낮에 활동하는 사단(91:6, Gordis, Rashi), (3) 일식(8:9, Pope), (4) 안개 (Dhorme) 등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펠''어두움'(darkness), '음울함'(gloom)등을 뜻한다(28:3). 특히 본서에서는 주로 '지하 세계의 어두움(음울함)'을 비유할 때 주로 쓰였다(10:22). 따라서 이것은 앞에 나온 '유암과 사망의 그늘'과 마찬가지로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상징한다 하겠다(44:19;107:10,14; 9:2;2:6;13:1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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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 '해의 날 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메 쉬네'는 직역하면 '()의 날들(가운데)'이다. 이 용어는 뒤이어 나오는 '달의 수'와 더불어 세월(시간)을 의미한다. 고대인들은 해()와 달()의 시간 단위가 합쳐져서 장구한 세월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었다. 따라서 본절에서 욥은 자신의 탄생이 차라리 시간(세월)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것, 곧 죽음을 갈망하고 있다 하겠다. 한편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은 히브리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포함되지 않았었더라면'(KJV, NIV, not bejoined(included))으로 옮기고 있다(RSV는 개역 성경과 동일한 번역을 하고 있다 ;not rejoice am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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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 이것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나뉜다. (1) '그 밤이 황량하였더라면'(KJV, LB, let that night be solitary(bleak)).(2) '그 밤이 불임이었더라면'(NIV, RSV, May(let) that night be barren). '적막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갈무드''불임의'(NIV, RSV, barren), '돌처럼 단단한'(stony)등의 뜻이다. 이는 결국 여자가 임신을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1)의 번역도 무난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욥은 자신을 잉태한 날에 기쁨이 있었을 것임을 가정하고(7b), 만일 그러한 소리가 없이 그 날이 '적막'(황량)했더라면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임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을 잉태한 모친의 태를 저주한 욥의 한탄 속에서 그가 현재 당하는 육체적 질고와 정신적 방황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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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날을 저주하는 자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 -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1) 욥처럼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고난자들(sufferers), (2) 발람처럼 신탁(信託)을 받아 저주를 행하는 전문적 주술자들(22-24), (3) 단순한 일식(日食) 현상, (4) (Leviathan)등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견해는 고대 세계, 특히 욥이 생존했던 가나안 지역의 종교나 신화를 고려해 볼 때 모두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신론(polytheism), 또는 물활론(物活論, animism)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엄격한 유일신 신앙 곧 여호와 종교를 믿고 있었던 욥이(31:26-28) 본절에서 '주술사', '', '일식' 등을 만물의 주관자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증거는 41:1에서 욥은 하나님을 악어 등 동물계와 자연 현상의 주관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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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본문에서 욥은 동트는 장면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체로 시간적 추이(推移)를 따르고 있다. '새벽별'이 어두워지는 것은 동이 트기 직전에 별이 명멸(明滅)하는 것을, '광명'(NIV, daylight)은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에 내비취는 희끄무레한 광선을 가리키며, '동틈'은 해가 떠올라서 첫 빛을 발하는 것(NIV,the first rays;RSV, the eyelids of the morning)을 각각 가리킨다. 여기서도 욥은 밤을 자신의 잉태의 시간으로, 낮을 탄생의 시간으로 보고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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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0]

지금까지 전개된(3-9)욥의 저주에 대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 현재 당하는 고난(본절에서는 '환난'으로 표현됨)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생일과 잉태를 저주하는 이유였던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친구들과의 변론에서 나타나겠지만(6:1-7:21;16:1-17:16) 욥의 회의와 갈등의 최종 관심사는 하나님이었다. 한편 개역성경은 본문의 주어를 명기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원문에는 남성 단수 대명사(he)를 지칭하는 동사가 두 번 쓰였다('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자궁의 문을 열고 닫는 것', 곧 아기의 출생을 주관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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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1]

출생은 하나님의 축복이요(33:5;48:9;127:3), 그 반대로 낙태(21:22-25;12:12; 58:8)는 하나님의 징벌로 인식(58:8; 9:11,14)되었던 고대 히브리 사상에 근거해 볼 때 현재의 고난보다는 차라리 '낙태''조산사'(早産死)를 바라는 욥의 절규는 그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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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2]

