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욥기(구속사)

욥기5장,복된 징계

호리홀리 2016. 2. 29. 10:27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1:6;2:1), '천사'(angel)를 가리킨다(15:15;89:5,7 ;4:13,17,23:8:13;14:5). 그러나 KJV'성인들'(thesaints), LB'그들의 신들'(their gods)로 각각 옮기고 있다. 여기서 LB의 번역은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번역을 따를 경우 욥 또는 엘리바스가 이방의 다신교적 관념(the conception of poly theism)을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 이 경우 욥이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줄 대상으로 이방 신을 찾고 있다고 은연 중 엘리바스가 힐책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한 히브리적 유일신론을 소지한 욥이 실제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엘리바스 또한 욥과 동일한 믿음을 소유했던 고로 욥에게 그 같은 일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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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에서 엘리바스는 구체적으로 욥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하 전개되는(3-7) 내용에 근거해 볼 때 본문은 욥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 전체는 욥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해 분노와 시기를 터뜨렸으며, 이로 말미암아 결국 여느 악인과 마찬가지로 멸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다. 지금껏 엘리바스는 욥을 직접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으나 이 시점에 이르러 욥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욥이 고난 중에 다소 불신앙적인 것처럼 보이는 저주와 한탄(3)을 토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믿음을 아예 상시하지는 아니했으므로 그를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로 매도한 엘리바스의 처사는 분명 지나친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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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에서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을 언급함으로써 2절의 논증을 확인시키고 있다. 이와 비슷한 실례는 4:8에도 나타나는 바,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엘리바스는 자신의 지금까지의 논증이 직접적 체험에 토대한 무오(無誤)한 진리임을 은연중 내비치고 있다.

 

 뿌리 박는 것 - 앞에 나오는 '미련한 자''나무'(tree)로 보면 본절이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 나무가 튼튼히 뿌리를 박고 무성해 가는 것처럼 종종 악인이 현세에서 번성한다는 뜻이다(LB, Those who turn from God may be successful). 이처럼 사람을 특정 사물, 특히 나무에 비유하는 것은 히브리시가 문학에서 흔히 발견된다(8:16-22;14:7-9;15:32; 18:16;19:10; 24:20; 29:19; 1:3;52:8;92:12, 13;12:3, 12).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그러나 내가 당장에 저주하였다'(KJV, but suddenly I cursed his habitation)이다. 이 번역을 따를 경우 본절전체는 (1) '내가 미련한 자(악인)의 번성을 보아왔다. 그러나 내가 그 집을 저주하였다(그래서 그 집이 멸망당하였다)'. (2) '내가 미련한 자의 번성을 보아왔다. 그러나내가 그집을 저주하였다(그래서 그 집이 멸망당하였다)'. (2)'내가 미련한 자의 번성을 보아왔다(그러나 그 집이 멸망하였다). 그래서 내가 당장 그 멸망한 집을 보고 저주를 하였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 전자는 악인이 멸망을 미리 예견하고 엘리바스가 저주한 것이며, 후자는 악인이 멸망하자 그것이 하나님의 저주인 줄 알고 엘리바스도 저주했다는 것이다. 로린슨(G. Rawlinson), 에발트(Ewald), 쉴로트만(Schlottmann)등은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델리취(Delitzsch), 랑게(Lange), 드라이버(Driver), 그레이(Gray) 등은 후자의 견해를 취한다. 양쪽 다 일리가 있으나 전후 문맥상 후자 쪽이 보다 자연스럽다 하겠다(NIV, but suddenly his house was cursed). 한편 본절에서 시작하여 7절에서 끝나는 미련한 자의 받을 재앙과 17-2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가 받을 복이 서로 대조되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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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련한 자(악인)에 대한 저주를 선포한 것이라면 본절에서부터 7절까지는 그가 받을 재난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본절은 가족에게 임할 재앙을 첫 번째로 묘사하고 있다.

