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1장20~22,고난에 대한 반응

호리홀리 2015. 8. 26. 11:42

욥의 이러한 행위는 다윗(삼하12:20)과 히스기야(왕하 19:1)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이들은 공히 자신의 범죄, 곧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한 죄(삼하 11:2-5), 그리고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의지한 죄(왕하 18:13-16)를 회개한 것이었으나 욥은 직접적인 죄악을 범하지 않은상태에서 회개의 행위를 보였다. , 욥은 자신에게 덮친 일련의 재앙을 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의식했으며, 자신이 모든 면에서 정직히 행하기는 했으나(27)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의에는 결코 이르지 못한 것임을 인식했던 것이다. 실제로 욥은 본서 전반에 걸쳐서 자신이 완전한 의를 소유했노라고 고집한 적은 결코 없으며, 그 또한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였던 것이다(9:2-4). 바로 여기에 범인(凡人)으로서는 다가갈 수 없는 욥의 신앙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겉옷을 찢고 - 여기서 '겉옷'은 당시 귀족들이 입던 외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삼상 24:5). 이것을 찢는 것은 극심한 비탄을 표시하는 관습적 행위로서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다(37:34; 7:6;삼하 1:11;3:31;13:31;9:3-5 4:1 ).

 

 머리털을 밀고 - 이것 역시 갑작스런 재난에 대한 애통을 표하는 관습적 행위였다. 그런데 우가릿 신화 등 고대 문헌을 보면 이러한 행위는 당시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널리 행해진 이방 풍속이었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성경은 이것을 엄격히 금하였으나(19:27; 14:1), 구약성경에 종종 이것이 언급된 것을 볼 때(13:33;14:8)관례상 허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당시 이방인들은 종교적 제의나 극심한 슬픔을 나타낼 때 자신의 몸을 베거나 찢는 행위도 동반했는 바(19:28; 14:1), 욥이 이러한 것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이방에 속해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어느 정도 온전히 소유했다 하겠다.

 

 경배하며 - 본서는 그 문학 형태상 긴 산문시(散文詩)로 분류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 선택에 있어서는 매우 간결하고 압축적이다. 그리고 문장 구성에 있어서도 불필요한 것은 가급적 배제하고 있다. 특히 주어나 목적어 등이 없어도 그 뜻이 충분히 전달될 때에는 과감히 생략하고 있다. 여기서도 '하나님'(목적어)이 생략되어 문학적 간결미를 보태고 있다(LB, before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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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그리로 돌아가올지라 - 본절은 곧 이어 나오는 구절과 아울러 본서의 핵심 주제를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욥은 단순히 인간의 출생과 죽음의 법칙을 설파하려는 것도 아니요, 자신에게 닥친 급작스런 고난을 도피하기 위해 죽음에의 갈망을 토로한 것도 아니다. 더욱이 세속적 허무주의를 나타낸 것은 더욱 아니다. 그 반대로 욥은 자신이 출생할 때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죽을 때 역시 아무런 소유물도 가져갈수 없다는 단순 명료한 사실을 들어,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할 수밖에 없는 유약한 존재임을 고백한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의 본래적 무소유(無所有)와 근원적 한계성을 지적함으로써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자족할 줄 아는 신앙 자세를 견지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전도서 기자는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못하리니'(5:15)라고 했으며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6:7)라고 가르쳤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 얼핏 보기에 이것은 운명에 대한 체념, 또한 혹독한 고난에 대한 장탄식의 한 표현처럼 들릴 수 있다. 그리고 세상사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미 결정났다는 이른바 '결정론'(determinism)적 사고의 소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욥의 신앙을 뚜렷이 밝혀주고 있다. (1) 하나님의 주권 인정 : 욥은 자신에게 임한 일련의 재앙 속에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질적 축복(2,3)을 주셨던 것처럼 그분은 그것을 빼앗아 갈 권능도 갖고 계신다. 욥은 자신의 물질적 축복과 혈육이 끊어짐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하거나 불만을 토로하기에 앞서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겸허히 인정했던 것이다. 이는 결국 욥이 인간의 생사 화복(生死化福)과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욥의 신앙은 토기(인간)가 토기장이(하나님)를 힐문할 수 없고 그에게 철저히 순복해야 한다는 성격의 가르침(29:6;45:9;18:6)이나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11:36)고 한 바울의 신앙에 비견된다 하겠다. (2) 하나님의 섭리 인정 : 욥은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단순한 자연 현상(16,19) 또는 우연의 결과로 보지 않았다. 또한 종들의 부주의로 인한 인재(人災)로도 보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스바 사람(15)과 갈대아 사람(17)들의 습격을 사전에 감시하지 못한 종들을 질책했을 것이다. 욥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은 모두 2차적 원인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앙의 궁극적 동인(動因)이 하나님임을 인식했다. 자신에게 축복을 주신자와 그것을 거두어 가는 자, 곧 불의의 재난을 주시는 자가 동일한 하나님임을 깨달았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욥의 신앙을 승화발전시키려는 계획(섭리)을 갖고 계심을 욥이 어느 정도 인식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기에 욥은 재난 중에서도 영적 평정을 잃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며(21b), 점강(漸强)되는 재앙 속에서(2:7-9) 자신의 탄생과(3:1) 하나님을 원망은 했으되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 곧 신앙을 상실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이...받으실지니이다 - 이로써 사단의 1차 시험은 실패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그는 욥이 그 소유물들을 상실하면 주를 대면하여 욕할 것이라고 공언(公言)했기 때문이다(11). 결국 사단은 욥의 신앙이 현세적 물질에 토대하여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욥은 재앙 가운데서도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자기 신앙의 현세적 물질에 토대하여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욥은재앙 가운데서도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자기 신앙의 신실성을 입증한 것이다. 요컨대 욥은 세속적 번영이나 종교적 유익(profit)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본분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12:15)는 사실을 직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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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하지 아니하고...원망하지 아니하니라 - 개역 성경에는 본절이 두 개의 대등한 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은 접속사 없이 한 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직역하면 '나쁜 행위로써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이다. 한편 여기서 '나쁜 행위'(wrongdoing)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티플라''사악함' 또는 '어리석음'으로도 번역 가능하나 특별히 여기서는 도덕적 측면에 아람어 '타팔라'('침을 뱉다')등의 동사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Marbin H. Pope).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받으며 원망,불평이 아닌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결국 사탄의 공격에 승리 할 수 있었다.고난을 이기는 것은 순종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