본문은 아기를 출생하고 난 다음 그 산모(産母)가 취하는 첫 번째 행위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 산모는 아기를 낳음과 동시에 아기를 바로 눕히고 젖을 물리는 것이다. 11절에서 아예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지 말 것을 희구한 욥은 여기에서 태어났으되 곧바로 죽었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Anderson). 따라서 본절은 11절의 내용을 확대 심화시키고 있는 바, 점층에 대해서는 (1) 산파(LB, midwife)의 무릎, (2)아기의 아버지(50:23)의 무릎 등의 견해가 있으나 여기서는 산모, 곧 욥의 어머니의 무릎(NEB, my mother s knees)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6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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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3]

죽음의 상태에 대한 욥의 최초의 묘사가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근거해 볼때 욥은 현재의 모든 고난과 불평등이 종결되고 안식이 보장되는 곳으로 사후(死後)의 세계를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본문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욥이 사후의 세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했다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또한 욥이 실제로 죽음을 강력히 갈망했다고 보아서도 안된다. 다만 그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회의의 반작용으로서 죽음을 그리워하게 되었던 것이다. , 한계 상황에 처한 욥이 최종적으로 찾은 돌파구가 곧 자신의 삶에 대한 저주요, 죽음에의 희구(希求)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장을 위시하여 몇몇 부분들(10;26:11;38:22)을 근거로 하여 욥의 내세관(來世觀)또는 음부 사상(37:18;38:29) 등을 과도하게 체계화하거나 추론해서는 안된다. 요컨대 욥은 현재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종결되고, 새로운 차원(질서)속에서 생명이 지속되는 곳으로 사후의 세계를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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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4]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 - 여기서 '거친 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라보트'로서 '황폐한 곳', '불모지' 등의 의미이다. , 과거 권력자들이지은 화려하고 웅대한 건물들이 세월의 풍상(風霜)을 겪으면서 무너져 폐허가 된 곳을 가리킨다. 결국 본절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왕(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영화(榮華)를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건축물을 짓거나 선조들의 터 위에 새로 지었음을 암시해준다(The New Laymans Bible Commentary p. 563;58:12;61:4).

 의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아츠'는 본래 '충고하다', '조언하다'의 뜻에서 파생하여 '조언자', '모사'등을 뜻한다(대상 26:14; 4:5). 여기서는 단순한 조언자들(KJV, NIV, RSV, counselors)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궁정의 고관(LB,prime ministers)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처럼 욥이 갑자기 이들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1) 세속적 지위 고하(高下), 그리고 재물의 대소(大小)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현생(現生)의 종말을 고하고 죽을 수밖에 없으며, (2)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평등해진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뿐만 아니라 본문을 통해서 욥은 세속 재물과 지위가 죽음 앞에서는 한낱 무용지물(無用之物)에 불과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은 신앙을 가지고 삶을 충실히 살아야한다는 것을 은연 중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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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5]

 - 전통적인 주석가들은 이것을 각종 보화로 가득 찬 부자 또는 권력자의 무덤(tomb)으로 본다. 이러한 견해는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고대의 군주나 부자들은 지상의 번영을 죽음 이후에 연장시키려는 바람에서 무덤에 각종 보화를 함께 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KJV,NIV, RSV, houses)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따라서 본절도 현세에서의 부귀와 영화도 '스올'(17)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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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6]

욥은 이미 자신의 잉태 자체를 저주한바 있다(3). 따라서 여기서는 잉태 자체는 기정 사실로 하되,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을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들고 있다. , 그것은 모친이 임신 중에 낙태하는 것이다. 이처럼 욥이 집요하게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고 있는 것은 현실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상태보다는 차라리 죽음의 상태가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욥은 현실에서는 결코 평안과 안식을 찾을 수 없으나(26) 무덤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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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7]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 '악한 자'에 해당하는 '레솨임''악한', '불경건한', '사특하며'등의 뜻을 가지는 형동사 '레솨'의 복수형으로서,여기서는 사회적 측면에서 불의와 폭압을 일삼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는 '소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게즈'가 본래 불안하게 하다', '괴롭히다', '자극하다'를 뜻하는 동사 '라가즈'에서 유래되었음을 볼 때 더욱 자명해진다. 따라서 본절은 현세에서 폭압을 일삼은 악인들의 행위가 무덤(저 제상)에서는 종식될 것임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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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8]

