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2장,내면적,영적시험

호리홀리 2015. 8. 31. 10:32

네가 나를 격동하여 - 이는 욥에게 내린 재앙이 하나님의 본 뜻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암시해 준다. , 그것은 사단의 부추김과 충동질에 의해 주도된 것이며 하나님은 다만 그것을 허용하신 것이다(2-6). 실제로 의인을 시험하시고 그에게 고난을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주장(참소)의 거짓됨을 폭로하고 욥의 궁극적 신앙 증진을 위해 시험을 허락하신 것뿐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8:28)는 측면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격동시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수트''자극하다'(KJV, moved), '설득하다'(LB, persuaded), '충동질하다'(NIV, incited) 등의 뜻으로서 욥에게 내린 1단계 시련이 사단의 선동에 의한 것임을 암시해 준다(13:7; 15:18; 삼상 26:19; 삼하 24:1).

까닭 없이 / 히브리어 '하남'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뜻을 가진다. (1)'부당하게'(unjustly, 22:6), (2) 개인적 유익을 바라지 않고 '무상으로'(gratuitously, 1:9), (3) '헛되이'(in vain), '쓸모없이'(futile, 1:17)등이다. 본문에서는 (3)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치게 하였어도 - 동사 '바라''(삼켜서) 없애 버리다'(KJV, destroy;NIV, ruin)의 뜻이다. 이 용어는 욥에게 주어진 1단계 시련의 강도와 그에 대한 욥의 정신적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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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 고대 사회의 격언(proverb)으로 여겨지는(N.C. Habel)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에는 대단히 어려움이 따르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이 표현을 당시 물물 교환을 하던 상인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보아 '(짐승의) 가죽으로 또 다른 가죽을 바꾼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공동번역). 즉 고대 사회, 특히 팔레시 지방에서는 짐승의 가죽이 주요한 교역 물품으로 취급되었던바, 이를 시장에 내어 놓고 다른 짐승의 가죽으로 교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첫째, 어떤 물품을 교환할 때 동일 품목으로 교환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듯하며 둘째, '바꾸오니'로 번역된 동사 '베아드''...대신에'. '...에 의해서'의 뜻으로서 단순히 물품 대() 물품의 매매를 지칭한다기 보다는 대개 보상적매매, 즉 보다 중요한 것을 획득하기 위해 그보다 못한 것을 그 대가로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유 때문에 난점에 처한다. (2) 본문을 후반절과 연관시켜 해석하는 방법이다. 즉 인간이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는 것처럼, 외형적 가죽(예를 들면 재산, 자식등)을 버리고 내면적 가죽(생명)을 보전한다는 것이다(Hartley). 이렇게 될 때 본절의 앞에 나오는 '가죽'은 욥이 가진 소유물을 상징하고 그 뒤에 나오는 '가죽'은 생명을 상징한다 하겠다. 이는 인간의 몸이 외피(外皮, 육체)와 내피(內皮, 생명, )로 구성되어 있다는 고대인들의 관념과도 잘 어울린다. 여하튼 사단은 이 표현을 통해서 욥이 지금까지 누려온 물질적 축복은 그의 겉가죽이었으며, 그것은 1단계 재앙을 통해 파괴되었으나 속가죽은 아직 건재하며 따라서 그의 신앙을 상실케 하기 위해서는 속 가죽, 곧 욥 자신의 육체에 직접적인 재앙을 내려야 한다고 은근히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 말 속에는 욥이 자신의 생명에 위해(危害)가 되는 재앙을 아직 겪지 않은 까닭에 신앙을 보전하고 있다는 사단의 참소가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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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사단의 2단계 시험이 전개된다. 그런데 1단계 시험이 외형적 물질적 측면에 집중된 것이라면 2단계 시험은 내면적 영적 측면에 주안점이 주어져 있다. , 첫 단계시험이 가축(,약대,,나귀, 1:15-17), 자녀(1:19), (1:15-17), 재물(, 1:19)등에 내린 반면, 둘째 단계 시험은 욥 자신의 육체(7,8), 그로인한 가정적 파탄(9)과 욥의 정신적 갈등에 맞추어져 감을 주목해야 한다.