 

 그 자식들은 평안한 데서 멀리 떠나고 - 우리는 이를 죄가 그 자식에게까지 미친다고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엘리바스는 이러한 의도를 가졌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후에 욥이 본인의 죄는 본인 스스로에게 갚아져야 한다고 반박하기 때문이다(21:19,29). 성경은 '아비의 죄가 삼사대까지' 간다(20:5; 5:9 )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표현은 죄에 대한 강한 경계심과 경종을 주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처럼 아비의 범죄가 그 자손에게 악 영향을 미쳐 그 역시 아비와 동일한 범죄를 자행하여 심판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실제로 성경은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14:20;13)고 말함으로써 죄와 의에 대한 보응이 각 개인 주체에 한정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성문에서 눌리나 - '성문''법정'(court)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고대 히브리인들이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공적(公的) 장소의 하나인 성문에서 재판을 한 실례에 비추어 볼 때(25:7; 127:5; 29:21; 5:10) 매우 설득력이 있다. 만일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본절은 미련한 자(3)의 자녀가 재판에서 불의한 판결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욥 당시는 족장 시대였던 고로 성문에서 재판이 실시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실제 족장 시대를 다루고 있는 창세기에는 재판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성문'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KJV, RSV, gate). 따라서 본문은 악인의 자녀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성문(城門) 또는 대로(大路)에서 부당한 처사(공동 번역, '몰매를 맞아도')를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럴 때 '구하는 자가 없다'는 말은 악인은 그 쌓은 죄로 인해 위경(危境)시에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편 앤더슨(F.I.Anderson), 본절의 '성문'이 이례적으로 '광풍', '대풍'(1:19)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문'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광풍'과 철자가 똑같기 때문이다(두 단어 모두 '사아르'). 만일 이 주장을 취하게 될 경우에 본절의 '성문'1:19에 나오는 '대풍'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고 본절은 대풍에 의해 그 자녀를 잃은(1:19) 욥의 재앙을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3절에서 욥을 은근히 '미련한 자', '어리석은 자'로 간주하려 한 엘리바스의 의도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해석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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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에서 악인의 가족이 받는 재앙을 묘사한 엘리바스가 5절에서는 그가 받을 재산상의 손해를 언급하고 있다. , 악인은 그 재물을 불의한 방법으로 획득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또한 그것을 방비하기 위해 아무리 공교(工巧)한 계책을 마련한다 할지라도 잃을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빼앗으며 - 족장 시대의 근동인들은 추수한 뒤 곡식단을 가시나무로 가려 보관하거나그 낱알을 왕겨로 덮어 보관하였었다. 이는 짐승이 물고 가거나 먹는 것을 방비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종종 출몰하여 식량을 약탈하는 침입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따라서 본절은 악인이 그 곡식(재산)을 보전하기 위해 자구책을 강구하나 결국 그것도 별로 소용이 없을 것임을 나타내 준다.

 

 올무 - 매우 난해한 단어로서 대략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1) 침탈자:이러한 번역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는 KJV, LB, ICC, 랑게 주석, 풀핏 주석이 이 번역을 따르고 있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뒤에 나오는 '입을 벌리느니라''마셔버리다'(swallowethup)로 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본절 상반부에 나오는 '주린 자'(the thirsty)='먹다'(eat up)와 본절의 '목마른 자'(the hungry)='마시다'(swalloweth up)가 자연스런 대구가 되기 때문이다. (3)'올무' 또는 올무를 만드는 사람:이러한 번역은 시리아 벌게이트(Aqulla Symmacus Syr Ug), 카알 델리취 주석(Keil & Delitzsch Commentary)등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견해는 모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올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밈'이 단순히 '올가미'(18:9)를 의미할 뿐 아니라 상징적으로 '도둑', '약탈자', '음모자'도 뜻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올무'는 악인의 재산을 빼앗는 침입자(약탈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결론 짓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한편 본문의 사건은 욥이 불의의 약탈자, 즉 스바 사람(1:15)과 갈대아인(1:17)에 의해 그 재산과 자녀를 잃은 사건을 연상시킨다. 아마 엘리바스는 이러한 암시적인 사건을 예로 제시하며 욥의 은밀한 죄를 추궁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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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7