 갇힌 자 - 이는 전쟁 포로 (공동 번역)이든지 혹은 죄수 (KJV, RSV, prisoners)이든지 간에 과중한 부역을 강요받고 있는 노예 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Hartly).왜냐하면 17절에서 악한 자 와 곤비한 자 가 대구(對句)로 쓰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갇힌 자 가 감독자 의 대칭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 이들은 과도한 노역을강요하는 감독자들(NIV, slave driver: 5:13,14)의 소리에 쫓기는 노예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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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자나 큰 자나 -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여러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1)연령면에서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을 가리킨다. (2) 재산 면에서 빈자(貧者)와 부자를 가리킨다. 1:3에서도 '큰 자'라는 용어가 '부자'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3) 신분의 측면에서 '작은 자'는 하층 계급의 사람들을, '큰 자'는 상류층 계급의 사람들을 각각 가리킨다(NEB, high and low;공동 번역, '낮은 자와 높은 자'; 17:20; 15:16; 왕하 18:24; 대상 12:14; 16:6).

 

 일반으로 있고 - 이는 현세에 상종하는 신분, 재산, 연령상의 구별(차별)이 무덤에서는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한편 14절에서부터 본절까지 전개된 욥의 독백에서 우리는 일종의 문학적 틀(form)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1) 사회적 특권 계층('세상임금', '의사'-14;'목백들'-15)(2) 사회적 소외 계층('곤비한 자'-17;'갇힌 자'-18)이 서로 대구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19절에서는 상반된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동시에 언급되어((1)'작은 자',''; (2)'큰 자', '상전')지금까지 전개된 사상을 종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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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0]

욥은 3-10절에서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였다. 그리고 11-19절에서는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서 '죽음'을 갈망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부터는 (1)왜 고난이 자신에게 임하는가(25,26), (2)왜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20-23).

 곤고한 자...마음이 번뇌한 자 - 공히 재앙 속에 허덕이는 욥을 지칭한다. 한편 '마음'은 영혼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사실적이다.

 - 이는 욥의 '생명'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욥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하기도 한다. 욥은 앞에서 '죽음'(무덤)을 어두움으로 여러 번 묘사한 바 있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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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1]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 인간은 종종 현실의 한계 상황에 부딪히거나 절망의 벽에 다다를 때 죽음 을 최후의 해결책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염세주의자나 일단의 실존 철학자들은 죽음 이야말로 현실의 부조리와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 방책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아마 욥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 그는 모세(11:15), 엘리야(왕상 19:4)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중압감에 압도되어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죽음을 의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욥이 자살을 염두에 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자살은 생명의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정면적 배반이기 때문이다. 욥 역시 자살을 생각했을리 만무하다. 실제로 그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첫 단계 시련(1:13-19) 또는 적어도 둘째 단계 시련(2:8,8)을 받았을 때 이를 결행했을 것이다. 요컨대 욥은 현실의 상황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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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2]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 욥이 죽음을 고난으로부터 해방되는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했음을 시사해 준다. '기뻐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은 감정의 흥분 상태에서 주위를 빙빙 돌며 춤을 추는 행위가 동반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말은 '즐거워하다'라는 말과 더불어 욥이 얼마나 죽음을 갈구했는가 하는 것과 또 역설적으로 그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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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 1:10에서 사단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산울로 두르심'으로 표현한 바 있다. 여기서 욥은 일단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보호(섭리)를 인정하고 들어 간다. 그러나 그 보호가 이제는 욥에게 있어서 도리어 방해와 올무(Anderson)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있는 한 욥은 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단계에 이르러서 욥은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데에까지 이름으로써 사단의 계략에(1:11;2:5)일면 동조하게 된다.