 뼈와 살을 치소서 - 사단은 욥이 육체적 질고에 빠지면 결국 하나님을 저주하는 반신앙의 상태에 빠질 것으로 예상했다. , 어떤 사람이 그 생명에 위협을 받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그것을 보전하기 위해 몸부림치듯(4) 육체적 시련을 통해 생명의 위협을 욥이 받는다면 그역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며 종국에는 신앙마저 내팽개치고 목숨의 부지를 위해 전전긍긍(戰戰兢兢)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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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여기서 다시 한번 사단은 욥을 시험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는다. , 그는 욥의 생명을 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욥을 시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 온몸 전체를 나타내는 히브리 문학의 독특한 표현이다.

 악창 - 전통적인 해석법에 따르면 이 병은 문둥병(13) 또는 상피병(象皮病,elephantiasis)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둥병자들은 대부분 격리조처를 당했지만 본서 전체를 살펴볼 때 욥이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는 말이 없으므로 문둥병은 아닌 듯하다. 추측컨대 이는 부스럼(Bagdad boil)또는 온몸 전체에 진물과 고름이나는 궤양성 피부병인 듯하다. 이 병에 대한 증상은 본서에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난다(본장 주제 강해 '악창' 참조).

 

[2:8]

  (1) 마을의 쓰레기 더미(the village ruvbbish heap, The NewLayman s Bible Commebtary), (2) 성읍 밖의 쓰레기 더미(the rubbish-dump outsidethe city), (3) 똥 더미(, 코프리아스;LXX), (4) (KJV, NIV, RSV,ashes)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그런데 ''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히브리어는 '에페르''데쉰'2종이 있는데 전자는 대부분 회개 내지는 애통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와 연관되어 사용되었다(삼하 13:19; 4:1, 3; 102:9). 그리고 후자는 희생 재물등 어떤 대상이 타고 남은 후에 생기는 문자적인 재를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1:16;6:11;왕상 13:3;31:40). 따라서 우리는 본문( 에페르)을 문자적인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추측컨대 이것은 성읍 밖, 또는 주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쓰레기 더미였던 것같다. 한편, 욥이 이러한 곳에 앉은 이유는 두가지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사회로부터 격리되었기 때문일 수있다. 첫째, 사회로부터 격리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즉 문둥병과 마찬가지로 피부병은 고대 사회에서 부정한 병으로 취급받았으며, 더욱이 이것은 이스라엘 공중 위생 규례상 불결한 병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욥이 성읍 밖으로 추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욥이 그의 아내와 대화한 것(9),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대화한 것(2:1103장 등) 등의 사실 때문에 정설(定說)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만약 욥의 병이 부정한 것으로 판명되어 성읍 밖에 버리워졌다면 아내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그와 함께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고대의 문헌과 이스라엘 정결 규례(13, 14)는 부정한 병에 걸린 자와의 접촉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둘째, 병에 걸려 만신 창이가 된 자신의 현상태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표시로 쓰레기 더미에 앉았을 수 있다. 즉 그는 이미 재앙을 받아 쓰레기 같은 육체를 가졌으며 사회로부터도 냉대와 거절을 받는 신세가 되었는 바, 이제 쓰레기 더미 위에 앉음으로써 자신의 비참한 사황을 쓰레기 더미와 일체화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비참한 현상황에 대한 애통함을 암묵적으로 나타내려 했을 것이다.

 

[2:9]

주제1: [욥의 두 번째 시련과 세 친구]

주제2: [아내를 꾸짖는 욥]

 욥의 아내의 권고는 일견(一見) 타당한 것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소유와 혈육을 상실하였고, 사랑하는 남편마저도 심한 악창에 걸려 생사(生死)의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깊은 절망과 좌절의 벽에 부딪혀 이와 같은 탄식조의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욥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신앙을 단순히 현세적 축복과 연관시켜 생각했으며, 하나님을 불공평하고 불의한 분으로 생각했다. '당신이 지금껏 신앙을 고수해 왔으나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결과 당신은 도리어 현재와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지 않는가? 그러한 하나님이라면 바로 지금이라도 배반하라'는 뜻이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녀의 신앙은 종교를통해서 유익()을 얻고자 하는 저급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녀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음으로써 신성 모독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믿음을 상실하는 단계로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그녀의 말은 사단의 책략에 결정적으로 동조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단의 궁극적 목적은 욥으로 하여금 신앙을 상실케 하여 하나님을 욕하게 하는 것(5;1:11)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녀는 욥에 대한 단순한 비방자(slanderer)의 차원을 넘어 '악마의 보조자'(diaboliadjutrix ; Augustine), 또는 '사단의 도구'(organum satanae ; Calvin)였던 셈이다. 이러한 행위는 생명과 환난의 위협에 직면해서까지도 놀라운 신앙의 용기를 보여주었던 라합(2:1-7), 에스더(4:16-18)의 행적과 뚜렷이 대조된다. 이렇듯 이제 욥은 육체적 질고 이외에 생의 동반자로부터 버림받는 이중적 고통에 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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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0]