여기에서 주장하는 엘리바스의 논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난의 원인(thecause of sufferings): 엘리바스는 인간의 고난이 외부적인 원인이 아닌 인간 내부의 원인에 의해 발생되는 것으로 보았다. , 그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나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문제(죄성, 부패성)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철저히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창 3:17, 19에서 분명히 보듯 인간은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적대적인 자연 환경과 부단히 투쟁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2)고난의 범위(the extension of sufferings) :엘리바스는 7절 상반부에서 '인생은 곧 고난이다'라는 논리를 통해 고난이 모든 인간들에게 임함을 역설하고 있다. , 인간 모두는 이 고난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7절 하반절의 표현 역시 인생의 고난이 변개될 수 없는 자명한 이치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엘리바스의 논리는 다분히 일반론적 측면에 기울어진 감이 농후하다. , 4:17-21에서 인간의 보편적 유한성과 부패성을 주장한 그는 본문에서도 인생의 고난을 보편적 원리에 의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이론은 원칙론적 측면에서 지극히 타당하다. 따라서 욥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이것을 부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도식적이고 원론적인 차원에서만 현실 상황(욥의 고난도 포함)을 파악하여 그것을 단순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 그는 욥(의인, 1:1;2:3)이라는 특수한 한 개인을 인생 일반(죄인)의 범주에 포함기켜 그의 고난을 정당화시키고 따라서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난에 아무런 불평없이 무조건 순응하기만을 요구했던 것이다.

 

 불티 -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르쉬프의 아들들'(sons of Resheph)이다. 고대 가나안 신화에 의하면 르쉬프는 역병과 파괴의 신이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는 이것(또는 '르쉬프의 아들들')'', '역병'(32:24; 3:5), '번갯불'(78:48)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도 '르쉬프의 아들들'로 직역하는 것보다는 '불티'(LB,flames)로 옮기는 것이 좋다(Hahn, Barnes, Delitzsch, Dillmann), 본절은 불이 탈 때 그 재가 항상 위로 치솟는 것처럼 인생의 고난이 피할 수 없는 자명한 것임을 나타내 주는 비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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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앞에 강한 반대 접속사인 '그러나'를 첨가시켜 '그러나 만일 내가 당신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NIV, But if it were I...)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그러나'1,2절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욥에 대한 강한 질책의 태도가 어느 정도 완화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 여기에서 에리바스는 지금껏 전개된 교조적(敎條的;dogmatic)태도에서 다소 물러나서 욥에게 권면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17-27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한편 본절의 권면 속에는 욥에 대한 은근한 질책이 내포되어 있다. , '자네는 쓸모없는 불평을 터뜨림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네. 만일 나 같으면 그러한 일을 집어 치우고 하나님께 기도하겠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여기에서 보듯 엘리바스는 욥의 한탄과 변론(3)을 무익한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도에 지나친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성 경: [5:9]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주제2: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에 대한 권면]이와 비슷한 표현으로는 9:10;37:5;145:3등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엘리바스가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소위 '신적 섭리의 불가해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굳이 볼 필요는 없다(40:5;72:18;77:14;136:4;11:33). 다만 그는 10-16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공의)를 문학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한편 본문의 동사('행하시며', '행하시나니')가 현재형으로 표현된 것(KJV, doeth; NIV,performs)은 엘리바스가 목도한 하나님의 섭리가(10-16) 시종여일(始終如一)함을 암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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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건조한 사막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지방에 있어서 비는 식수(食水)(24:11; 대하 26:10), 농부의 식물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으로(2:5; 26:4),그리고 초장의 풀을 자라게 하여 육축을 기르게 하는 것(삼하 23:4)으로서 매우 긴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기후는 우기(雨期)와 건기(乾期)가 뚜렷이 구분되며, 건기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으며,우기라고 해서 다량의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니었다(27:28; 33:28). 따라서 팔레스틴인들에게 있어서 비는 간절한 희구의 대상이었다. 성경이 비를 하나님의 축복(28:12; 68:9; 34:26), 또는 은총(2:23;5:45)으로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여기서도 엘리바스는 ''('')를 하나님의 축복(섭리)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메마른 땅과 밭이 비를 받아 소성하듯. 인간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살아간다는뜻이다(104:11;1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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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퍼하는 자 - '슬퍼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다르'는 단순히 슬퍼하거나 애통해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말은 '재투성이가 되다', '(상심으로 얼굴 표정이) 어두운 색깔이 되다','(삼베 옷, 또는 더러운 옷을 입고) 극심히 애도하다'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앉아 극심한 슬픔을 나타내는 자를 가리킨다(삼하 13: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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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궤휼한 자 - 정직한 자를 억압함으로써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악인을 가리킨다(32:7;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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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말과 비슷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 악인은 자신의 지혜로 어떤 일을 공교(工巧)히 도모하나 결국그 동기의 사악함으로 인해 패망하게 된다는 교훈이다(57:6,7; 26:27;28:10).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9:16), '(악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7:15,16), '지혜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신다'(고전 3: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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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은 12, 13절에 대한 결론부라 할 수 있다. , 12,13절이 악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술한 것이라면 본절은 그 심판의 결과(형국)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엘리바스는 빛의 대조(:밝음, :어두움)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악인이 당하게 될 당혹감과 좌절감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12:24,25; 28:29; 19:13-25;59:10). 이렇듯 악인은 늘 불안한 가운데 있을 뿐 아니라(28:1; 48:22;57:20) 종국에는 주의 진노로 그 존재의 근거 마저 상실되고 만다(11:8; 37:27;40:23;40:23;41:11;44:25;45:1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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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비한 자 - 영역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된다. (1) '고아'(LB,RSV,the fatherless), (2) '가난한 자'(KJV,the poor; NIV,the needy), (3) '곤궁한 자'(NEB,the destitute)등이다. 그러나 맛소라 사본(MT)에는 이말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들의 입의 칼에서 - 이것 역시 매우 난해한 구절로서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1)'칼에서 곧 저들의 입에서부터'(KJV,from the sword, from their mouth). , ''''을 동격으로 보는 것이다. (2) '그들의 입 안에 있는 칼에서부터'(NIV, from thesword in their mouth)., 본절의 후반구()를 전반구()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다(Zockler). 어떤 견해를 취하든 간에 본절 상반절은 하나님께서 악인의 칼, 곧 그들로부터 악한 훼방(55:21;57:4; 59:7;64:3)과 핍박을 당하는 연약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뜻만은 확실하다(삼상 2:6-8;고전 1:27-29).