 길이 아득한 사람 - 여기서 '''생명'(고난에서의 해방)을 상징하기도 하며 그반대로 '죽음'을 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욥은 현실의 고난의 해결책으로서 '죽음'을 갈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고난에서 해방되기 위해 죽음을 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구원을 바라며 생명을 연장시키기에는 그 고난이 너무 감당하기 힘든 욥의 상황, 곧 진퇴 양난(進退兩難)에 처한 그의 모습을 잘 드러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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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4]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 전에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리프나이 로서 시간보다는 장소를 지칭하는 전치사로 많이 쓰였다. , ...의 면전(面前)에서 (tothe presence of), '...정면에서 (to the front of) 등의 뜻이다(4:19). 따라서 개역성경의 번역 처럼 이것을 굳이 시간의 전치사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대신 (NIV, insteead of), ...(RSV,as)'로 번역하는 것이 더 사실적이다. 이렇게 될 때 본문은 음식 대신 한숨이 나오고 , 또는 탄식이 밥이되며 (RSV, sighing coms as mybresd) 로 해석된다. 이는 욥의 고난의 심각성을 묘사하기 위한 표현이다.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 시청각적 직유법을 사용하여 병고(病苦)와 싸우는 욥의 상황을 잘 드러내 준다. 그런데 여기서 앓는 소리 는 대부분의 영역성경이 끙끙거리는 소리 , 신음 소리 (NIV, LB, RSV, groans)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원어상 이 말은 포효하는 사자의 우름 소리 같은 것을 가리키므로 KJV의 번역과같이 으르렁거리는 (roaring) 으로 옮기는 것이 더 좋다. 이 표현이 욥의 상채를 보다 적나라하게 묘사해 주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앤더슨(F.I.Anderson)같은 학자는 본 구절을 나의 큰 울음이 바닷물처럼 떨어지는 구나 ((my bellowingw cascadelike the sea)라고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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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5]

 두려워하는 그것. 무서워하는 그것 - 이는 (1) 물질적 축복(1:2,3)을 상실하는 것, (2) 육체적 질병(2:7,8)을 당하는 것, (3)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욥은 자신의 번영(1:2,3)중에서도 그 자손이 행여 범죄할까 근심하였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성결케 하는 의식을 일장한 시기에 행하기도 하였다(1:5). 이에 근거해 볼때 욥은 언제 닥칠지도 모를 하나님의 재앙을 예방하기 위해 항상 경성(警醒)하는 삶(13:17)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늘 두려워하던 것, 곧 하나님의 축복(소유물의 번성, 건강, 하나님과의 교제)을 상실하는 것이 지금 욥에게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재앙)은 구체적인 욥의 범죄가 없는 가운데 임했으며, 바로 이러한 점에 있어서 욥은 자신의 고난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회의(갈등)에 빠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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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6]

본절은 본장의 후반부(11-26)를 종결짓는 결론부라 할 수 있다. 11절부터는 고난에 대한 욥의 한탄을 서술하고 있는 바, 본절에서는 그의 한탄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욥의 정신적 육체적 평안을 깨뜨리는 고난이었다. 그런데 이 고난은 특별한 이유없이 주어진 것이었기에 더욱더 욥의 심경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한편 본장에 나타난 욥의 '저주'(3-10)'한탄'(11-26)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1) 인간의 한계성:욥은 그 행위와 성품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인정을 받은 의인 중의 의인이었다(1:1, 8;2:3). 뿐만 아니라 그는 자녀들의 범죄를 사전에 예방하는 조치를 정기적으로 행하는 견실한 가정(1:5)의 가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같이 위대한 신앙을 가진 그도 두 단계로 주어진 시련을 결국 인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일과 잉태를 저주하며(3-9), 무덤을 갈망하는(11-19)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선지자중의 선지자였던(34:10) 모세가 죽기를 간구한 것이나(11:10-15), 엘리야, 요나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고통의 심각성으로 인해 죽기를 간구한 것(왕상19; 4:3)과 흡사하다. 이렇듯 인간은 그 능력과 인내에 있어서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피조물인 것이다. 이 같은 인간을 엘리바스는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4:19)로 묘사하고 있다. (2) 정직한 토로:하나님은 지..의를 갖춘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다(2:7; 4:24). 이는 인간이 자신에게 닥치는 환경적 요소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즐거운 일에는 웃고, 고통에는 슬픔과 불만을 터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욥의 경우에 있어도 그는 무한정 인내 하거나, 외부의 환경적 요소에 대해 전혀 무반응을 보이는 목석(木石)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통 중에 신음과 저주의 목소리를 발했다. 생일을 저주한 것이나(3-9), 죽음을 갈망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볼때 그가 이미 신앙을 상실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비신앙적인 것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욥은 감내할 수 없는 현실의고통으로 인해서 자연스런 장탄식을 발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섭리)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데에 궁극적 의도가 있었다. 요컨대 욥은 솔직한 자기 감정을 내보임으로써 하나님의 감추어진 진리로 접근해 갔던 것이다. 이는 속으로 불신앙과 회의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경건한 행세를 하는 외식주의자들(6:5; 딤전 4:2)의 행태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게 자기 고민과 고통을 토로하며 당신의 섭리를 물은 욥에게 결국 진리를 계시하시고 구원의 축복을 주셨다(42: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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