 그대의 말이...말 같도다 - 본문에서 욥이 단순히 그 아내의 무분별함이나 지적 우매성을 질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 '네발라'는 주로 도덕적 종교적 요구들을 무시하는 불경스러움, 또는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무분별함을 뜻하기 때문이다(삼하 13:12; 32:6 ). 따라서 욥은 아내의 말이 윤리 도덕적 측면에서 죄가 될 뿐 아니라 종교적 측면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신성 모독적 언사임을 지적하고 있다(53:1).

 우리가...받지 아니하겠느뇨 - 본서의 핵심 주제이자 욥의 신앙의 진수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 같은 욥의 신앙은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1:21)라는 말 속에 이미 명백히 표현되었었다. 만물의 조성자이며 생사 화복의 주관자이신 자는 오직 하나님이다. 그분은 당신의 깊으신 뜻(섭리)에 따라 복을 주시기도 하시며 그것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신다(1:2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의인에게 재앙을 주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에 대해 하등 항변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축복과 재앙의 수여와 철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리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토기장이의 비유'(29:16; 18:4). '목자와 양의 비유'(3:12) 등을 통하여 성경 전반에 나타난다. 욥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본절에서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미 받은 재앙에 대한 체념이 아니요,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로운 섭리를 대망하는 적극적 신앙의 발로였다. 요컨대 욥은 자신이 당하는 재앙이 단순히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며,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영적 유익을 위해 시련과 연단을 주신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5:17; 8:5; 삼하 7:14; 94:12;3:11, 12;고전 11:32;12:5-11 ).

 

 이 모든 일에...아니하니라 - 이로써 사단의 2단계 시험도 무위로 돌아가고 욥의 신앙의 진정성(眞正性)이 재확인되었다그런데 혹자는 본문에 나타난 '입술'이라는 용어를 예로 들어 욥이 말로는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으나 마음으로는 이미 범죄하였다고 주장한다(Talmud, Baba Bathra, 17b).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부정된다. (1) 사람의 생각은 말로나 행동으로 표현되기 일반이다. 더욱이 생명의 위협에 처하는 극한 상황에 처하면 마음의 심층적 생각까지도 은연중 말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계 상황에 직면한 욥이 말로써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간접적인 반증이 된다. (2)욥은 마음으로 범죄하는 것 못지않게 두려워하였다. 이는 욥이 그의 자녀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까 두려워하여 성결례를 행했다는 데(1:5)에서 명백히 입증된다. 이렇게 볼 때 욥은 외적 범죄 행위와 동일하게 내적 범죄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것임을 인식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욥이 마음으로라도 하나님을 저주했더라면 사단의 계획은 성공으로 끝났을 것이며두 차례나 욥을 의인으로 인정한 하나님의 칭찬(3; 1:8) 역시 무위로 돌아갔을 것이다. 한편 욥은 친구들과의 변론 과정에서 자기 의(self-righteosness ; 27:6)를 내세우는 등의 우를 범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견지함으로써 신약 기자에 의해 인내하는 자의 전형으로 기술 되었다(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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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1]

두 단계에 걸친 사단의 시험과 그에 대한 욥의 반응으로서 본서 도입부는 종결되고 본문에서부터 본론부가 시작된다. 그 가운데서도 11-13절까지는 그 초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욥의 세 친구가 등장하여 향후 전개될 변론을 예시해 준다.