 

 강한 자의 손 - '그들의 입의 칼'과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 보면 '압제자의 손'(LB,the grasp of these oppressors)또는 12절의 '궤휼한 자의 계교'13절의 '간교한 자의 궤휼','사특한 자의 계교'로 해석된다. 공동 번역도 이러한 해석을 취한다. 그러나 '강한'(powerful)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자크'는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주로 쓰였다는 사실에 근거해 볼 때(32:11;32:21). 본문의 '강한 자''사악한 자' 또는 '압제자'로 해석하기 보다는 하나님으로 해석함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Anderson). 그렇다면 본절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때 약한 자(의인)를 그 심판에서 제외시켜 구원해 주신다는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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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자 - 히브리어 '''늘어지다', '헐겁게 되다', '허약하게 되다', '흔들리다'를 뜻하는 동사 '달랄'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는 15절에 나타난 '곤비한 자'와 동일한 의미이다(KJV, NIV, RSV, LB, the poor).

 

 불의가 스스로 입을 막느니라 -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11-15)으로 악인의 횡포와 압제가 종식되는 것을 의인법적 표현을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침탈당하는 약한 자를 구원하신다(11, 15). 그리고 압제자와 강포자를 징계하신다(12-14). 이는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증표이다. 바로 이 같은 신적 통치 질서에 근거하여 의인은 새로운 존재의 소망을 가지게 되며, 악인은 더 이상 활개치지 못하게 된다. 한편 본절은 '하나님의 길을 의심하는 자들은 그분의 공의가 행사되는 것을 보고 넘어지게 된다'로 해석하기도 한다(Rawlinson). 만일 이 해석을 따른다면 본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한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간접적 비난이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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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은 욥의 고난을 하나님의 연단으로 보는 엘리바스의 견해가 피력된 구절이다. , 그는 욥의 고난을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연단(시험)'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연단을 영구적인 것이 아닌 일시적인(temporary) 것으로 생각했다. 즉 질병(18), 환난(19), 기근과 전쟁(20), 비방과 조롱(21), 멸망과 기근(22)모두가 하나님의 연단으로서 일시적인 것이니 욥이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인내하여야 한다는 권고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본문의 내용과 형식은 잠 3:11,12과 거의 일치한다(12: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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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은 욥의 질병('피부병',2:7,8)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하다. , 욥의 질병이 하나님의 징계의 일환이나 욥이 그것을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고쳐 주신다는 것이다(32:39; 삼상 2:6). 한편 본문은 앞절과 뒷절이 동의(同意)대구로 구성되어 있다. , '아프게 하시다가'- '상하게 하시다가', '싸매시며'-'고치시나니'는 각각 동일한 의미이다. 이렇듯 하나님을 치료자로 그 백성을 병자(病者)로 묘사하는 것은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30:26; 6:1), 예수께서 죄인을 '병든 자', 당신을 '의원'으로 비유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2:17;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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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가지...일곱 가지 - 일종의 관용적 표현으로 여기서는 '모든'(all), '어떠한'(whatever)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처럼 숫자를 반복하여 그 뜻을 강조하는 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학('우가릿 신화')과 히브리 문학의 대표적 특징 중의 하나로 꼽힌다(4:24; 6:16;30:15,18,29; 11:2;1:3-13; 5:5; 집회서25:7; 18:22). 한편 본절은 욥이 징계를 달게 받는다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을 것임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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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근 - 수렵과 목축과 거의 의존하던 고대 족장 시대에서 기근은 가장 큰 두려움 중의 하나였다. 실제로 성경은 족장 시대의 기근의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41:29-36).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가혹한 형벌의 하나로 간주한다(26:19,20; 28:22-24;왕하 8:1; 105:16; 14:30; 24:10).

 

 전쟁 - 이것 역시 고대 근동 지역에 있어서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대부분 유목민으로 이루어진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종종 무리를 지어 다른 부락을 약탈함으로 그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욥의 재산과 육축을 빼앗은 '스바인'(1:15)'갈대아인'(1:17)의 침입도 작은 전쟁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다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고대인들이 겪었던 가장 곤혹스러운 위협에서부터 욥을 지켜 주실 것이라는 엘리바스의 권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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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혀의 채찍 - '불의 혀'(tongue of fire,Gordis), '쏟아지는 저주'(공동 번역), '채찍의 혀'(Hebrew Sermon on the O.T. p. 147) 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어떤 것을 취하든 간에 '중상'(LB, slander), '비방'을 의미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결국 이러한 표현은 채찍이 공중에서 휘도는 것처럼 사람의 입 안에서 날름거려 파괴적 위력을 동반하는 혀의 모습을 비유한 것이라 하겠다(31:18; 18:18). 이처럼 인체(人體)의 일부분을 사물로 형상화(形象化)하거나, 또는 사물의 일부분을 의인화하는 것을 히브리문학의 수사학적 기교이다(예를 들면 15절의 '입의 칼', 20절의 '칼 권세'(이를 문자적으로 옮기면 '칼의 손'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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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짐승 - (, 하야트 하아레츠).직역하면 땅의 짐승'(KJV,NIV,RSV,the beasts of the earth)이며 육축을 해치거나 사람을 다치게 하는 맹수(LB,wildanimals)를 가리킨다. 고대 팔레스틴 지역에 있어서 맹수를 매우 위험스런 존재였으며, 특히 성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적한 민가(民家)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왕하 17:25). 한편, 20-23절에 나타나는 재앙(20-기근, 전쟁'21-중상;22-참화,들짐승)을 에스겔 14:21에 나타나는 재앙과 동일시 하려는 견해도 있다(Rawl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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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 본절은 '밭에 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진다. (1) '들판의 요정'(M.H. Poge), '들판의 주들'(K. Kohler), '들판의 아들들'(G.Beer) 등으로 볼 경우;, 본절은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않는 어둠의 영적 세력들로부터 음해(陰害)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고대인들, 특히 팔레스틴인들은 땅 속에 영(地神)들이 거하며, 인간이 이들을 노하게 할 경우 흉년과 기타 재앙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2) '들판의 돌'로 볼 경우(KJV,RSV,NIV,the stones of thefield); , 밭 농사가 잘되어 풍족한 수확을 거둘 것이라는 표현이다(Hartley,Habel). 다시 말하자면 대부분 돌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지방에 있어서 돌의 방해를 받지 않고 밭 곡식이 잘 성장하여 풍년을 맞는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팔레스틴지역에서는 돌 때문에 밭 곡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러한 견해 중 후자를 따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 본절은 앞절과 동의(同意) 대구를 이루고 있다. 특히 앞절의 '밭의 돌'이 인간의 생존에 적대적인 무생물(無生物)을 상징한다면 여기서의 '짐승'은 공히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생물(生物)을 총제적으로 상징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인간(의인)이 맹수(생물)의 위협없이 평온하고 안온한 삶을 영위함을 의미한다. 엘리바스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당시 팔레스틴에 육축과 인명에 대한 맹수의 위협이 흔했던 사례에 연유한 것 같다(22). 한편 본문은 인간의 타락으로 와해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새롭게 회복될 것임을 나타내는 바, 이는 메시야의 도래로 완성될 새로운 창조 질서(11:6-8; 2:18)를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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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절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는 '장막', '우리' 등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대상이 분명히 지적된 점이 다를 뿐이다.