 친구 세 사람 - 이들에 대한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본서를 비롯하여 성경 다른 자료를 근거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들 모두는 욥보다 연장자였다(15:10). 둘째, 이들은 욥을 조문하러 오기 이전부터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욥을 방문하기 전에 서로 상약했다(11b)는 말에서 분명히 암시된다. 셋째, 이들 모두는 당시 상당한 수준의 학식과 재물을 겸비한 자로 추정된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정확한 논리 전개와 풍부한 지식을 동원하여 욥과 변론을 펼치는 바(4:1;5:27) 이는 그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학식과 지혜를 소유했음을 보여준다.또한 욥을 조문하러 올 정도의 신분이라면 각기 그 지방의 유지이거나 풍부한 재물을 소유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는 대부분 같은 계층의 사람끼리 교제하였기 때문이다. , 당시 막대한 재물과 명예를 지닌 자(1:3)였던 욥과 교제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것과 비견될 만한 수준의 재물과 명예를 가졌을 것이다. 넷째, 이들 모두는 히브리 신앙을 가진 자였다. , 그들은 비록 욥의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1:1, 8; 2:3) 하나님의 공의, 성품등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신앙 지식을 소유했다. 다만 계시사의 점진적인 발전 과정에 비추어 볼때 그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성(5:12),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2:4;3:19-31)등을 인식하는 단계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데만 - 이 지역은 종종 성경에서 에돔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이기도 했으나(49:7), 역서는 모압 동쪽의 한 성읍을 가리키는 것같다(25:13; 1:12, 13). 그런데 이 지역은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해서 볼 때 사해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수아 - 본래 '수아'(Sua)는 아브라함과 그두라 사이에 출생한 아들을 가리킨다(25:2; 대상 1:32).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 말(人名)이 지명(地名)으로 변천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추측컨대 수아의 후손들이 사는 중부 유프라테스 지역을 '수아'라는 지명으로 부른 것 같다.

 

 [2:12]

 그 욥인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 이는 문자 그대로 욥의 형체가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변형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욥의 세 친구들은 '먼 곳에서'(12a)도 욥을 알아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욥의 질병과 그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과장 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물론 전신에 퍼진 피부병으로 인해욥의 형체가 많이 변형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타당하다(7,8). 53장에 묘사된 '수난 당하는 종'의 그것과 흡사하다 하겠다(52:14).

 울며...뿌리고 - 본문에 나타난 일련의 행동은 1:20에 나타난 욥의 행위와 비슷한 것으로서 예루살렘의 파괴를 목도한 이스라엘 장로들이 보인 바 있다(2:10). 한편 당대의 석학(碩學)이요, 재력가(財力家)로 알려진 이들이(11절 주석 참조) 이러한 행위를 취했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당시의 통례적인 관습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참된 우정의 발로임에는 틀림없다. , 그들은 주변의 이목이나 자신의 체면에 연연해하지 않고 고통당하는 욥에 대한 진실한 연민의 정과 비탄의 감정을 표했던 것이다.이렇듯 욥의 친구들은 순수한 동기에서 욥을 방문하였으며, 욥을 위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한다. 물론 앞으로 전개될 변론 가운데에서 친구들의 욥에 대한 비난과 정죄의 말이 종종 나오기는 하나 이것 역시 우리는 그들의 신앙 수준의 한계에서 나온것으로 보아야지 악의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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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3]

 칠일, 칠야 - 이 기간은 죽은 자를 위한 애곡 기간과 동일하다(50:10; 삼상31:13; 집회서 22:12). 따라서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최상의 애통의 표시를 했다고 볼수 있다. 한편 구약에서 위대한 인물의 죽음을 슬퍼하는 공식적 애도 기간은 보통 30일 내지 70일이었다(50:3;20:29; 34:8).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 이를 어떤 학자는 탈무드의 전승에 비추어서 해석하려고 한다. , 죽은 자의 집을 방문한 조문객들은 상주가 먼저 말을 열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Talmud, Moed, Qatan 28b). 그러나 굳이 이러한 관례에 비추어 본문을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말을 잃었으며,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기 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도리어 효과적이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고통당하는 자와 같이 말없이 있어줌으로써 그들은 나름대로 깊은 우정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 --> 예수께 시험한 마귀의 시험 순서대로 육신적시험 다음에 오는 영적시험을 이겨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