 

 장막 - 오늘날의 '텐트'(RSV,tent)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는 욥이 성읍(town)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유목민(당시 유목민들은 대부분 성읍에서 떨어져 유랑하면서 육축을 했다)이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29장에서 보듯 욥은 성읍에서 유력한 현자(賢者)중의 하나였으며, 또한 농부요, 목축업자였다(1:3, 15, 17). 그러므로 '장막'은 오히려 ''(LB, home)으로 옮기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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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절 역시 23절과 마찬가지로 동의(同意)대구법이 사용되어 의인의 후예가 번성할 것을 강조해 준다.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 - 과장법과 직유법이 쓰인 문학적 표현이다. 72:16을 고려해 볼 때 이 ''은 성읍 밖에 도처에 널려 있는 야생화(野生花) 또는 잡초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녀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라니'(22:17)라고 약속하셨던 것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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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절에 나타난 장수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상기시킨다(26:3-13; 28:1-14). 실제 고대 히브리인들은 '장수''자손의 번성'(25)과 더불어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다(왕상 3:14; 91:6; 3:2;9:11;10:27; 65:22;8:4 ). 한편,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전개된 엘리바스의 변론의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을 거쳐야만 6장부터 전개될 욥의 반론(反論)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고난의 일반화(一般化):거듭 확인하거니와 욥의 고난은 그의 특별한 죄악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단의 궤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으로 주어진 것이었다(1:9-12;2:4-6). 하나님은 1차적으로 사단의 참소(1:9-11;2:4,5)의 허구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욥에게 시련을 내릴 것을 허용하셨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 의미에서 그것은 욥에게 신앙의 연단(演壇)과 보다 새로운 차원의 계시 신앙을 주기 위해서였다. , 자기 의(self-righteousness)와 선행(善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 만족감을 느낀 욥에게 초월자 앞에서 그것은 절대적 구원의 근거가 아닌 단지 상대적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런 측면에서 욥의 고난은 죄악에 대한 형벌이라기 보다는 의인의 신앙 건덕(建德)을 위한 일종의 '시련'이었다(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이,8:2,16; 17:3; 1:12; 벧전 1:6;4:19 ). 그러나 엘리바스는 이러한 욥의 고난의 특수성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일반적 고난의 범주에 넣어 해석했다. 그 결과 그는 욥이 범죄로 인해 고난받고 있음을 심증적으로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5:3,4).(2) 경험 철학: 엘리바스는 자신의 논증을 확신시키기 위해 자신이 목도한 몇가지 사례를 들었다(4:8-11;5:3). 그런데 이 같은 것들은 원론적인 측면에서는 진리이나 현실의 개별적 부분에 있어서는 그대로 적용되기 힘든 측면을 내포하였다. 결국 그는 부분적 경험에 근거하여 자신의 논리를 세우고 그것을 모든 부분에 적용시키는 잘못을 범했다.(3) 위로자로서의 자격 결여: 그의 논증은 거의가 딱딱한 교리 체계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으며 실로 냉정하기조차 하다. 그는 '위로자'(comforter)라기 보다는 '훈계자' 내지는 '교사'로는 욥 앞에 섰던 것이다. 물론 엘리바스의 고압적이고 냉정한 자세가 5:17-27에서 약간 완화되기는 했다. 그러나 27절에서 보듯 그는 자신을'지혜자'(wiser), 욥을 그 지혜에 복종해야 하는 '학생' 정도로 취급함으로써 욥의 심경을 격발시켰다(6:24-29). 요컨대 엘리바스는 친구에 대한 참된 우정에서 자신의 변론을 시작했으나(4:1,2)욥의 특수한 상황을 적절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상투적인 논리만을 나열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욥을 정죄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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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연구한 바 - 이는 엘리바스의 지금까지의 언설(言說)이 자신의 경험 체계에 근거해 있음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물론 그의 변론이 하나님의 계시(4:12-21)에 의존한 면도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이 계시 역시 그의 경험의 일부였다. 특히 그는 4:85:3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의 사고 체계가 경험에서 실증된 진실임을 강조하였다. 한편 기독교 신앙이 경험, 곧 역사적 산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경험을 초월한 세계를 믿음으로 신뢰하는 데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11:1).